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 이름을 '아득'이라 지어볼까도 했다. 아득하다, 아득하게, 아득해서 가르는 것 없고 불거지는 일 없어 차라리 투명한 말. 그것은 은근히 '아주 멀'고 '까마득'해서 함부로 가 닿을 수 없는 말. 그래서 이름처럼 겸손하게 아니 가장 정확하게 이 세상을 살 수 있을 것만 같은 말. 어떠한 방식으로든 다 밝혀낼 수도 제대로 알 수도 없을 이 세계에 대해 섣불리 말함으로써 달아나버리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그저 온몸으로 절실하게 느끼는 것으로 끝까지 붙들고 살아갈 지혜를 선물받기를. 나는 아이가 그렇게 생생한 살결이 세상을 더듬는 정직함으로 살아가기를 바랐던 것이다. 두 돌이 다 되어가는 아이의 이름에 얽힌 기억을 새삼 떠올리게 된 것은 최근 부산경남 지역의 한 중견 시인의 신작시를 접하면서였다.

하늘을 흠뻑 적시고 그녀는 창백한 얼굴로 흐르는 중입니다// 깊게 때로는 아주 가까운 곳에서 고요한 바다였을 때 지느러미 펄럭이듯 그 속에서 시간은 부재중을 알리고 오늘을 끌고 어느 쪽으로 갔는지 도무지 알 수 없는 까마득한 날들은 아직도 어느 곳에서 헤매고 다니는지 내 앞에서 서성이다 철퍼덕거리는 어둠은 아무도 없는 아주 먼 거리까지 덮어가고 있습니다 길은 까마득하게 멀어져 갔는데 아직 그 자리를 맴도는 내 기억들은 수천수만 개의 동그라미로 일렁이고 있습니다// 수직으로만 내리는 빗줄기, 한 가닥으로 달렸을 그녀의 거리는 멀어져 갔습니다 - 황길엽 '아주 먼, 혹은 까마득한'

마침표, 쉼표 하나 없이 숨 가쁘게 써내려간 이 시의 절실함도 바로 그렇게 '아주 멀'고 '혹은 까마득'한 그곳의 소실점에 닿아있는 듯했다. 여기서 '수천수만 개의 동그라미'의 '기억들'은 바다로 수렴되지 못하고 낙오된 물거품을 형상화한 것이다. 물거품이란 바다라는 본연의 사건이 아니라 그것의 흔적이다. 그것은 밀려들고 쓸려나간 바다에 미처 말하지 못한 인어공주의, 그 벙어리 냉가슴의 언어이다. 임의 귀에 가닿지 못한 사랑의 고백이다. 끝내 차디찬 바다에 빼앗긴 자식을 부르는 어미의 시커먼 통곡이다. 그것은 이별 못한 이별. 엊그제 세월호 선장이 대법원 판결 결과로 무기징역형을 확정 받았다는 뉴스가 먼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던 건 마침 이 시를 여러 차례 외는 동안 세월호 희생자들의 상처가 계속 나를 붙들고는 놓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아이 이름은 '둥'이 되었다. '둥'하는 소리, 그 은은한 종소리처럼 혹은 그 커다란 북소리처럼 울림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 할아버지의 마음이 오롯이 담긴 이름이다. 더불어 나는 '둥'하는 그 소리처럼 세상의 아픔에 온몸으로 함께 울어줄 수 있는 이가 되기를 간절히 염원한다. 물론 그리하여 결국 닿을 수 있는 그 곳이란 영원히 아득한, '아주 멀'고 '혹은 까마득'하기만 한 것일지라도 말이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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