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이런저런 사는 이야기를 하던 중 친구가 내게 '너는 왜 시간을 때운다고 하니?'라며 안타까운 표정으로 되물은 적이 있다.

아마도 무심결에 주말에 아이들과 시간을 보낸 이야기를 하며 지루한 시간을 때운다는 표현을 쓴 모양이다.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던 터라 친구의 질문에 적이 당황되었다. 늘 일상에 바쁘게 쫓기며 오롯이 나를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고 외치던 나의 입에서 '지루한', '때운다' 는 식의 표현이 나왔으니 이런 아이러니가 있나.

게다가 트리플 A형인 나는 염려와 걱정을 달고 사는지라 설령 휴가가 있다 해도 항상 머릿속의 계획들로 정작 그 시간을 제대로 누리지 못하는 성격이다.

친구의 딱해하는 표정을 보며 나 자신에 대해 많은 것들이 밀려왔다. 주중에는 주말을 계획하고, 주말에는 주중에 해야 할 일을 미리 걱정하거나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쉬워하며 몸은 현재에 있지만 마음은 과거에 머물거나 미래에 대한 생각으로 채워져 있었으니 말이다. 심지어 계획한 일들이 내 맘처럼 잘 실행되지 않으면 시간을 잘 못 보내고 있는 나를 심판대에 올려놓기도 했다. 마치 학용품을 사야 할 돈으로 과자를 사 먹어버린 아이가 엄마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이유도 모르는 긴장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니 지금까지의 나는 과거와 미래만 있었지 현재에 머문 적이 없었다!

햇살 좋은 주말, 아이들을 마산 할머니 댁에 데려다 주고 오는 길이었다. 진영 국도쯤이었을까? 운전대를 잡고 머릿속으로 집에 가서 해야 할 청소와 일거리를 정렬하며 신호가 바뀌기를 지루하게 기다리다 잠시 고개를 돌렸다. 문득 차창 밖으로 감나무의 붉은 감이 눈에 들어왔다. 따사로운 햇살을 듬뿍 받은 반질반질하고 윤기나는 감들이 '지금이 가을이야'라고 외치는 것만 같았다. 주말마다 왕복 두 시간의 운전을 지루하게만 여겼던 내가 처음으로 현재를 감각적으로 느낀 순간이었다. 감나무 옆의 갈대와 붉게 물들어 가는 단풍, 먼 산을 배경으로 펼쳐진 국도와 국도변에 탐스러운 감을 펼쳐 놓은 난장이 한 폭의 그림처럼 각인되었다. 잦은 신호 대기에 밀리는 길이나, 집에 가서 해야 할 산더미 같은 짜증스러운 일들이 가을풍경을 느끼고 있는 내 마음에 자리를 내어 주었다. 이 순간, 바로 현재를 누린다는 표현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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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나는 내가 시간을 지배한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시간이라는 관념에 매여 현재를 온전히 누려 본 적이 없었음을 다시 한 번 인정할 수밖에.

"사람이 무언가를 깨달아 알고 있으면 그것을 마음대로 할 수 있고, 깨달아 알지 못하면 그것이 사람을 마음대로 합니다"라는 어느 신부님의 말씀을 떠올리며 현재를 충만하게 느끼며 살아가기를 다짐해본다. 

/이정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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