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잎마다 붉어 피를 불어오는 바람이 거기에 숨었나 하노라

[2015 이야기 탐방대]함양 김종직 관련 유적을 둘러보고

손남숙 시인 webmaster@idomin.com 입력 : 2015-11-17 16:13:29 화     노출 : 2015-11-17 16:14:00 화

나는 대체로 공부하기를 좋아하고 임금 이름을 줄줄 외워야 하는 국사시간도 좋아하였으나 무슨 사화(士禍)니 당쟁이니 하면서 골치 아프게 전개되는 일은 도무지 좋아할 수가 없었다. 훈구파니 사림파니 피 터지게 싸운 것도 싫었고, 그 발단과 원인과 배경을 시험 문제지에서 보는 것도 싫었다. 싫어하는 것은 죽어라고 외워도 외워지지 않기 때문에 사화와 관련된 문제는 거의 다 틀렸던 것 같다. 이런 거부감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서 문화재에 관심이 많은 편인데도 집에서 걸어서 십 분이면 갈 수 있는 구니서당을 두 번 정도 갔다. 구니서당은 조선시대 성리학자인 한훤당 김굉필을 받들기 위해 후손들이 지은 것으로 몇 년 전에 보수 공사를 하였는데 어찌나 크고 화려한지 이 건물을 과연 그 조상들이 좋아할까, 하는 오지랖 넓은 생각도 잠깐 했다. 내게는 구니서당 하면 김굉필이고, 김굉필 하면 김종직의 제자, 김종직은 무오사화, 이런 식으로 자동 연상된다.

시월의 이야기탐방대는 점필재 김종직이 1470년에 군수로 있었던 함양으로 향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은 조선 성리학의 대가이며 영남학파의 종조로 일컬어지며 1498년 무오사화의 단서를 제공하고 부관참시를 당한 인물이다. 세조가 왕위 찬탈을 하고 어린 단종을 영월로 내몰았을 때 훗날 죽음의 피바람이 몰아치게 될 무오사화의 빌미를 제공하는 ‘조의제문’을 지었기 때문이다. 그의 나이 27세 때였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로 있을 당시 민의에 따라 정작 본인은 미신이라 믿지 않았음에도 용류담에서 기우제를 지냈고, 관영차밭을 조성하여 쌀과 차를 불합리하게 맞바꾸어야 하는 세수 징수를 개선하고자 했으며 후학을 가르치는 일에도 열심이었다. 이렇듯 충실한 관료와 정통 성리학자 이면에는 아들을 잃은 후 한 그루 나무를 심어 스스로를 위로할 정도로 인간적인 면이 있었다. 지금도 함양초등학교 앞에는 어른 몇 사람의 팔 길이를 이어도 남을 넓은 둘레를 자랑하는 우람한 느티나무가 서 있다. 그 튼튼한 아랫도리에 비해 가지들은 가늘게 흩어지듯이 올라갔다가 다시 둥글어지며 하늘과 초등학교 건물 사이를 메우고 있는데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니 자식 잃은 아비의 애틋함이 뭉근히 끓어오르는 것 같았다. 잎은 가장자리에서부터 물들어 곧 나무 전체를 붉고 노랗게 덮을 것이었다.

학사루는 신라 말 함양태수였던 최치원이 자주 올라 시를 읊던 곳으로 원래는 옛 동헌 자리였던 함양초등학교 뒤뜰에 있던 것을 1979년 현재의 군청 앞으로 이전하였다고 한다. 최치원은 뛰어난 문장가였으나 난세에 뜻을 이루지 못함을 깨닫고 은거하다가 신선이 되어 사라졌다는 인물이다. 이 학사루에 얽힌 이야기가 참으로 묘하다. 바로 이곳에서 김종직과 유자광 사이의 비극이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유자광은 천출로 태어났으나 세조에 의해 발탁되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하면서 승승장구하여 형조판서,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한, 흔히 조선 최고의 간신으로 알려져 있지만 또 어찌 보면 처세에 매우 능한 인물이었다. 그런 그를 양반 김종직이 곱게 받아들이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 때문인지 몰라도 관찰사로 함양에 오는 유자광을 맞이하지 않고 이은대에 숨어버렸다. 자신보다 직위가 높은 유자광을 고의적으로 외면한 것이다. 또한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시판詩板)을 떼어내게 했다. 아니 왜? 유자광의 시가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최치원이 오르던 학사루를 감히 천출이 올라 더럽혔다고 생각했을까? 그날 땅에 떨어진 것은 시판이 아니라 유자광의 자존심이었다. 양반 김종직으로선 유자광과 대면하는 일 자체가 치욕이었을 것이나 유자광은 평생 잊지 못할 모욕감을 함양에서 받았다. 치욕과 모욕이 한 자리에서 끓어올랐으니 필시 사단이 나게 마련이다.

허균은 김종직의 문장을 칭송한 후 덧붙이기를 ‘조의제문을 쓸 정도였으면 벼슬을 하지 말았어야 한다.’고 했다. 세조의 부당함을 은유적으로 지적하고는 실제로는 그 왕권 아래에서 탐욕스럽게 일한 것을 꼬집은 것이었다. 허균은 능력이 뛰어남에도 서출이라는 이유로 등용되지 않는, 애당초 문턱에도 가지 못하게 하는 조선시대 신분제를 <홍길동전>을 통해 비판한 인물이다. 그런 그의 눈에는 김종직의 처신이야말로 위선자, 파벌 조성자로 보였을 것이다. 김종직의 이중성은 한명회를 위해 지은 깃털 같은 시와 극찬, 유자광을 피해 이은대로 숨은 것에서도 드러나는 것이다. 하지만 후세는 김종직의 나약함, 비겁함을 가리고 강직한 유학자 이미지를 고착시켰다. 그게 조선의 이념과 잘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은 “신은 신으로 몰아내고, 신이 있던 자리 역시 그에 버금가는 신을 들여 기존의 신을 눌러버린다.”고 했다. 이은대 자리가 아주 오래 전에는 성황당이 있었을 것이며 조선시대에는 이은대,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어 참배객을 불렀고, 지금은 호국영령을 모신 충혼탑이 있어 장소로서의 의미가 크다는 것이다. 그래서인가 숨은 듯 돌아앉은 듯 울울한 나무로 둘러싸인 곳이 예사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붉음은 선연한 피의 색. 피를 몰아오는 바람은 언제나 작고 가벼운 것에서부터 시작된다. 순간 붉게 타오르다가 땅에 떨어지는 나뭇잎처럼 참화를 당한 사람도 그랬을 것이었다. 결국 마음에 물든 것을 꺼내는 방식의 차이가 마지막 이야기를 완성한다. 유자광은 무오사화, 갑자사화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유배지에서 죽었고, 김종직은 후대에 길이길이 회자될 붉은 피 한 줌을 뿌리고 갔다. 그 붉음을 일렁이게 하는 씨앗이 지리산 자락에 넓게 퍼져 좌우 대립의 고단한 현대사까지 이어져온 것은 아닌지 물음은 또 한 물음을 불렀다. 이에 답하는 이 없지만 가을걷이 끝나고 양파심기가 한창인 들녘은 평화롭기만 했다.

2015년 10월 21일 함양 김종직 관련 유적을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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