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이야기 탐방대]하동 세이암을 둘러보고

끝자락이 물든 벚나무는 양쪽 길에서 안으로 휘어지면서 서로를 붙들었다. 봄에는 꽃으로 만나 아름다웠고 가을에는 잎을 젖히며 이 나무와 저 나무의 다정함을 잇는다. 이웃에서 넘어온 나뭇가지들이 저편의 다른 나뭇가지를 만나려고 그림자를 살짝 입히는 듯했다. 더듬어서 포개는 것이 아니라 겹치면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나무와 나무가 만나는 순간에는 서로의 반대편에서 기울어지는 해를 받으려고 서로 다른 꿈을 꾸는 것도 잠시 잊을 것이었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하동은 나무들이 우대받는 고장이다. 벚나무는 가로수로 봄날의 십리를 뽐내고, 화개면 곳곳에는 차나무가 지리적인 특성을 빚어낸다. 그리고 지금 만나러 가는 범왕리 푸조나무는 나이가 오백 살이고 고운 최치원(崔致遠, 857년~ )이 수선스러운 세상을 등지고 지리산으로 들어갈 때 꽂아둔 지팡이에서 움터서 자란 나무라고 전해진다. 그 지팡이에 무슨 도력이 깃들어 살아있는 생명이 되었겠는가. 참담한 생활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이 그리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요컨대 기적이 필요한 시절이었던 것이다.

푸조나무 앞에 붙은 ‘중국 시진핑 국가 주석이 언급한 별천지 화개동’이라는 문구와 최치원 그림은 뭐라 말하기 힘든 기묘한 뒤섞임이 느껴졌는데 그건 아마도 공산국가에서 급격하게 자본화한 중국 이미지와 최치원 시대의 중국 이미지가 혼융되어서일 것이다. 시진핑이 화개동을 별나게 표현한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는 것은 중국인 관광객 수가 입증하겠지만 화개천 물길은 과연 최근 우리 눈을 혹사하고 귀를 괴롭히는 모든 것들을 씻어내고 싶을 만치 맑았다. 국왕이 사신을 보내 국정을 같이 논하자는 말에 최치원은 화개천에 귀를 씻고 손가락으로 바위에 ‘세이암’이라는 글자를 새겼다고 한다. 대개는 부름을 받들어 왕을 만나러 갔을 텐데 최치원은 그렇게 하지 않았기에, 터럭만큼의 미련도 남기지 않았기에 오히려 더 크고 신령한 인물로 남을 수 있었다. 여기에 백성들이 열광하는 것은 이야기 한 줄에 기대어서라도 기적을 바라는 마음, 더럽혀지고 짓밟힌 마음을 정화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어서일 것이다. 그리하여 범왕리에서 나고 자란 사람들, 평생을 푸조나무와 같이 살아온 노인들에게는 최치원의 지팡이에서 자란 푸조나무와 도력으로 쓴 세이암 글자는 결코 변할 수 없는 진리인 것이다. 뜨르르한 권문세가나 큰 재산을 일으킨 사람의 뒤끝은 흉흉한 잡담이나 심난한 말로 도배되기 일쑤이지만 능히 그럴 만한 실력을 갖추고도 속세의 연을 끊고 홀연히 사라진 사람은 돌과 나무와 같은 자연물로 거듭 나서 천 년의 세월을 기억하도록 이끈다.

진감선사비문은 쌍계사에서 77세의 나이로 입적한 진감선사 혜소를 위해 885년 헌강왕이 ‘진감선사대공영탑’이라 시호를 추증하여 탑비를 세우도록 한 것인데 당시의 대표적인 문인이었던 최치원이 비문을 짓고 글씨를 쓴 것이다. 진감선사(774∼850)는 불교음악인 범패를 도입하여 사회의 여러 계급에까지 널리 보급하고 조직화한 승려이다. 범패는 수행의 한 방법으로 선사들이 많이 사용하였으며 신라 말기 선종(禪宗)이 염불사상을 수용한 것과 연관이 있다. 그는 또 차나무를 들여와 지리산 일대에 재배하였다고도 전한다. 최치원은 “멀리서 현묘한 도를 전해와서 우리나라에 널리 빛내었으니 어찌 다른 사람이랴. 선사가 바로 그 사람이다.”고 하였다. 또 선사의 꾸밈이 없는 성품을 말하며 지위가 높은 이나 낮은 이, 늙은이와 젊은이를 대접함이 한결같았다고 했다. 한결같음이 뭐겠는가. 신분의 높고 낮음, 귀족과 평민의 차이에 자신을 속박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 유명한 토황소격문을 지어서 당나라 사람을 놀라게 하였고, 신라로 돌아와서는 진성여왕에게 시무책을 올리고 개혁정치를 꾀하다가 귀족들의 반대와 골품제의 벽 때문에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던 최치원은 크게 낙담했을 것이다. 꼭 그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자신의 능력과 등용을 가로막고 있는 제도를 향한 비유적인 표현이 진감선사비문에 은근히 녹아 있다. 즉 불교와 유교, 도교를 아우르는 사상의 융합이 그것이다.

지금 이 시대는 파렴치하고 뻔뻔한 자들이 선량하고 정직한 자를 괴롭히고 거꾸로 들추어내어 승승장구한다. 그리고도 매일 거짓을 쏟아내고 또 달콤한 말로 덮어서 감추려고 한다. 거짓에 거짓을 보태고 거짓이 참말 행세를 하는데 정말 무서운 것은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생짜배기 사실을 매일 보고 들어야 하는 것이다. 이런 시대에 만약 최치원이 살아 있다면 뭐라고 할 것인가?

때로는 문득 사라지는 사람에 대한 부러움이 솟는다. 당대의 아득함을 어쩌지 못하여 어느 날 훌훌 사라질 수 있다니 그것 또한 삶을 통째로 씻는 일이 아닌가. 최치원이 하동 쌍계사에서 산문 밖으로 나가는 승려 호원상인에게 지어준 ‘산에 들어가며’라는 시를 읽으니 그 마음 더 커진다.


중아, 너는 청산이 좋다고 말하지 말라

산이 좋은데 어찌 산에서 나왔는가

훗날 내가 어찌 하는지 두고 보아라

한 번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 나오지 않으리.


최치원은 정말로 산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았고, 그가 남긴 문장과 행적은 우리 앞에 또 다른 질문으로 와 있다. 그리고 최치원이 그때 어찌 하였는지를 계속 살피고 공부해야 한다. 최치원이 말한 대로 되었다. 하지만 만약 ‘훗날 어찌하는지 두고 보아라’가 ‘지금 어찌하는지 보아라’였다면 어땠을까? 신라의 상황이 달라졌을까?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그의 글에 입혀보는 시절이 하수상하여 미련한 질문을 덧대본다. 씻어낼 말은 많고 씻어내려 해도 잘 씻어지지 않는 시절에 거슬러 최치원을 새겨보는 마음, 길 끝에서 부르는 나뭇가지처럼 긴 그림자로 와서 귀에 걸린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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