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남 이야기탐방대] (6) 담정 김려와 진동 앞바다

우리나라 최초 어보(魚譜 물고기족보)는 창원 마산합포구 진동 앞바다에서 태어났다. 다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이 흑산도 귀양살이하며 쓴 <자산어보>(1814년)보다 11년 앞선 1803년에 완성된 <우해이어보>가 그것이다.

'우해(牛海)'는 진동 앞바다를 뜻한다. 진동 일대 옛 이름이 '우산(牛山)'이다. 고려시대 지명 '우산'은 조선시대 '진해(鎭海)'로 바뀌었다. 진동에 남은 옛 관청 건물을 '진해현 관아'라 하는 까닭이다.

진해는 그 뒤 다시 바뀌었다. 러·일전쟁에서 이긴 일제가 웅천에 해군기지를 만들면서 1908년 '진해(바다를 제압한다)'로 삼았다. 원래 진해는 폐지됐고 땅은 창원에 붙여졌다.

◇영혼이 자유로웠던 김려 = 이야기탐방대의 관심이 <우해이어보>의 창작 연대나 진해 지명의 변천에 있지는 않았다. 담정 김려의 사람됨과 진동 바닷가 귀양살이, 당시 사람들의 삶에 관심이 더 가 있었다.

그래도 진해현 관아는 한 번 둘러봐야 하는 법. 11월 1일 오전 진동면사무소 앞에 모인 일행 여덟은 들머리서부터 선정비와 동헌(화류헌 化流軒), 형방소(요즘 경찰서)·마방(주차장)·사령청(아전 대기실) 등을 살펴보며 1700~1800년대 모습을 떠올려 봤다.

진해현 관아 동헌(고유 명칭은 화류헌化流軒)에 들른 탐방대.
진해현 관아 들머리 비석거리에서 선정비에 대해 알아보고 있다.

김려는 서른두 살 되던 1797년 귀양살이를 시작했다. 천주교 신자 관련 혐의를 받고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됐다.

<자산어보> 정약전도 유배(1801) 죄명이 천주교 관련 혐의였다. 무겁고 가벼운 차이는 있어도 당시 천주교는 무조건 범죄였다. '하느님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 했으니 조선의 양반계급사회와 어긋났다. 또 정치다툼에서 상대방을 치기 위해 악용된 측면도 있었다.

1801년 유배지가 진동으로 옮겨졌다. 김려의 부령 귀양살이는 남달랐다. 부령 고을 원님에게 밉보였던 모양이다. 갖은 설움과 압박을 견뎌야 했고 자기가 쓴 글에 수령이 시비를 거는 바람에 필화(筆禍)가 일기도 했다. 귀양을 조금이나마 편하게 살려면 좋은 수령을 만나야만 했다.

가난하고 천대받는 이들-노비, 농민, 관기-과는 잘 지냈다. 부령에서 지역 유지 자제들을 가르칠 때는 서울 권문세족의 자제들보다 더 뛰어난 재목이라 했다. 노비·농민 일반 백성도 양반과 평등하다 했으며 여자도 남자와 동등하다 여겼다. 심지어 양반집 아들이 백정집 딸에게 청혼하는 작품까지 남겼다. 양반·계급이라는 틀에 자기를 가두지 않은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진동 바닷가 귀양살이 모습 = 진동 바닷가를 찾은 11월 1일은 무척 쌀쌀했다. 보통 때면 화류헌 대청마루에 앉아 얘기를 나눴겠지만 이 날은 카페 따뜻한 공간을 찾아들었다. 다들 입술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바닷가라서 옷을 따뜻하게 입고 왔는데도 그랬다. 이어서 광암 바닷가 밥집에서 생선매운탕 점심으로 속을 데우고는 고재바위(진전면 율티리 42-3)를 향해 나섰다.

고재바위는 <우해이어보>에 고저암으로 나온다. 김려는 <우해이어보>의 '우산잡곡(牛山雜曲)'에서 이런 한시를 남겼다. "푸른 단풍잎 붉어짐에 이슬 맺혀 짙어지니/ 고저암 어귀 물에 비쳐 아롱지네/ 지는 해 물결을 비출 때 고기들이 잘 무니/ 고운 낚시대 던져 감성돔 낚네." 과연 김려는 여기서 낚시질을 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주인집에 작은 고기배가 있고 열한두 살 아이가 있는데 몇 글자 아는 정도였다. 아침마다 종다래끼와 낚시대를 들고 아이에게는 차와 끓이는 도구를 들려 배를 타고 거칠고 세찬 물결을 헤쳤다. 가까이는 3·5·7리, 멀리로는 수십리나 백리를 나가 자고 올 때도 있었다."

당시 진해현감이 앞서 유배됐던 부령 원님보다는 나았던 모양이다. 이처럼 움직일 수 있었다면 비교적 자유로웠다 할 수 있다. 또 주어진 현실을 괴로워하기보다는 최대한 즐겁게 지내려는 마음씀도 읽힌다. "여태 못 들은 것을 듣고 못 본 것을 보는 데서 즐거움을 찾을 뿐이었다."

보통 귀양살이를 하면 동냥질을 하거나 농사를 짓거나 품을 팔거나 아이들을 가르쳐서 먹을거리·입을거리·잠자리를 마련해야 했다. 물론 김려는 당대 노론 집안 명문 출신이었기에 본가 지원을 받을 수 있었을 테고 그토록 고달픔을 겪지는 않았을 것이다.

고저암(오른쪽에 보이는 바위)을 바라보며 담정 김려 귀양살이 모습을 머리로 그려보는 이야기탐방대.

그러나 외로움은 어찌할 수 없었다. 배를 타고 바다로 나가고 <우해이어보>를 짓고 고저암에 낚시대를 걸어맨 까닭도 어쩌면 외로움을 달래고 삭히는 데 있었다. 김려는 진동에서 일반 백성들과 거리낌 없이 어울렸던 것 같은데, 명문 양반 출신이라는 점에서 보자면 커다란 변신이지만 사는 품으로 봐서는 외로움을 삭히려는 애씀이었다. 찬 바람 몰아치는 고재바위 근처 바닷가에 멈춰서 저 위에서 낚시대를 내려놓고 있는 김려를 얼핏 떠올렸다. 바위에 오도마니 올라앉아 웅크린 모습에서 김려의 심정을 헤아리기는 쉽지 않았다.

◇부두에 남은 험난한 주민 삶 = <우해이어보> '우산잡곡'에는 옛날 진해현 사람들의 삶이 담겨 있다. 고기를 잡거나 배를 타거나 고기를 내다파는 모습이다. 지금 옛 모습을 실감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도 이런 표현은 어떤지? "양도 건장한 아낙 호랑이 못지 않네/ 정어리 가득찬 동이 머리에 이었네/ 무명치마 맨 다리로 저리 바삐 걷는 까닭은/ 저녁 반성장에서 빈 동이로 돌아오고자 함이네."

고기잡이는 훨씬 어려웠다. 난바다서는 목숨을 걸고 큰물결과 맞서야 했다. 가까운 바다나 갯가서도 새벽 아침 밤 저녁 구분없이 때 맞춰 나가 쉴 새 없이 몸을 놀려야 했다. "아침해 밝아…/ 바닷가 벼락 같은 울음소리/…어부들 자주복 잡는 소리", "갯가에서 장정들 쇠스랑질 비오듯 퍼부어대고", "다른 때는 먼 남해로 가지 말게/ 가까운 나루에도 험한 파도 치니까".

이야기탐방대가 마지막 들른 장기마을 선두리 부두(진동면 고현리 673-1)에는 해송과 팽나무가 한 데 엉긴 연리목과 커다랗게 다듬어 세운 남근석이 있다. 앞에는 제사지내는 콘크리트 제단이 튼실하다.

장기리 선두마을 부둣가에서. 남근석과 이야기탐방대 그리고 연리목.

사람들은 자기가 강할 때는 어디에고 비는 법이 없다. 약할 때만 빈다. 무사태평과 만선풍어는 절로 이뤄지지 않는다. 바다는 험악하고 강력했다. 진동 앞바다 갯가 사람들은 이 바다와 맞닥뜨리며 삶을 버팅길 수밖에 없었다. 지금도 그러하듯이 옛날에도 빌고 또 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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