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어머니는 아들과 따로 밥상을 차리셨어요. 남편은 혼자 독상을 받았고 저와 시어머니는 부엌 한켠에서 밥을 먹었죠. 어린 시절 친정엄마와 함께 한자리에서 밥 먹던 저에겐 충격이었죠. 태어나 27년 만에 가부장적 생활이 무엇인지 알게 된 거예요."

이번호에서 박민국 기자가 인터뷰한 시민운동가 이경희 대표의 이야기입니다. 아마도 우리나라 가정에서 60~70년대를 지낸 사람들이라면 대개 비슷한 모습으로 식사를 했을 겁니다. 저희 집도 그랬으니까요.

장남인 저는 아버지와 겸상을 받았고, 누나와 여동생들은 둥근 도레상에서 따로 밥을 먹었습니다. 오래된 기억이지만 계란이나 생선 등 귀한 반찬은 아버지와 제가 받은 겸상에 놓였습니다. 어머니는 정지(부엌)와 연결된 샛문을 오가며 음식을 날랐고, 부뚜막에서 대충 때우거나 도레상 귀퉁이에서 남보다 늦은 밥을 먹기도 했죠.

저는 그게 당연한 일인 줄 알았습니다. 어머니가 바래(갯벌과 갯바위에서 해산물을 캐는 일) 가서 캐온 백합조개나 피조개 등은 당연히 아버지와 제 몫이었고, 심지어 감나무에서 떨어진 홍시도 제 몫이었습니다.

그게 잘못된 일이라는 걸 알게 된 것은 대학에 진학하고 난 이후였습니다. 우연히 읽은 성평등 관련 글 한 편, 여성학 관련 책 한 권이 20년 넘게 제 의식을 지배해왔던 남성우월주의와 가부장적 사고에 균열을 줬던 것이죠.

저의 경우와는 반대로 이경희 대표는 민주적 가정에서 자랐는데, 결혼 후 시집살이에서 겪은 가부장적인 집안 환경이 자신의 문제를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것이 여성운동과 인권운동으로 이어졌다는 거죠. 이렇듯 순서는 어찌 되었든 잘못된 것은 결국 바로잡히게 됩니다.

잘못된 역사 교육도 마찬가지입니다. 저희 세대가 다 그렇듯 국가에서 일방적으로 주입하는 역사관과 국가관 교육을 받고 자랐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국정교과서에서 배우지 못한 새로운 역사의 진실을 한두 개만 접해도 그전까지 배웠던 모든 역사는 거짓이 되고 맙니다. 아이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일방적으로 가르치는 역사교육은 그만큼 토대가 허약할 수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현 정부가 왜 이런 무모한 일을 밀어붙이는지 참 딱한 노릇입니다.

그럼에도 딱하다고만 하고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건 이대로 가다간 국민들도 서서히 독재와 불의에 익숙해지고 길들여져 간다는 사실입니다. 당장 저부터 마음속에 점점 기대를 포기해가는 모습이 보입니다. 그래서 이번 '역사에서 만난 사람' 코너에 소개되는 세계에서 가장 터무니없는 독재자였던 아이티의 뒤발리에 부자(父子) 이야기는 한심함을 넘어 두려움으로 다가옵니다.

이번호에는 이경희 대표처럼 권위주의 정권에 저항하다 역경의 인생을 살아온 이상익 새길동산 원장의 삶도 소개됩니다. 그는 최근 자신의 사유집 <이상익의 시적 사유>를 저희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이 책에 대해서도 독자 여러분의 관심 부탁드립니다.

향우로 소개되는 김범준 부산광역시청 서울본부장은 비록 경남 출신의 부산 공무원이지만, 그의 '무능한 중앙정부, 무력한 지방정부'에 대한 지적은 귀담아들을 만합니다. 그는 지금의 중앙집권체제의 문제점을 이렇게 진단합니다.

"과거 60∼70년대 산업화 과정에서 경제규모가 작고 국민 생활이 단순했던 당시 중앙집중 시스템은 고도성장을 달성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하지만 경제규모가 성장했고 민간의 수준과 효율성이 공공부문을 압도하는 지금에는 과거와 같은 효율성을 담보하지 못하고 있다. 더군다나 전방위적인 정보화 시대에 중앙에서 일괄적으로 지시하고 관리, 통제하는 방식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다."

그래서 그는 "지역이 잘할 수 있는 일은 지방정부에 맡기고 중앙정부는 외교와 국방, 보건과 안전 등 중대한 국가사무에 집중하도록 시스템을 바꿔야 한다"라고 주장합니다. 그런 시스템이 작동했더라면 세월호 사건이나 메르스 사태의 결과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는 것입니다.

이번호부터 시인이자 조선소 노동자인 박보근 씨가 쓰는 '700리 갯길따라 걷는 거제 섬이야기'가 연재됩니다. 권영란 기자의 '남강 오백리' 연재가 끝난 후 우리 지역을 깊이 들여다보는 기획이 아쉬웠는데, 박보근 씨의 감칠맛 나는 필치와 따뜻한 시선을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책임 김주완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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