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 군중 속에서 생각한 직업의 의미…생계수단이더라도 가치 찾아야 '일류'

법원에 볼일이 있어 들렀다가 시간이 남아 법정 구경을 하게 되었다. 빚을 갚지 못한 사람들이 소유 재산을 신고하는 곳이었는데 대부분 처음 겪는 일인 듯 당황해하고 낯빛이 어두웠다.

대여섯 사람씩 호명하여 불러낸 뒤 제출한 서류가 사실과 맞는지 확인하고 더 추가할 내용이 있는지 물어보고 돌려보내는 식으로 진행하였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불려나왔을 때 신원 확인을 위해 판사가 무미건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김○○씨, 맞습니까?" "네." "직업은?" 우물쭈물 하던 남자가 짜증 묻은 질문이 다시 날아오자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인력에서 집짓는 막일 합니더." "구체적으로!" "데모도(보조공) 개잡부 입니더." 다음 건장한 사내를 불렀다. "이○○씨, 직업은?" "어장하다 실패하고 지금은 남의 고데구리배(소형기선저인망) 탑니더." "구체적으로요." "어탐도 보고 조타도 잡고 그물도 내리고 다 합니더. 고데구리 뱃일은 내 따라올 사람 없십니더." 다음 곱게 화장한 중년 여인. "박○○씨, 직업은요?" "작가입니다." 눈 내리깔고 목소리도 착 깔았다. "작가? 구체적으로요." "시인입니다." 판사가 호기심 섞인 눈으로 내려다보며 빈정거리는 투로 한 마디 툭 던졌다. "시를 써서 밥벌이를 하신다…."

세 사람의 대답을 들으며 직업을 생각해본다. 두어줄 써놓은 원고지 위에 밤새 붓방아만 찧으며 머리 뜯어본 입장에서 서글프지만 그 여류 시인에게 판사가 내뱉은 말이 이해가 간다. 그러면 생계를 위하여 멀쩡한 직업을 가지고 있는 건설 일용직 보조공과 소형기선저인망 어선의 선원은 왜 초라하고 당당해 보였을까?

오랜만에 만나는 친구나 친지들에게 안부를 묻는다. "하는 일 재미있냐?" 되돌아오는 대답들 대부분이 못 죽어 한다거나 배운 게 도둑질이란다.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형님에게 물으면 접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단다. 공부 잘 해서 변호사 개업한 친구는 나 먹고 살자고 허구한 날 상대방 깎아내리는 게 사람 할 짓이냐 한다. 사장 소리 듣는 선배는 사는 게 전쟁이라며 벗어나고 싶단다. 제 밥벌이 하는 일들이 이리도 징글징글해서야 무슨 일들이 제대로 되겠나. 그러니 누가 뭐 하시냐고 물어도 선생질 한다 그러고 주둥이로 먹고 살고 아랫돌 빼서 윗돌 괴는 짓거리라 그런다.

조선소 노동자로 일하면서 내 직업을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게 해준 스승이 한 분 있다. 90년대 후반 생계를 위해 막노동을 시작했는데 하루하루가 지옥이었다. 노동 강도는 그럭저럭 버티는데 땀 냄새에 전 흙 묻은 작업복이 초라하고 부끄러웠다. 누가 뭐 하시냐고 물으면 창피해서 제대로 말도 못했다. 그러다 조선소에 들어가 기계 설치와 시운전을 하는 사람의 보조공으로 일하게 되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유압 작동유 파이프가 터져 수리를 하느라 기름을 옴팡 뒤집어쓰고 둘이서 낑낑거리는데 고위 임원들이 현장을 돌다가 우리를 지켜보고 있었다.

그중 제일 높으신 양반 우리 하는 일이 갑갑했던지 가까이 오더니 이렇게 해라 저렇게 잠가라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이 친구 갑자기 일어나더니 기름 젖은 손으로 몽키 스패너를 그이의 손에 턱 쥐여주고는 한 마디 "당신이 해 보소." 눈을 동그랗게 뜬 임원에게 "작업 지시를 내리고 싶으면 임원 자리 내놓고 여기 와서 반장하시라고요. 나는 최고는 아니지만 이 고장 난 기계가 내 손을 거쳐 쌩쌩 다시 돌아가는 맛에 신나게 일하는데 당신이 내 자존심을 건드렸어요. 당신이 이 기계에 대해서 나보다 더 잘 압니까? 아니잖아요. 내가 언제 당신 사무실에 찾아가서 회사 경영 업무에 대해 콩이야 팥이야 한 적 있습니까? 없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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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이후 나의 일솜씨가 부쩍 늘었고 하루해가 언제 지나갔는지도 모르게 후딱후딱 넘어갔다. 제가 하고 싶었던 일을 직업으로 가진 이들이 얼마나 되고 또 그 일이 생계 수단으로 되었을 때 만족하며 사는 이들이 얼마나 되겠나.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직업일지라도 가치를 찾아내면 일맛을 알게 되고 일맛을 알게 되면 일류가 될 수 있다.

직업에는 귀천이 분명히 있다. 그 귀천은 자신이 스스로 만드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도 말한다. '너거 아부지 뭐하시노'에 큰소리 답을 못할 양이면 아부지 벌어온 돈 한 푼도 못쓴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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