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10) 박종춘 신대양㈜ 대표

불확실한 발음 탓에 말을 더듬어야 했으며, 대학에 가고 싶었지만 가난 때문에 포기해야 했고, 남들처럼 당당히 군대에 가고 싶었어도 어릴 적 다친 눈 탓에 군 면제를 받아야 했던 불운했던 한 남자. 신대양㈜ 박종춘(52) 대표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는 이제 누구보다 당당하게 세상을 살고 있다. 지난 1월 8일에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 48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콤플렉스는 누구에게나 있지만 드러내기가 부담스러운 게 사실이다. 허나 그는 오히려 삶의 원동력이었으며 나눔을 실천한 계기였다고 당당하게 말한다.

◇아픔까지도 그리운 추억 = 박 대표는 올해 우리 나이로 54살이다. 산청군 차황면 황매산 아래 마을에서 4형제의 둘째로 태어났지만 그가 초등학교 3학년이던 때 지금의 창원시 진해구 웅동으로 이사를 오게 된다. 가난 때문이었다.

이사를 온 뒤에도 박 대표 어머니는 시장에 나가 콩국·어묵 노점을 하면서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야만 했다.

48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박종춘 신대양㈜ 대표. /유은상 기자

그 시절 박 대표 어머니는 항상 '없는 집에서 성공하려면 기술을 배워야 한다. 기술이 있어야 천대받지 않는다'는 말을 가훈처럼 들려줬다. 이에 그는 마산공업고등학교 섬유학과로 진학하게 된다. 그러나 박 대표가 졸업할 즈음 석유파동이 발생, 한일합섬을 비롯해 마산에 많은 섬유 공장이 타격을 받고 취업문 역시 좁아졌다.

"당시 취직한 친구는 찾아보기 어려웠어요. 그런데 고압가스 자격증을 따서 취직한 친구가 월급을 많이 받는다고 자랑을 하더라고요. 바로 결정을 하고 학원에 다녔죠."

그는 1년 동안 고압가스 기계기능사, 고압가스 화학기능사, 고압가스 냉동기능사 등 3개 자격증을 따고 가스충전소, 제빙회사 등에서 일을 하면서 기술과 노하우를 배워나갔다. 드디어 1985년 3월 그의 나이 24살에 웅동에 '웅동가스상사'라는 작은 회사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한다.

"가스 배달하는 조그마한 가게라고 보면 되죠. 그런데 운 때가 맞아떨어지니 돈이 그냥 수북수북 모이더라고요. 당시 곤로와 장작에서 가스레인지로 바꾸는 때였고, 웅동 주변이 개발되고 확장하던 시기라 엄청 바빴습니다. 허허."

가스배달업이 대체로 그렇지만 특히 그는 밀려드는 주문에 설과 추석 이틀을 제외하고는 쉬는 날이 없었다. 그렇게 5~6년을 쉼 없이 일하다 보니 건강이 나빠졌고 결국 다시 결심을 한다.

◇위기는 끝이 아닌 새로운 시작 = 1991년 그는 '대양산소공업'이라는 회사를 차리고 공장에서 용접 등에 사용하는 산소, 질소, 아르곤을 공급하게 된다.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마천주물공단이 입주하는 시기여서 시의적절한 판단이라고 생각했지만 사업은 순탄치 않았다.

"적은 자금으로 시작하다 보니 처음 몇 년은 어음 돌아오는 것 막느라 진땀을 흘렸어요. 한번은 내일 두 시까지 돈을 못 구하면 부도가 나는데…. 해 뜨자마자 전화가 빗발치고 전화벨은 송곳이 돼서 가슴을 찌르죠. 시계 초침 가는 소리는 심장을 조여오고…. 두 번 다시 생각하기 싫은 기억입니다. 그러니 목숨 걸고 뛰었죠. 허허. 3~4년을 그렇게 미친 듯이 일하니 조금씩 안정을 찾아가더라고요."

이후 사업은 마천주물공단 확장과 함께 순풍에 돛을 단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IMF 외환위기라는 거대한 파도가 그를 덮쳤다.

박종춘(오른쪽) 대표가 현장을 살펴보고 있다. /유은상 기자

"진해에 폐차장 사업을 추진해서 공사를 하는데 딱 IMF 외환위기가 옵니다. 대양산소공업도 조선업이 타격을 받으면서 매출이 절반 줄었고요. 또 부도 위기가 찾아온 거죠. 도망가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 같았지만 또다시 죽을 둥 살 둥 뛰고 방법을 모색하다 보니 어느 순간 위기가 지나가더라고요."

오뚝이처럼 일어난 그의 사업은 다시 조선경기 활황과 더불어 번창하게 된다. 2007년에는 회사명을 신대양(주)으로 바꾼다. 혼자서 시작했던 사업은 이제 30명의 직원이 함께 힘을 보태고 있으며 지난해 매출 150억 원 규모로 성장했다. 박 대표는 가스공급 사업 외에도 주유소, 골프연습장, 신항만개발주식회사 등을 운영하고 있으며 최근에는 '정일가스텍'이라는 이름으로 신항 내 작업 크레인과 화물 운송차량에 천연가스를 공급하는 사업도 추진하고 있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어디 있나" = 그는 젊은 시절부터 꾸준히 사회봉사활동을 해오고 있다. 도지사표창은 물론 여성가족부장관상, 대통령표창까지 받았다. 메세나 사업에도 매년 2000만 원 이상을 지원하고 있다. 그는 봉사와 나눔의 정신을 기업 운영에도 그대로 반영하려 노력하고 있다.

"유한양행 창업자 유일한 회장을 가장 존경합니다. 기업이 좋은 상품을 값싸게 공급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것으로 역할을 다했다는 시대는 지났어요. 지역과 사회와 유기적인 관계 형성을 통해 사회를 아름답게 변화시킬 수 있는 기업, 세상을 바꾸는 가치에 비중을 두는 사회적 기업이야말로 날로 심화하는 양극화의 간극을 좁히는 대안이죠. 시련도 많았지만 이만큼 일어설 수 있었던 것도 사회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한 일이라 믿기에 작은 기업이고 비록 작은 기여일망정 돈을 버는 것만큼 착한 기업으로 역할을 다하려고 합니다."

지난 1월, 1억 원 약정을 통해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것도 이러한 생각의 연장선상에 있다.

기부를 하고자 결정한 계기에 대해서는 '이 세상에 내 것은 없다. 다만 사용하다 버리고 갈 뿐'이라고 말했다.

"사실 재물도 심지어 형제, 부모, 아내, 자식도 언제 내 곁에서 사라질지 모르는 것이고 또 떠날 땐 아무것도 함께하거나 가져갈 수 없잖아요. 그렇게 마음을 비우고 나누니까 그만큼 내가 행복해지고 또 그만큼 채워지더라고요. 사랑하는 자식들이지만 재산을 대물림할 생각은 추호도 없습니다. 더 많은 사람이 나눔의 행복을 느끼고 더 좋은 세상, 함께 사는 세상 만들기에 동참하고 확산하길 바라는 마음에서 경남사회복지모금회 기부를 결정했어요."

◇언제나 새로운 인생을 꿈꾸며 = 박 대표는 사업이 안정기에 접어들면서 마음속에 접어 두었던 '꿈'을 끄집어 낸다. 배우고자 하는 열망이었다. 그는 2000년 마흔하나의 나이에 대학에 입학하게 된다.

뒤늦은 공부, 하지만 속도만은 늦지 않았다. 박 대표는 창원대를 졸업하고서 경남대 대학원에서 행정학 석사학위를 취득하고 2011년 같은 대학원에서 <공공기관의 내부지배구조가 경영효율에 미치는 영향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회사일을 챙기면서도 불과 10년 만에 박사학위까지 받았다.

그는 남은 인생 역시 새로운 삶에 도전하면서 나눔을 실천하며 채워 나가고 싶다고 했다.

"인생을 80살까지 산다고 보면 30년 사업을 위해 살았거든요. 기업의 평균수명도 30년 정도라 하더군요. 우리 회사가 30주년을 넘겼으니 그다음은 보너스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제2의 인생을 살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사업만 해왔는데 인생에 사업이 전부가 아니잖아요. 저만 잘 먹고 잘 사는 것도 전부가 아니고요. 물론 먹고살려면 지금 재산으로도 충분하죠. 그런데 남들이 저 자식 맨날 빈들빈들 처먹고 놀기만 한다고 손가락질하면 그 삶이 무슨 가치가 있겠어요? 당연히 사회에 도움이 될 일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가진 재산으로 학교를 설립하거나 장학재단을 만드는 것. 또 노인요양원 같은 사회복지사업 등도 될 수 있고요. 아프리카나 오지에 가서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될 수 있고요. 뭔가 새로운 것을 찾고 도전하는 일을 제 인생 제2의 목표로 삼아 변화를 모색하고 있어요. 아직 명확하지는 않지만 계속 고민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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