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우해이어보] (2) 망둥이

얼마 전 여름에 순천만 갈대밭으로 가족 여행을 갔을 때다. 한여름 뜨거운 열기로 가쁜 숨을 몰아쉬던 오후가 지친 몸을 조금씩 갯벌 위로 내려 놓는 시간, 갈대 사이로 만들어진 길을 따라 가다보면 별스럽게 예쁘지는 않지만 애살스럽고도 예쁜 망둥어(표준어는 '망둥이'), 게, 도요새들이 바쁜 일상을 보내고 있다.

조망대에 서서 가만히 갯벌 풍경을 보다가 문득 가슴을 가로지르는 아픔과 아련함이 망막 위로 뿌옇게 이슬이 되어 뻗어 올랐다. 그 위에 은은하게 번지며 그려지는 내 고향 창원 내동천 주위의 풍경과 일제 때 만든 철로와 그 아래로 넓게 펼쳐져 있던 갈대밭, 게와 망둥어와 물새들이 끊임없이 자취를 남기며 어린 손길을 유혹하던 어릴적 창원 갯벌 풍경이 순천만과 겹치며 떠올랐다.

산다락 밭 그 굽이를 따라 아담하고 봉긋한 여인의 어깨같은 초가집들이 두어 세집씩 이곳저곳에 모여 있었다. 그 앞에 펼쳐진 갈대밭의 갈대는 검고 거친 농부의 땀냄새 나는 손길에 베어져 지붕이 되고 울타리가 되고 문 대신 내려쳐진 발이 되어 사람들은 그 속에 어우러져 갈대밭 바깥의 갈대 속에서 살고 있었다.

어린 아이들은 갈대밭 사이로 헤집고 들어가서 참게도 잡고, 썰물 동안에 웅덩이에서 미처 못 빠져나간 물고기도 잡고, 물새 집에서 새알도 꺼내는 등 온갖 놀이를 하였다. 이러한 갈대밭 바닥에 사람을 피해 팔딱거리며 빠르게 뛰어다니는 물고기가 있었는데 그놈이 바로 망둥어였다. 아이들은 이 망둥어를 물고기로 취급하지도 않았고 먹을 생각도 않았다.

▲ 어린시절 꼬시래기를 잡던 통발 추정도./두류문화연구원

반면 새벽이나 밤이면 물속 모래밭 가에 떼로 줄지어 누워있는 꼬시래기(소래미)는 횟감으로 인기였다. 가만히 다가가 물낮은 모랫바닥에 소쿠리를 들이대면 소래미가 깜짝 놀라며 소쿠리 속으로 몇놈 들어왔다. 대부분의 소래미(꼬시래기)는 그 놀라는 순간 호흡을 잘못하였는지 모래를 입에 물고 있기 마련이다. 통에 넣고 물을 넉넉히 부어주면 이놈들이 잡힌 줄도 모르고 머리를 마주대고 졸고 있다. 그러는 동안 입에 물었던 모래를 뿜어낸다. 그쯤이면 배고픈 아이들은 한 두어 놈을 꺼내어 풀이나 천에 비늘을 썩 문지르고 손으로 배를 따서 그냥 통째로 초장에 찍어 먹으면 그 맛이 일품이다. 나머지는 갈대밭을 뒤져서 마른 갈대를 걷어와 불을 지피고 꼬치를 만들어 구워먹으면 역시 통째로 먹을 수 있다.

어릴 적 나는 물에 누워서 잠자는 소래미와 갈대밭에서 뛰어다니는 망둥어가 전혀 다른 어종인 줄 알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 알고 보니 같은 어종이다.

조선후기에 선비인 김려가 쓴 <우해이어보> 첫머리에 기록된 물고기가 문절어(文節魚)인데 이 문절이가 바로 망둥어이고 꼬시래기다. 문절어라는 이름은 문절이·문절어(순천·고흥·진해), 망둑이(경상지역), 운저리(진도), 고생이(포항·강구), 문저리(통영), 꼬시래기·소래미(부산·마산) 등으로 불리고 있다. 정약전의 <자산어보>에서는 어미를 잡아먹는다 하여 무조어(無祖魚)라 했고, <우해이어보>에서는 문절어, 수교, 해궐이라 하였다. 또한 서유구의 <전어지(佃漁志)>에는 민물에 사는 망둥어의 눈이 망원경 모양과 같다고 해서 망동어(望瞳魚), 뛰며 돌아다니는 물고기라는 뜻으로 탄도어(彈塗魚)라고 기록하였다.

김려는 문절어가 물가에 나란히 누워 머리를 바깥으로 두고 줄을 지어서 잠을 자기 때문에 이것을 잡을 때 긴 장대 끝에 통발 같은 것을 달아 멀찍이서 내려덮쳐서 가두어놓고 손으로 잡는다고 하였다. 쏘가리보다 더 맛있으며 불면증이 있는 사람이 먹으면 좋다고 하였다. 이 물고기가 잘 자는 습성이 있는 것에 기대어 이것을 먹으면 사람도 잠을 잘 잘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고성군 동해면 쪽에서 바라본 진동앞바다. 저 바다가 곧 우해(牛海)다./박태성 두류문화연구원 연구원

창원에서도 바다와 하천이 만나는 봉암만 일대, 진동만 일대, 웅동만 일대는 꼬시래기가 지천으로 살던 곳이다. 그중 마산 봉암은 70년대까지 전국적으로 꼬시래기회가 유명하였다. 강 언덕에서 강 한가운데로 나무다리나 철다리를 놓아 그 끝에 원형으로 집을 지어 만든 봉암 수상 꼬시래기 횟집들은 전국에서 많은 미식가들을 불러 모았다. 그 명성만큼 꼬시래기가 많이 팔렸기 때문에 진동과 진해에서 어부들이 배로 싣고 와서 공급하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봉암에는 꼬시래기를 사고파는 장이 있었다.

횟집은 현재의 봉암다리 건너 적현으로 들어가는 길목에 있었는데 '봉암장', '여사장집', '청학장', '제일옥별장' 등이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도 이곳을 지나가다가 수상횟집이 있는 것을 보고 차를 돌려 들어가 보았다. 사람들이 먹는 꼬시락회가 무엇인지 물어보고 자기도 그것을 시켜 맛나게 먹고 진해에 들를 때면 가끔 찾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고고학자이자 미술가로 이름난 삼불 김원룡 선생도 진해 웅천의 자마산 발굴현장에 왔다가 웅천의 한 허름한 식당에서 꼬시래기를 먹고 평생 기억했다는 일화도 있다. 지금도 꼬시래기 철이 되면 어시장 횟집에서 꼬시래기 회를 맛볼 수 있다. 한여름에서 가을로 접어들 때이니 지금이 그 철이다. 진동 일대에는 지금도 꼬시래기가 잘 잡히는데 아침 일찍 어판장으로 가야 구할 수 있다.

꼬시래기와 관련된 속담은 전라도와 경상도에 많이 분포한다. '꼬시래기 제살 뜯기'(경상도), '망둥어 제 동무 잡아먹는다'(전라도), '망둥어가 뛰니 빗자루도 뛴다'(전라도), '바보도 낚는 망둥어', '망둥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속담에서 꼬시래기는 천한 혹은 정신없는 대상으로 인식된 반면 '날마다 망둥어 날까'라는 속담은 아무리 흔한 것이라도 때에 따라서는 매우 귀하게 쓰임을 말한다. 창원지역에서는 '꼬시래기 제 살 뜯기' 즉 친한 형제나 친구, 혹은 가족 간에 서로 헐뜯어 스스로 상처를 당하는 것에 비유하는 속담이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어느새 순천만에 아름다운 노을이 진다. 이토록 애잔한 저녁 잔영을 느낀 것도, 잃어버린 고향을 그리며 잠시 눈시울을 적실 수 있었던 것도 저 갈대밭과 망둥어, 게에 대한 추억 때문일 것이다. 내 아이들도 지금 창원에서 나고 자랐지만 그토록 아름다운 풍경은 간직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들의 가슴 속에 나의 아름다운 추억을 그대로 전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박태성 두류문화연구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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