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누리당 언어와 프레임에 말리면 패배…자유발행제 장점, 저항의 역사로 맞서야

온 나라가 국정교과서 파문으로 들끓고 있다. 연초까지만 해도 세인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세월호, 4대강, 방산비리, 연금개혁 등은 어느새 까마득한 옛날 얘기처럼 돼버렸다. 심지어 현재 진행 중인 정기국회나 현 정권의 소위 '4대 개혁'조차도 교과서 파동으로 모두 떠내려 가버렸다. 남녀, 세대와 계층, 지역을 망라하여 대한민국이 송두리째 매몰된 형국이다. 가히 쓰나미, 블랙홀이라 할만하다.

역사교과서 국정화가 이처럼 큰 파문을 낳은 까닭은 무엇일까? 이는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자극적인 두 용어, 즉 '친일'과 '빨갱이'(좌파)가 뒤얽힌 탓이리라.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역사적 평가가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승만과 박정희까지 보태진 때문일 것이다. 소위 보수진영은 대체로 현 정권의 편에 서서 국정교과서를 찬성하는 편이다. 그 반대 진영은 국정교과서의 폐해와 현 정권의 의도를 내세우며 '절대 반대'를 외치고 있다. 10여 년 전, 인지언어학의 창시자 조지 레이코프가 <코끼리는 생각하지 마>를 출간한 이후 '프레임'이 대중적 화두로 떠올랐다. 책 제목은 레이코프가 버클리 대학에서 '인지과학 입문' 강의를 할 때 학생들에게 내준 과제인데 이를 성공적으로 마친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한다. 즉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는데 코끼리를 생각하지 않은 학생은 아무도 없었다는 얘기다. 작금 국정교과서가 꼭 그 짝이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에서 국정교과서 얘기를 꺼낸 이후 정치권은 물론 나라 전체가 국정교과서 프레임에 갇혀버렸다.

연세대 사학과 교수들의 집필거부 선언을 시작으로 전국 각지에서 교수와 교사들이 잇따라 이에 동참했다. 지난 23일 경남·부산·울산 지역 역사전공 교수 88명도 집필거부에 동참했다. 그 수가 가히 수백을 넘어 수천에 이를 정도다. 그러자 며칠 전에는 뉴라이트 성향의 교수들이 집필 참여를 선언했다. 집필 참여나, 집필 거부냐는 둘째문제다. 결론은 이들 모두가 국정교과서 프레임에 갇혀 있다는 점이다. 국정교과서 반대 진영에서 새누리당의 언어와 그들의 프레임을 사용하여 그들의 주장에 대항한다면, 그들의 프레임만 더욱 굳게 다져 주게 되고 결국은 패배하게 될 것이다.

'친일 프레임'도 같은 선상에서 얘기할 수 있겠다. 이완용은 매국노요, 이광수는 친일문인이라는 사실은 교과서에도 나온다. 박정희가 일제 때 만주군 장교를 지냈다는 사실은 교과서에는 없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큰 서점에 가보면 박정희 책만도 수십 종이다. 기본적으로 '진실'이 중요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진실'만으로 가치판단이나 정치적 선택을 하진 않는다는 점이다. 박정희의 친일을 강조하다보면 반대편에서는 경제개발을 들고 나올 텐데 이렇게 되면 국민정서상 싸움이 불리해질 공산이 크다.

'좌편향' 논란도 매한가지다. 보수진영은 기존의 역사교과서가 좌편향이어서 이제 제대로 된 '올바른' 국정교과서를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는 "대한민국 국사학자 90%가 좌파"라며 역사전쟁을 선포했다. 이에 대해 국정교과서 반대론자들이 현 역사 교과서가 좌편향이 아니라는 근거를 들이대며 시시콜콜 해명해봐야 별 소용없는 일이다. 이보다는 차라리 뉴라이트에서 만든 '교학사 교과서'의 채택률이 "0%"라는 현실과 그 까닭을 설명해 주는 것이 현명한 대응책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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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바람직한 방법은 국정교과서 프레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최근 들어 국민 여론은 '국정교과서 반대' 쪽으로 기울고 있는데 이는 국민들도 국정교과서의 폐해와 현 정권의 숨은 의도를 알고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검인정이나 자유발행제의 장점을 얘기해야 한다. 이승만 독재보다는 4·19혁명이 일어난 배경을, 박정희의 친일보다는 유신독재와 10·26사건을 언급하는 편이 낫다고 본다. 여기에다 무시와 무관심 전략도 생각해볼 일이다.

자꾸 해명하려 들면 지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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