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아름다운 나눔] (9) 박실재 한국정밀공업(주) 대표

'우리 인생은 빨리 지나가지만 사랑이 깃든 것은 영원하다. 작은 사랑의 실천이 나눔을 통해 이웃과 나 자신을 행복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한국정밀공업㈜ 박실재(62) 대표. 2013년 12월 박 대표가 1억 원 기부 약정을 통해 경남아너소사이어티 31번째 회원으로 가입하면서 명예의 전당 핸드프린팅판에 새긴 글귀다. 그가 가진 나눔에 대한 생각, 그리고 그의 과거와 현재를 만나봤다.

◇가난했지만 행복했던 어린 시절 = 박 대표는 1952년 남해군 설천면에서 4남 1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농사꾼이었던 아버지는 그가 돌을 갓 지났을 무렵 돌아가셨다. 가족에게 남은 것은 가난이었다.

"그 흔한 고구마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양식이었어요. 논 3마지기가 전 재산이었는데 그러니 어머니의 고된 노동으로 근근이 끼니를 때우며 견딘 거죠."

그나마 나이 차이가 많은 형님이 일찍 객지로 나가 자리를 잡으면서 박 대표 또한 초등학교 3학년 때 큰형님이 있던 부산으로 전학을 가게 된다.

박실재 한국정밀공업(주) 대표. /유은상 기자

"돌아가신 큰형님하고는 나이 차이가 26살 납니다. 형님이 일찍 외지로 나가 작은 공장을 차리고 또 결혼하면서 저도 부산으로 가서 형님 밑에서 초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너무 그리워서 중학교는 남해중학교로 돌아와서 졸업했어요."

어려운 여건 탓에 그는 중학교를 마치고 다시 부산으로 가 작은 기계공업사에 취직하게 된다. 그나마 형님과 가족들 배려로 그는 야간학교에 다니면 주경야독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됐다.

◇맨주먹으로 도전하다 = 고등학교를 졸업한 박 대표는 큰형님의 공장에서 셋째 형님과 함께 일을 했다. 박 대표가 군대를 다녀왔을 때에는 셋째 형님까지 독립해 남성정밀㈜이라는 회사를 설립했고 그는 그곳에서 일을 돕게 된다.

그는 당시 28살에 독립을 하겠다는 꿈을 품었다. 하지만 형님 회사가 급속히 성장하면서 그가 챙겨야 할 일 또한 늘어났고 그 계획은 미뤄지게 된다. 결국 7년이 더 지난 1987년, 그는 부산 삼락동에서 직원 3명과 함께 소규모 공장을 시작하게 된다.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독립할 때 셋째 형님이 '어떻게 도와줄까' 이렇게 물은 적이 있어요. 저는 젊은 혈기에 '돈을 가지고 업을 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다. 제 힘으로 하고 싶다'고 '정말 힘들 때 도와달라'고 이야기했어요. 나름 자신감이 있었죠. 그래서 퇴직금 800만 원에 아파트를 처분하고 월셋집에 들어가면서 한 3000만 원을 만들었고 나머지는 지인의 돈을 빌려서 법인 설립 최소 자금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생각처럼 쉽지가 않더군요."

김해시 상동면에 자리한 본사 공장에서 생산제품을 확인하고 있는 박실재 한국정밀공업(주) 대표. /유은상 기자

◇살만하니까 찾아온 위기 = 그는 새벽에 출근해 밤늦은 시간까지 쉬는 날 없이 일에 매진하면서 조금씩 회사의 틀을 잡아 나갔다. 그리고 설립 3년 만인 1990년에 형님 공장과 가까운 곳인 지금의 상동면 공장으로 확장 이전하게 된다. 그러나 머지않아 생각지도 않은 암초와 마주하게 된다.

"92년인가 그럴 거예요. 제 나이 마흔 살 때니까. 어느 날 길을 가는데 돌부리가 자꾸 왼발에 부딪히더라고요. 병원을 찾았는데 '척수종양'이라고 하더라고요. 복잡한 신경계가 지나는 탓에 수술이 안 되니 그냥 지켜보자고 하는데…."

청천벽력이었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이별을 준비하는 것이었다.

"제 아내 이름이 최보실입니다. 저와 동갑인데 28살에 만나서 연애하다 결혼을 했어요. 17평 아파트에 살았는데 남겨질 가족을 위해서 좀 큰 아파트를 마련했습니다. 사후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보냈던 시기였습니다."

하지만 그는 건재하다. 여전히 후유증으로 걷는 게 약간 불편할 뿐 다행히 종양은 더 자라지 않았다.

◇풍랑을 넘고 넘어 성공으로 = 김해시 상동면에 본사를 둔 한국정밀공업㈜은 냉간단조 전문기업으로 1000여 종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주력제품인 시트프레임과 안전벨트용 단조부품은 품질을 인증받아 현대·기아차, 르노삼성자동차에 납품하고 있다. 이는 ERP(전사적 자원관리), POP(생산 시점 관리) 등 공장자동화 시스템 구축을 통해 철저한 품질 관리와 생산 효율성을 높였기 때문이다.

직원 3명으로 시작한 회사는 28년 만에 직원이 50명으로 늘었고 올해 매출 300억 원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하지만 이 모든 성과는 하루아침에 이뤄진 것이 아니다.

"저희 역시 IMF 외환위기가 가장 힘든 때였습니다. 1999년 새해 시무식을 하고 첫 전화를 받았는데 주거래처가 부도났다는 거예요. 그로부터 한 달 뒤에는 두 번째 거래 업체가 부도가 났고요. 저희도 부도가 눈앞에 다가온 거죠. 그런데 평소 쌓은 신용 덕에 지인들이 선뜻 돈을 빌려주고 또 은행에서도 대출하면서 조금씩 버텼고, 나중에는 둘째 형님이 집을 담보로 대출해 주면서 그렇게 위기를 넘겼습니다."

그렇다. 그는 기술 경쟁력, 고객만족과 더불어 신용을 기업 경영의 최우선 가치로 삼고 있다.

"엔지니어링은 기술력과 전문성이 가장 중요합니다. 타고난 천재가 아니라면 결국 시간은 능력과 비례합니다. 무슨 말인고 하니, 누가 더 오랜 시간 집중해서 일에 열정을 쏟느냐가 관건이라는 거죠. 이게 기술력과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생각하실 텐데. 중소기업의 기술력과 노하우는 시행착오에서 나옵니다. 잘못되면 다시 고쳐서 또 해보고 또 안 되면 다른 부분을 개선해서 또 해보고. 이렇게 수십 번 수백 번 해서 나오는 게 바로 기술력이고 노하우입니다. 여기에다 믿음, 신용이 뒷받침돼야 경쟁 속에서 살아남을 수 있죠."

◇짧은 인생에 영원을 남기는 방법 = 그는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에 대해 평소 가졌던 신념을 실천한 것이라고 했다.

"큰 부자는 아니지만 그동안 조금씩 곳곳에 후원을 해왔어요. 그러던 차에 회사 일도 잘돼 뜻있는 일을 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에 결정을 했어요. 척수종양 이후에 제2의 인생을 살 수 있었던 데 대한 보답일 수도 있고요. 어려운 과정을 수없이 넘기면서 회사를 운영할 수 있었던 데 대한 감사의 뜻일 수도 있고요. 살면서 조금이나마 더불어 살려고 노력한 징표일 수도 있고요. 허허."

잠시 생각을 가다듬던 박 대표는 "주변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고 싶었다"고 기부의 동기를 정리했다.

"남에게 도움을 주고 또 그 도움을 받는 사람이 기뻐하거나 행복해할 때만큼 보람과 만족감을 느낄 때는 없거든요. 그래서 나눔을 실천하려는 것이고, 그런 긍정적인 에너지가 퍼지면 더 좋은 세상이 되겠죠."

그는 가족들을 대상으로 설립한 '학임당 장학회'를 키워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다는 계획도 조심스럽게 꺼냈다.

"어머니 장례를 치르고 남은 돈으로 어머니 은혜를 조금이라도 기리고자 '학임당 장학회'를 만들었는데 8년가량 됐습니다. 그동안은 집안에 커가는 아이들 위주로 장학금을 조금씩 주는 일을 해왔는데 앞으로는 조금 더 범위를 넓히는 쪽으로 형님들과 의견을 나누고 있습니다. 우선 저희 어머니를 기리는 사업이기도 하지만 저희 형제들이 어렵게 자란 탓에 가정 여건이 어려워 공부를 못하는 학생들에게 도움을 주고 싶은 생각도 형님들과 공유하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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