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남 이야기 탐방대] (5)함양에 남은 김종직의 면모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사림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어진다. 사림파의 시작이고 으뜸이라는 뜻이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를 하면서 많은 자취를 남겼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으로 조세로 말미암은 고통을 줄이려 했으며 자기 소신과 맞지 않는 기우제도 '백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냈다.

김종직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은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 조광조 등등으로 대표되는 1500년대 사림파의 스승이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이다. 김종직 이후 형성된 사림파는 훈구파와 맞섰다.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등에 공훈이 있는, 그래서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기득권층과 대립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옳음'밖에는 무기가 없었다. 그러나 훈구파로 둘러싸인 가운데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김종직에게는 '옳음'만 무기인 것은 아니었다. 어쩌면 '타협' 또는 '영합'이 더 큰 무기였다. 어쨌든 (중앙 정계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

◇ 관영 차밭과 용유담 = 관영 차밭 조성터는 함양 휴천면 동호마을 들머리에 있다. 동호마을은 옛적 큰 절 엄천사가 있었던 자리다. 김종직은 공물 부담을 크게 줄이는 성과를 냈다. 당시 공물을 조정에서는 대체로 해당 지역 토산물로 바치도록 했지만 함양에 대해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내도록 했다. 함양 백성들은 차가 나는 이웃 고을을 찾아가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받아와 바쳤다.

김종직은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차씨앗을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뚜렷하게 나오는데 함양에서 차를 재배하지 않았다니 이상했다. 함양은 다(咸) 볕(陽)이 아니던가. 지역 유지들과 논의해 대책을 세웠다. 그것은 민영이 아닌 관영(官營) 차밭 조성이었다. 그 자리가 엄천사 북쪽 대나무밭 아래였다. 지금 관영 차밭 조성터는 옛날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도로 건너편 정자(淸風亭) 옆에 있다. 김종직은 이를 두고 지은 한시 두 수에서는 백성 고통을 덜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의지가 뚜렷이 나타난다.

관영 차밭 조성터

일행은 청풍정 아래서 볕을 가리며 얘기를 주고받았다. 원래 조성됐던 차밭 자리를 가늠해 보기도 했고 정자 축대 석재들에서 옛적 엄천사 자취도 찾았다.

이어 김종직이 백성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냈다는 용유담으로 갔다. 용유담은 지리산 골짝물이 흘러내리는 바위가 크고 매끈하고 시원스러우며 아름답다. 말 그대로 용(龍)이 노니는(遊) 여울(潭)이다. 유교는 현실주의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가 공자 이래 불문율인 까닭이다. 김종직 또한 그에 철저했지만 백성을 위해서라면 소신도 스스로 접었다. 가뭄이 오래가자 백성들은 고을 수령한테 기우제를 지내달라 요청했다. 실은 기우제가 비를 내리게 하지는 않는다. 김종직 또한 기우제가 효과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꺼이 제상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 빌었다. 그 자리가 용유담이었다. 용은 상상과 전설 속에서 물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신물(神物)이었기에.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용유담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다. 일행 한 명이 말했다. "조용하네요. 기운이 좋아요. 제대로 빌면 하늘에서 비를 내려줄 만하겠네요."

기우제를 지낸 용유담

◇학사루와 이은대 = 학사루는 객사에 딸린 누각이다. 객사는 임금 궐패를 모셔 놓는, 그래서 고을 으뜸 건물이다. 김종직에게는 그이가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굳혀준 공간이다. 이른바 '유자광 현판 사건'은 1471년 일어났다. 당시 유자광은 관찰사(지금 도지사) 신분으로 함양 수동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는 길이었다. 함양 읍내를 둘러보고 학사루에 올라 한시를 한 편 지어 현판으로 내걸었다. 뒤에 이를 보고받은 김종직은 그 현판을 떼어내 불태워 버렸다. '유자광이 어떤 사람인데 감히 거기에다 현판을 건단 말이냐!' 참으로 강직하다.(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고 이는 나중에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하는 무오사화의 씨앗이 됐다고 알려져 있다.)

유자광(1439~1512)은 서자 출신이었다. 아첨과 뇌물로 출세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다. 김종직으로서는 함께하기를 꺼릴 만한 존재였다. 그래도 유자광은 군수인 자기보다 한층 높은 관찰사였다. 그런 유자광이 함양을 찾았으니 어지간하면 나아가 맞이하겠건만 김종직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다. '산골로 민정(民情)을 살피러 나갔다'는 핑계를 대고 숨었다. 김종직이 숨은 데가 이은대(吏隱臺)다. 이(吏)는 벼슬아치=김종직이고 은(隱)은 숨는다는 말이다. 학사루 유자광 현판을 떼어낸 그 기세에 견주면 조금은 옹졸해 보이기도 한다.

이은대는 학사루에서 위천을 건너면 나온다. 함양 읍내가 한눈에 장악되는 언덕배기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지금은 현충탑이 우뚝하다. 함양 백성들은 김종직이 떠나자 여기 생사당(=이은당)을 세웠다. 산 사람을 기리는 사당은 드물다. 함양에서 베푼 김종직의 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된다. 생사당은 훗날 유자광 세력에게 철거됐다고 한다. 이런 내력을 안고 이은대는 이름만 남은 채 흐르는 위천과 멀리 상림숲을 굽어보고 있다.

학사루에 오른 탐방대

◇학사루 느티나무 = 함양초교 교정 학사루 느티나무는 김종직 개인의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이 엉겨 있는 자취다. 1474년 봄에 다섯 살 셋째 막내아들을 잃고 그 슬픔 속에서 심은 나무라 한다. 막내는 아명(兒名)이 목아(木兒)였다. 나무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목아라 했을까. 그렇게 심긴 학사루 느티나무는 이제 500년 넘는 세월을 견디며 아름드리로 높다랗게 자랐다. 김종직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이름이 높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운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외동딸이 죽었고 가을에는 장남마저 세상을 버렸다. 게다가 일곱 해 뒤(1481년)에는 둘째아들과 그 둘째가 낳은 손자까지 잃고 말았다. 그야말로 천지가 끝없이 아득한(天地極茫茫·막내를 잃고 쓴 한시에 나오는 표현) 지경이었겠다.

어쨌거나, 그렇다면 김종직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다고 해야 적당할까? 성품이 강직한 사림의 조종? 처신이 옹졸한 양반 관료? 백성을 대단하게 위했던 고을 수령? 자식 넷을 모두 앞세운 불운한 아버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는 그냥 한 단면이지 않을까? 전체를 더한 위에 시대 상황까지 얹어야 김종직의 원래 본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만 있자, 그이의 시대는 세조 왕위 찬탈로 조성된, 지금으로 치자면 박정희·전두환 치하와 같은 상황이지 않았나?

학사루 느티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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