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불과 십여년 전만 해도 나는 ‘디지털’이라면 바늘시계가 아닌 전자시계를 만드는 값싼 기술쯤으로 생각했다. 디스크에 먼지가 잔뜩 묻어 있어도 잡음 하나 들리지 않는 디지털 CD음반이 등장했을 때만 해도, 그저 하나의 기술 진보 정도로 여겼다. 디지털로 재생된 음질이 너무 깨끗하고 생생해 적지 않은 사람들이 되레 거부감을 나타냈고, 그래서 아날로그를 대변하는 진공관 앰프와 LP판의 잡음이 오히려 ‘인간적’이라며 향수에 젖곤 했었다.
2. 남편이 어시장을 거닐다가 집에 전화를 걸어 휴대전화 모니터로 생선상태를 보여주고, 아내는 냉장고 모니터로 생선 상태를 점검한 뒤 정확하게 몇 번째 생선을 고르라고 지시한다. ‘돼지털’로 유명한 CF의 한 장면. 처음 그 장면을 볼 때만 해도 ‘허풍’쯤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불과 2~3년 뒤면 그런 장면이 보편적인 일상이 될 거란다. 제품은 이미 개발됐고, 상용화의 문제만 남았단다. 만화같은 세상이 곧 눈앞에 펼쳐지려나 보다.
3. 디지털 덕분에 예술도 변하고 있다. 과거, 아니 지금도 소설가나 시인이 되려면 ‘등단’이라는 과정을 거쳐야 하지만, 최근엔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는 이야깃거리만 있다면 굳이 그것을 통하지 않아도 베스트셀러 작가 대접을 받을 수 있게 됐다. 바로 인터넷을 중심으로 확산되면서 오프라인에서까지 맹위를 떨치고 있는 팬터지문학이 그 주인공이다. 초창기에는 예술성을 논할 가치가 없다며 홀대를 받기도 했지만, 요즘은 대놓고 폄하하는 목소리를 좀체 들을 수 없다.
4. ‘대중’이 해체되고 있다. 같은 책을 읽고, 같은 드라마를 보고, 같은 음악을 들어 어느새 비슷한 군상을 형성했던 대중은 디지털의 양방향성을 통해 제 갈 길을 찾으면서 자기 색깔을 찾기 시작한다. 더 이상 어떤 전형을 닮기보다는 자기와 비슷한 끼리와 모이려고 한다. 좋게 말해 민주화가 진전된다고 할까. 전자민주주의를 통해 근대 사회가 도달할 수 없었던 ‘직접민주주의’가 하나의 현실로 다가오고 있다.
5. 요컨대 디지털은 궁극적으로 ‘My Life’를 강화시킬 것 같다. 그러나 전체 사회는 더 이상 발전하지 않을 것이라는 어두운 전망도 나오고 있다. 민주주의가 이상적으로 정착될수록 조직화된 이익단체들간 경쟁은 더욱 치열해져 문제 해결 자체가 매우 어려워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버드대 교수를 지낸 히시먼(Hischman)은 <과거에 대한 저항>이라는 책을 통해 민주주의 체제에서 ‘개혁 실행’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입증한 바 있다. 디지털이 만들어놓을 세상이 결코 녹록치 않을 것임을 예고하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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