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이야기 탐방대]

오늘도 나는 거리를 본다. 내 곁을 스쳐가는 숱한 사람들과 그들이 토해내는 이야기를 들으며 세월의 변화를 지켜본다. 내 터전을 둘러싼 초등학교 아이들이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고 죽어간 이야기를 어찌 필설로 다 표현할 수 있으랴. 그저 모든 것은 지나갈 따름이다. 나는 당신을 생각한다. 당신은 뛰어난 문장가였다. 이태백이나 두보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나는 외로울 때면 당신이 남긴 시 한 수를 곡진한 마음으로 읊어본다.

“대를 잇는 데에는 어미의 귀천을 따지지만 繼序唯論母貴賤

이름 떨치는 것은 자식이 똑똑한가 아닌가에 있지 揚名正系子賢愚

훗날 봉양하는 효도를 누구에게 책임을 지우랴 他年反哺將誰責

나보다 나은 아이 되었으면 하며 명주를 어루만질 뿐 且弄明珠獨自娛”

시의 가락이 내 몸의 모든 혈관을 파르르 떨게 한다. 당신이 대를 이을 아들을 얻은 감흥을 적은 시 <7월 22일 기쁨을 적다>는 당신의 기쁨에 찬 찬사로 언제까지 나를 행복하게 한다.

"꽃을 보아도 흐릿하고 이빨까지 빠지는 나이에 이런 경사가 있는가."

행복에 겨운 당신의 흥얼거림이 아직도 내 귓가를 간질인다.

우수수 가랑잎이 떨어진다. 바람이 불 때마다 오색 나뭇잎이 떨어지기도 하고 우르르 몰려 구석을 찾아 앉기도 한다. 하늘 높은 줄만 안 것인지. 간짓대 같은 사내와 땅 넓은 줄만 안 것인지. 펑퍼짐한 여자가 의자에 앉아 꼴값을 떨고 있다. 사내는 연신 여자의 손을 주무르고, 여자는 한 손은 사내에게 맡기고 한 손에는 담배를 물고 빠끔빠끔 빨고 있다. 산전수전공중전까지 다 겪은 얼굴의 여자에게 무엇을 기대 저리 알랑방귀를 뀌고 있는가. 여자 옆에 놓인 가방이 좀 후줄근해 보이긴 하나 악어가죽이다.

여자는 잠깐 화장실을 다녀오더니 다시 담배에 불을 붙인다. 사내는 여자의 어깨에 손을 얹는다. 여자의 목은 스르륵 남자의 품으로 기운다. 척 하면 삼척이다. 여자는 이미 사내가 원하는 것을 주기로 마음을 잡은 것 같다. 저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가 느끼는 것은 삶의 비애고 인간의 비애다. 중년 여인의 외로움을 훔쳐 착취하는 사내의 빤지르르한 얼굴을 한 대 갈겨주고 싶다. 묵인하기엔 너무 추한 모습인데도 나는 그럴 수가 없다. 차라리 그들의 머리 위에 예쁜 나뭇잎을 수북하게 떨어뜨려 주자. 몸을 살짝 뒤틀었다.

“어머, 가랑잎이 비처럼 떨어지네. 아이 예쁘다. 여긴 가을이 푹 익었네.”

그때 막 도착한 한 무리의 남녀가 탄성을 지른다. 한 여자가 손바닥을 펴서 내민다. 나는 그녀의 손 위에도 나뭇잎 하나 얹어주었다.

“학사루는 어디 있어? 정원이 참 아름답다. 저 의자에 우리도 좀 앉아보자.”

“학사루는 건너편에 있지요. 일단 숨 좀 돌리고 가 봅시다.”

“원래 저기 있었어요?”

“아니요. 원래는 저기 함양초등학교 자리에 있었어요. 1979년돈가 옮겨 지은 거랍니다.”

문화재에 관심 있는 사람들인 모양이다. 그들은 사진 찍기에 바빠 정신없다. 몇 종류 안 되는 정원수지만 꼼꼼하게 살펴본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참 많이 알고 있다. 내 곁을 스쳐간 사람들이 하도 많아서 일일이 다 기억할 수는 없지만 굵직굵직한 사건사고는 내 머릿속에 각인된 채 나잇살을 감고 있다.

“일단 여기 좀 앉으세요. 오늘 일정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길 건너 학사루에 가기 전에 저기 있는 천연기념물인 느티나무를 한 번 보시고 가시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옛날에는 여기가 전부 객사 자리였답니다. 관아를 중심으로 객사가 형성되어 있었지요.”

그들이 오자 사내는 여자의 손을 잡고 일어서서 정원 밖으로 나간다. 여자는 악어가방을 꽉 잡고 뒤뚱거리며 남자를 따른다. 여자의 뒷모습이 한없이 처량하다. 여자여, 제발 간과 쓸개까지 몽땅 빼 주고 울지 마시오. 나는 여자의 머리 위에 노랗게 물든 나뭇잎 하나 살짝 올려주었다.

나는 오래 전부터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 보고 다 듣고 있다. 그들은 내가 있거나 말거나, 내가 듣거나 말거나 관심을 두지 않는다. 그들도 이미 나란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아니까. 절대로 비밀을 누설하지 않으리란 것은 보증한다. 나는 눈과 귀와 입이 있어도 귀머거리에 벙어리 행세를 한다. 앞으로도 쭉 그럴 것이다. 이 나라가 어떻게 바뀌어가고 역사가 어떻게 쓰일지 모르나 내가 살아있는 한 기록하고 저장해 둘 것이다. 내 사명이니까.

“자, 일단 저기 느티나무 아래로 갑시다. 오전 일정은 저기서 시작해 학사루, 이은대, 김종직 관영 차밭입니다. 점심은 거기 가서 먹지요. 오후에는 용유담과 와불을 둘러 하산합니다.”

나는 또 속울음 삼켜야 할 일행을 만난 것 같다. 당신의 발자취를 찾아온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나는 울컥한다. 점필재 김종직과 조선 4대 간신이라 불리는 사람, 유자광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이젠 눈물도 안 난다. 내 존재로 인해 역사 속 인물이 된 사람들과 그들이 살았던 시대를 알려주는 것도 사명이다. 현재에 와서 역사의 재해석은 불가피한 것일지 모르나 속담에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했다. 역사의 인물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나올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한계라고 본다.

"천하에는 천하도(天下圖)가 있고 일국에는 일국도(一國圖)가 있듯이 읍에는 읍도(邑圖)가 있어야 한다."

"토호나 향리의 속임과 거짓을 막고 백성에게 거두는 조용조(租庸調)를 균평히 하여 국가에 바치는 일을 제대로 하자면 마을의 호구와 간전 등을 읍도에 적어 놓아야 한다."

라고 한 당신을 내가 어찌 잊을 수 있으랴.

한때 나는 많이 울었다. 왜 내가 살아야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더라. 내가 사랑하던 사람이 환갑 겨우 지나 지병으로 일찍 세상을 하직한 것도 서러운데 묏등에 든 시체를 파내 목을 베는 부관참시라는 참혹한 형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나도 같이 죽고 싶었다. 당신은 내 아버지이기도 하고, 내 스승이기도 하다. 너무 오래 사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란 것을 깨달은 것도 그때였다.

다만 나처럼 당신을 사랑한 호랑이가 당신의 사후, 6년 만에 무덤에서 꺼내 사지를 찢긴 당신의 시신 곁에서 몇날며칠을 지키다가 결국 그 자리에서 죽었다는 소식에 감동했다. 나도 그렇게 죽길 바랐으나 마음을 바꾸었다. 내가 살아 후세 사람들이 당신을 만만세세 기억하게 해 주는 것도 당신을 위하는 길이란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나를 앞에 두고 토론이 분분하다. 내가 태어나게 된 사연과 학사루에 얽힌 이야기를. 학사루는 내 생각이지만 통일신라시대에 건축된 것이 아닌가. 추정할 뿐 언제 세워졌는지 모른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시문을 짓고 놀던 곳이고 당신께서 시문을 짓고 논하던 곳이기에 지금도 여전히 나의 사랑은 학사루에 머물지만. 그 때는 내 주변이 객사였고, 학사루는 선비들이 올라 풍류를 즐기던 곳이다. 나비 같은 기생을 품고 술잔을 기울이던 곳, 눈을 감으면 환영처럼 가야금소리 들리고 오색나비들이 하늘거리며 춤을 추었다.

한 때 학사루는 아이들이 뛰놀던 교실이었고, 학교 도서관이기도 했다. 나는 아이들이 뛰어놀 때와 산더미 같이 책을 쌓아놓았던 시절이 가장 좋았다. 아이들은 학사루에서 나와 내 등에 올라타고 놀길 좋아했다. 내 다리에 걸터앉아 책을 읽는 아이도 있었다. 나도 아이들을 사랑했다. 그들은 나를 쓰다듬기도 하고 껴안기도 한다.

나는 기억한다. 그날, 관찰사가 되어 입신양명한 모습을 지곡 사는 고모에게 보여주기 위해 한양에서 내려왔던 유자광, 그를 만나기 싫어 이은대로 피신한 당신, 유자광이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관아로 돌아온 당신의 수염이 부들부들 떨렸다. 감히 얼자 따위가. 혈기왕성하고 앞날이 총망 되던 남이장군을 모함해 죽인 사악한 그 자가. 당신은 격노했었다.

김종직 : 아니, 유자광 따위가 감히 학사루에 현판을 걸 자격이 있느냐? 고매하신 선비들의 현판 가운데 어찌 쌍놈의 작품이 걸릴 수 있느냐? 당장 저 현판을 당장 내려라.

하인 : 사또, 그래도 이 현판은 관찰사 나으리의 현판이옵니다.

김종직 : 관찰사가 아니라 정승이면 무엇 하리? 쌍놈은 쌍놈이니라.

유자광, 그가 시를 짓고 그림을 그려 만들어 건 학사루의 현판은 객사 아궁이 속에 들어가 객사에 묵던 사람들의 등골을 뜨끈하게 해 주었다. 당신은 그때 알았겠는가. 그 일이 유자광의 원한을 사게 된 일이라는 것을. 아무리 청렴결백하고 고을백성으로부터 신망을 받는 현감이라 해도 백사람이 다 좋아할 수는 없는 법, 발 없는 말이 천리 가는 법이다. 그것이 성리학의 대가이자 사림파의 거두였던 당신을 비롯해 자자손손 선후배, 제자까지 싸잡아 죽음의 구덩이로 몰아넣게 될 줄 어찌 알았겠는가. 당신이 지은 <조의제문>으로 사후 부관참시를 당할 줄이야 어찌 알았겠는가. 유자광, 그도 불쌍한 사람임에는 틀림없다. 양반이 무엇이고, 쌍놈이 무엇이기에 어려서부터 천대받고 멸시 받았던 그 한은 그를 현실파로 만들었고 눈치코치 백단의 선수로 만들었지만 그 속에 든 열등의식과 피해의식은 아무도 간파하지 못했음이다. 당신의 그 아킬레스건을 건드렸으니 어찌 안타깝지 않으랴.

유자광은 학사루를 유람하고 고모 댁에 갔지만 거기서도 푸대접을 받았다. 관찰사란 명찰을 달았지만 고모로부터 수모를 당했으니 어찌 참을 수 있었으랴. 그는 겉으로 웃고 속으로 이를 갈았다. 풍수지리에 능한 그는 고모 댁과 그 마을조차 폭삭 망하게 만들어버렸다. 여자가 앙심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지만 남자가 앙심을 품으면 피비린내가 아니 날 수 없었나 보다.

당신은 비록 왕이라고 할지라도 도리와 덕을 지키지 않으면 비판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슬프다. 이 시대에 당신 같은 정치가가 한 사람이도 있다면 얼마나 좋으리. 당신은 사림파의 거두였지만 개인사는 참으로 기구했다. 자식은 줄줄이 낳았으되 모두 잃고 아내마저 잃었으니 말이다. <망처에 바치는 제문> 중 일부를 읊어본다.

“적막해라 서편 방 그대 있던 곳이었네 寂廖西閤 君其在玆

옷 이불 대야 빗자루 그대 물건 그대로 있네 衣衾盥櫛 象君平時

음식과 기물도 편의대로 따랐건만 飮食供具 亦且隨宜

자식 낳은 수고에도 아이 하나 없으니 君昔劬勞 終無一兒

상복 입을 사람 누구인가 아아 모두 그만이로세 執喪者誰 嗚呼已而”

그러나 당신에게도 꽃이 피고 봄이 오더이다. 박복한 당신은 홀로 동가식서가숙 하다가 느지막하게 재혼을 하게 되었고 귀한 아들을 얻어 대를 잇게 되었다. 나는 당신에게 고백한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내 이름은 목아, 당신의 아들로 태어난 지 오백 년이 넘었지요. 함양현감으로 재직하던 당신은 목아란 아들을 잃고 나를 아들로 받아들였지요. 틈만 나면 내 곁에 와서 나를 쓰다듬으며 당신의 마음을 열어주셨지요. 당신은 강직한 성품이지만 시문에 능하고 도를 사랑한 만큼 마음이 따뜻하고 여린 어른이셨지요. 당신은 고을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함양군수로 있으면서 학교를 세워 인재를 기르고 백성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민중을 화합하는 것을 주임무로 삼으셨지요. 또한 행음주례를 정하고 주자가례와 여씨 춘추를 참고로 향약을 정하여 보급시켰으며, 관영차밭을 만들어 백성의 고단함을 덜어주려 하셨지요. 도적은 용서하지 않고 엄히 다스렸지요. 당신이 재직하는 동안 함양군은 태평성대를 누렸지요.

현재 당신의 영혼이 있다면 보십시오. 이 나라 정치판을 보고 한 말씀 해 주십시오. 인재가 없는 겁니까? 인재를 뽑을 눈이 없는 겁니까. 백성보다 개인의 출세에만 뜻을 둔 정치인의 세상 같지 않습니까? 부디 꿈에라도 나타나셔서 따끔한 한 말씀 내려주십시오. 연암 박지원 선생의 『연암집(燕巖集)』에서 “학문을 강론하고 도(道)를 논하는 사람들을 사림(士林)이라 한다”고 했습니다. 오늘날 백성보다 권세와 돈에 목숨 건 정치인을 보면서 당신이 그립습니다.’

이제 그들이 내 곁을 떠난다. 나는 손을 흔든다. 그들이 내 곁을 떠나 학사루를 둘러보고 이은대로 떠나는 것을 바라본다. 그들처럼 많은 이들이 당신의 일대기를 읽고 당신의 사상을 배우기를. 나는 그들의 머리 위에 오색 가랑잎을 빗줄기처럼 떨어뜨린다.

“어머, 단풍잎이 어쩜 이리 고울까. 천연기념물이라더니 참 우아하고 아름다워.”

2015년 10월 21일 함양 김종직 관련 유적을 돌아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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