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이야기 탐방대]

고려 말, 우왕 12년 1386년 가을이었다. 오늘도 화주승 각선은 멀고 먼 길을 발품을 팔고 다녔다. 바랑 속에는 탁발로 얻은 곡식이 한 짐이지만 각선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승복으로 감춰진 허리에 찬 전대에 손을 댔다. 두둑한 것이 만져 졌다. 각선은 두 손을 모으고 그 자리에서 북쪽을 우러러 합장했다. 참으로 고맙고 소중한 것이었다. 각선은 천천히 선들재 고갯마루에 올랐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앞이 탁 틔었다. 멀리 광포만의 가을빛은 아름다웠다. 띠섬은 오색 단풍으로 곱게 물들어 있고, 흰뺨검둥오리, 물떼새, 청둥오리, 도요새 등이 한가롭게 노닐었다.

각선은 널따란 반석에 바랑을 벗어놓고 퍼질러 앉았다. 광포만은 언제 봐도 아늑하고 평화롭다. 나라가 저 바다처럼 평화로울 수 있으면 중생의 삶도 여유로워질 텐데. 각선의 눈은 천천히 띠섬에 가서 머물다가 해수가 밀려든 단속마을 앞의 묵곡천을 바라봤다. 묵곡천의 민물이 빠르게 흘러 광포만의 짠물과 합쳐지면서 소용돌이를 쳤다. 저기, 저 자리다. 산곡수와 해수가 합쳐져 춤을 추며 어우러지는 곳, 갯골이었다. 각선은 가슴이 뛰었다. 심호흡을 깊게 했다.

아이고 시님 거 좀 있어보이소.

머리가 하얗게 센 할머니가 함지를 이고 힘겹게 선들재를 향해 올라오고 있었다. 각선이 올라왔던 비탈길이었다. 각선은 선뜻 일어나 몇 발자국 뛰어내려가 할머니의 머리에 얹힌 함지를 받아들었다. 할머니는 한사코 함지를 잡은 손을 놓지 않았다.

괘한심더. 등 너머 완사 장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예. 빈 소쿠립니더.

할매보다 제가 더 젊은께 주이소. 저기 재까지 갖다 디리겠습니더.

할머니는 각선의 손을 꼭 잡았다. 갯가에 사는 할머니는 사천만의 갯벌에서 잡은 해산물을 선들재를 넘어 완사장에 내다팔고 오는 길이었다. 두 사람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선들재 고갯마루에 올랐다. 각선이 앉았던 너럭바위에 할머니도 엉덩이를 걸치며 큰 숨을 푹 토해 놓고 각선에게 물었다.

아이고 이리 고마울 데가. 낮에도 여시가 나와 간을 빼 간다는 고개 아입니꺼. 할마이 혼자 넘기가 겁나서예. 해도 뉘엿뉘엿 지고 있제. 혼자 올매나 겁났던지. 장꾼으로 같이 갔던 젊은 것들은 금세 가삐고 내만 남은 기라예. 근데 시님, 오데서 오는 길입니꺼? 문달사 작은 시님 맞지예? 요새는 나라가 하도 어수선하니 물 기 없십니더. 지도 올릴 거는 없고 해산물 팔아서 보리쌀 두 됫박 팔아오는 길인데 한 됫박이라도 부처님 전에 올리고 싶으니 바랑 벌리 보이소.

고맙습니더 보살님! 부처님께 올리게 함자를 알려주십시오.

천한 것이 이름이 있습니꺼. 고마 갯골 생이할매라 카모 됩니더.

각선은 할머니를 향해 두 손을 모으고 합장했다. 보리쌀 한 됫박도 부처님의 가피였다. 붓 한 자루면 어떻고, 밀기울 한 됫박이면 어떤가. 티끌모아 태산이다. 비밀스럽게 큰일을 벌여놓고 자신이 그 짐을 지겠다고 자처해서 나섰으니 끝날 때까지 최선을 다하는 것이 부처님에 대한 도리요. 스승님에 대한 예의였다. 각선은 허리에 둘렀던 전대를 풀고 그 안에 든 서책을 꺼냈다. 바랑에서 먹통과 붓을 꺼내 너럭바위에 놓고 서책의 빈 칸을 펴고 썼다. ‘홍무 초년 모월모일 갯골 생이할매 보리쌀 한 되 시주.’라고 쓴 후 먹물이 마를 때를 기다렸다가 두 사람은 선들재 고개를 넘었다. 생이할매는 선들재 아래에서 갯골로 각선은 단속마을 인근에 있는 문달사를 향해 갔다. 문달사는 유서 깊은 절이다. 주지승으로 계신 달공은 시·서·화에 능한 고승이었다.

각선은 일주문에 들어서자마자 곧장 대웅전으로 향했다. 부처님께 삼배를 드리고 나오니 공양주가 절 마당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주지스님이 서너 시각 전부터 기다린다며 빨리 선방으로 가라한다. 각선은 바랑을 공양주에게 벗어주고 주지스님이 계신 선방으로 향했다.

스님 다녀왔습니다.

들어오시오. 귀한 분이 진작 오셔서 그대를 기다리고 계시오.

선방 문이 벌컥 열렸다.

방안에 좌정하여 차를 마시고 있는 사람은 한때 왕명으로 장군을 지냈으나 권부에서 밀려나 낙향해서 승려가 된 문달사 주지승이자 고승인 달공 스님과 선비인 수안 거사, 서각 쟁이 김용 거사가 있었다. 각선은 방에 들어갔다. 달공 스님은 윗목에 앉으시고 수안거사와 김용은 아랫목으로 내려앉았다. 각선은 달공스님께 큰 절을 올렸다.

소승, 맡은 바 책임을 다하고 돌아왔습니다. 결계를 받은 대중이 4099명이었는데 선들재에서 생이할매라는 분으로부터 보리쌀 한 됫박을 시주로 받아 4100명이 참여를 했습니다. 여기 시주 목록을 적은 서책을 올립니다.

각선은 엎드려서 서책을 달공 앞으로 밀었다.

고생했소.

달공스님이 각선의 손을 잡았다. 수안거사와 김용 서각장이가 훌쩍거렸다. 사내들이 눈물을 흘리다니. 각선의 어깨도 들썩거렸다. 감격의 눈물이었다. 3년을 공들였다. 세 해 동안 발바닥이 부르트도록 발품을 팔고 다녔다. 아무도 모르게 진행시켜 온 일,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달공 스님이 말했다.

오늘까지 결계를 마치고 행사를 진행하도록 합시다. 오랑캐가 시도 때도 없이 국경을 침범하고 바다를 건너와 백성을 괴롭히는 이때, 임금의 안위와 내세에 중생을 구하러 오실 미륵불을 맞이하기 위한 시초를 마련하는 일이니 신심을 다해야 할 것입니다. 시일이 촉박하니 모두 한 마음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 할 것이고 관에서 눈치채지 못하도록 입단속 잘 하셔야 합니다. 그럼 일백그루의 참나무를 준비하는 것과 비문은 소승이 짓지요.

결계를 하신 우바새와 우바이, 비구, 비구니에게 내년 팔월 초파일에 일제히 거동하라고 파발을 띄우는 일은 각선이 해 주시오.

그럼 저는 그 비문을 쓰겠습니다.

수안거사가 말하자

바구에 새기는 것은 돌쟁이 몫이니 목숨을 바치겠나이다.

김용거사가 말했다.

모든 일은 척척 진행되어 그 날이 왔다. 며칠 전부터 선들재 주변에 온통 통길이 났다. 가능하면 사람들 눈을 피해 넘어오는 남녀노소 구분이 없었다. 스님들과 보부상들, 가마를 타고 오는 양반과 그의 가솔들이 문달사와 인근 마을에 속속 들이찼다. 묵곡천 주변 마을은 온통 사람들로 벅적거렸지만 소리 소문 없이 그림자처럼 움직였다. 고려 말, 우왕 13년 1387년 홍무초년 정묘 팔월 초팔일 새벽이었다. 각선은 새벽 예불을 마치고 묵곡천변으로 내려갔다. 참나무를 실은 달구지가 마을 앞길에 줄을 서고, 멍에를 멘 소는 농부가 갖다 준 풀을 느긋하게 먹고 되새김질을 하고 있었다.

밤새 찰랑거리던 묵곡천의 바닷물이 아침부터 빠지고 있었다. 단속마을 앞까지 들어왔던 바닷물이 쑥쑥 빠지기 시작했다. 가장 긴 간조 때였다. 묵곡천, 즉 갯골에서 바닷물이 완전히 빠졌을 때 광포만의 들머리의 갯벌은 더 없이 넓게 펼쳐졌다. 간조 때를 기다리던 장골들이 연장을 들고 갯벌로 들어섰다. 일사불란하게 구덩이 파는 작업을 하고 아낙은 구덩이 밖에서 일손을 도왔다. 오시(午時)가 되었다. 오시를 기해 묵곡천 갯벌에는 백여 그루의 참나무가 묻히고, 갯골 언덕바지에 있던 커다란 바위에 비문이 새겨졌다.

<사천매향비의 전문과 내용>

천인이 서로 계를 맺어 매향하며 원을 세우는 글

대저 무상묘과를 구하고저 원한다면 반드시 행(行)과 원(願)이 서로 따라야 되는 것입니다. 행(行)은 있으나 원(願)이 없다면 그 행은 외로운 것이 되며, 또 원이 없는 행은 헛된 것이라, 행이 외로우면 그 맺음은 없는 것이며, 또 원이 허(虛)하면 복(福)이 부족하므로 반드시 행과 원을 함께 움직여야만 비로소 그 무상의 묘과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이에 빈도(貧道)는 여러 사람(천인)들과 한마음으로 발원하여 침향목(沈香木:여기서는 문맥상 나무를 가라앉힘, 즉 매향을 하고 침향이 되기를 기다린다는 뜻으로 해석)을 기다린 다음 자씨(慈氏:미륵불을 자씨미륵이라고 일컫기도 함) 하생 후 용화삼회(龍華三會)에 이 향(침향)으로 봉헌공양하기를 원하오며, 미륵여래님의 청정한 법문을 듣고 무생인을 깨우쳐, 불퇴지를 이루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에 모든 사람들이 같은 마음으로 발원하는 것은 생이 다하면 내원(內院:내원궁)에서 태어나고 불퇴지를 얻기를 기약하니 자씨미륵님께서 오시는 날 목숨을 이 나라에 맡길 것을 기약하며 용화삼회의 초회에 참가하여 법을 듣고 도를 깨달아 일체를 갖추어 정각을 이루게 되기를 서원합니다.

주상전하 만만세 국태민안

홍무초년 정묘팔월 초팔일에 묻다(매향하다).

우바새 우바이 비구 비구니

모두 4,100인이 올립니다.

달공(達空)이 비문을 짓고 수안(手安)이 비문을 썼으며,

김용(金用)이 명문각자하고 대화주(大化主)는 각선(覺禪)임.

<사천매향비에 대해 인터넷 검색에서 찾은 글, 능인향당 서재에서 옮겨 적었다.>

각선은 소리 없이 울었다. 대화주란 이름으로 매향비에 새겨진 자신의 이름도 이름이지만 은사인 달공 스님이 이룬 업적은 참으로 눈부셨다. 아마도 달공 스님이 없었다면 이런 대 결계는 이루어질 수 없었을지 모른다. 모든 것이 부처님의 가피로 이루어진 일이다. 사천 여 명의 비구, 비구니, 우바새, 우바이가 묵곡천과 광포만이 만나는 갯벌 주변을 온통 하얀 꽃으로 피어났다. 스님의 독경 소리와 목탁 소리는 하늘을 울리고, 땅을 울렸다. 억겁의 세월이 흐른 후에라도 미륵불이 도래하여 복되고 복된 참 세상이 펼쳐지기를.

각선은 푸른 물이 넘실대는 갯벌을 바라보며 나붓이 엎드렸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부처님 고맙습니다.

2015. 10. 21 <사천만 갯벌과 매향비를 둘러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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