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경남 이야기탐방대] (2) 사천 대곡마을숲과 고려 현종 부자

이야기를 찾아나서는 발길은 언제나 설렌다. 있는 이야기를 찾아내기도 하고 없는 이야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찌뿌둥하던 몸도 금세 개운해지고 가라앉았던 마음도 속절없이 가벼워진다.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는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 탐방대의 첫걸음은 9월 21일 사천으로 향했다. 소나무가 주류여서 느낌이 색다른 마을숲과 고려 여덟 번째 임금 현종 부자의 사연이 서린 고개를 찾는 여정이었다.

◇일제가 대부분을 헐어낸 마을숲 = 대곡(大谷)은 토종말로 풀면 '한실'이 된다. '한'은 크다는 뜻이고 '실'은 골짜기나 고을을 이른다. 골짜기가 크면 물이 넉넉하고 덕분에 들판도 너르다. 사천 정동면 대곡마을도 그렇다.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대곡천은 좀더 큰 사천강에 들기 전에 마을 앞에다 너른 들판을 베풀었다.

대곡마을숲은 남북으로 200m 남짓 된다. 사람들 보살핌을 받는 덕분인지 굵은 줄기들 이리저리 휘어짐이 자유롭다. 일행은 성이 오씨인 동네 주민 한 명을 우연히 만났다. 그이는 예전에는 마을숲이 지금보다 서너 배는 더 길고 두텁게 형성돼 있었다고 했다. 나이가 예순 남짓으로 짐작되는 그이는 어릴 적 어른한테 들었다며 일제 때 국민학교·면사무소·파출소 등을 만들면서 숲을 많이 망쳤다고 했다. 그이도 여기 있는 정동국민학교를 다녔을 것이다.

일제가 이 땅에서 과거를 지우는 전형적인 수법이 바로 이런 관공서 앉히기다. 국민학교·면사무소·파출소는 정신·행정·치안 지배를 위한 최첨병이다. 일제는 식민통치기구를 마을(고을)의 소중하게 여기는 공간에 들이앉혔다. 그런 장소가 품은 기억도 함께 지웠다. 마을숲은 마을사람들한테 쉼터·놀이터·제사터였다. 일제는 공간을 무너뜨리면서 거기 삶들이 품고 있던 사연까지 없애버렸다.

◇나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 일제강점 이전 마을숲을 떠올려보면 이렇다. 마을 뒤편 골짜기를 이루는 산줄기 두 개가 마을을 오른쪽과 왼쪽에서 감싼다. 마을숲은 두 산줄기가 들판과 만나 끝나는 지점 두 곳을 이어주도록 들어서 있다. 산줄기 둘과 마을숲이 이등변삼각형으로 마을을 오붓하게 감싼다. 상상만으로도 느낌이 참 따뜻해진다.

숲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로운 존재다. 여름에는 잎사귀를 통해 물기를 뿜음으로써 더위를 누그러뜨리고 겨울에는 바람을 가림으로써 추위를 막는다. 나무들은 땅 속 깊숙이 박은 뿌리로 물도 머금어준다. 모자라는 부분을 메워주는 비보(裨補) 기능도 있다. 풍수지리를 따르면 대곡마을은 곡식을 까부르는 키 모양으로 앞쪽이 트여 재물이나 기운이 마을에서 빠져나가는 형국이다. 이를 막으려고 마을 앞을 숲으로 크게 감쌌다.

대곡마을숲은 대부분 소나무다. 경남 마을숲은 소나무가 많은 경우가 드물다. 참나무·느티나무·서어나무·회화나무 같은 잎넓은나무로 채워진 데가 다수다. 가장 북쪽 거창 정도에서나 솔숲이 많아진다. 어쨌든 솔숲에 드니 절로 시원해진다. 솔바람까지 살랑거린다.

문득 궁금해진다. 나무들 여기 뿌리내리고 무엇을 보고 들었는지, 비 맞고 바람 흘리면서 무엇을 씻어내고 떠나보냈는지. 나무가 하는 말을 들을 수 있다면 얘기가 풍성할 것 같다. 사람보다 훨씬 더 오래 사니까. 사람처럼 보고 싶은 대로 보고 듣고 싶은 대로 듣는 어리석음은 없으니까.

◇아들 쪽 돌아보며 안타까워했던 고개 = 고자치는 고려 왕족 왕욱이 귀양살러 와 있을 때 아들 왕순(나중 제8대 임금 현종)이 있는 쪽을 돌아봤다는 고개다. 돌아볼 고(顧) 아들 자(子) 고개 치(峙)로 된 한자 지명이다. 오후에는 건점골짜기 배방사터를 먼저 찾고 이어서 고자치와 성황당산성 들머리까지 살펴봤다.

제6대 성종 시절 왕욱은 선대 임금인 경종의 아내 헌정왕후와 정분이 났다. 아들이 없었던 헌정왕후는 경종이 죽은 뒤 궁궐을 떠나 사제에 머물렀고 왕욱은 그 가까이 살았다. 헌정왕후는 왕욱의 아이를 배게 됐고 어찌어찌 들통나는 바람에 왕욱은 선왕의 아내를 범했다는 이유로 사수현 귀룡동(지금 사천 성황당산 화전·우천리 일대)에서 귀양을 살게 됐다.

고려 현종 아버지 왕욱이 귀양살이했던 근처로 알려져 있는 성황당산 들머리 석성에 올라 사진을 찍고 있는 블로거 선비.

헌정왕후는 아이를 낳다가 세상을 떠났고(992년) 성종은 이런 정상이 가여워 두 살 때 아버지 있는 데로 아이를 보냈다. 아버지가 죄인이라 같이 살게 하는 대신 만나려면 산기슭을 에둘러 고개까지 넘어야 하는 배방사라는 절간에서 자라게 했다. 왕욱은 죽을 때까지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살던 집에서 배방사까지를 오갔다. 고자치라는 지명은 이렇게 생겨났다.

왕욱의 이런 행보는 아들에 대한 극진한 사랑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지 싶다. 내일 또 만날 텐데도 돌아오는 고갯마루에서 아들이 안쓰러워 돌아보곤 했으니 말이다. 날마다 아들을 찾은 까닭이 그것뿐이었을까? 당시 왕욱의 아들은 왕위 계승 서열이 두 번째였다. 성종은 아들이 없었고 선왕인 경종만 아들(나중에 제7대 임금 목종) 하나를 남겼을 뿐이었다.

이런 상황에 비춰보면 왕욱의 아들을 찾는 심정이 단순하지는 않았으리라 쉽게 짐작이 된다. 자기는 그냥 이렇게 잘못돼도 아들만은 잘 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굳건했겠다. 왕욱은 아들이 임금이 될 조건을 나름 갖추도록 다방면으로 애썼을 테고 그것은 날마다 만나서 자기 지식·경험·경륜 따위를 온전히 전하려는 것으로도 나타났겠지 싶다.

고자치. 최근 사천시가 이런 형상과 정자를 설치했다.

◇아들 현종을 위해 엎어져 묻힌 왕욱 = 이를 잘 보여주는 전설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사천현'에도 나온다. 대충 추리면 이렇다. "왕욱이 생전에 현종한테 몰래 금(金)을 한 주머니 주며 말했다. '아비가 죽거든 금을 지관(地官)에게 주고 귀룡동에 장사지내되 반드시 엎어 묻도록 해야 한다.' 왕욱은 귀양 도중 사천서 죽었고(996년) 현종은 지관한테 금을 주고 아버지를 엎어서 묻어달라고 했다. 지관은 그런 현종에게 '무엇이 그리 바쁜가'라 말했다. 이듬해 2월 현종은 서울로 돌아갔고 나중에 임금 자리에 올랐다(1009년)."

당시 풍수지리는 죽은 사람을 엎어서 장사지내면(복시반복伏屍反復) 당대에 발복(發福)이 된다고 본 모양이다. 왕욱은 그렇게 엎어져 묻혀 있다가 아들이 임금이 되고나서 8년 뒤 개성으로 모셔진다. 왕욱 묻혀 있던 자리는 배방사터에서 고자실마을 지나 고자치를 넘은 다음 조금 내려가면 왼쪽에 있다. 왕욱과 현종은 이제 한낱 전설로만 떠돌 뿐 그 간절함이나 곡진함 따위는 남아 있지 않다. 1000년 넘는 세월이 지났으니 당연한 노릇이다.

이처럼 이야기 탐방대 구성원들이 경남 각지를 둘러보고 쓴 이야기들은 경남도민일보 인터넷 홈페이지 초기 화면 오른쪽 위에서 세 번째 배너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를 찾아가면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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