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 사 년 만의 외출, 부산국제영화제 영화 관람. 개인 여건으로 많은 영화를 보지는 못했으나 몇몇 주목할 만하거나 개인적 관심사로 챙겨본 영화들에 공통적으로 불거지는 목소리,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건 결국 고통을 견디는 것'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 어쩌면 세상은 훨씬 더 잔인해져버린 건지. 말하자면 더한 강도의 견딤으로 이 세상을 버텨내자는 무언의 약속 같은 것. 그 때문인지 아님 갑자기 차가워진 밤바람 탓인지 나는 자주도 몸을 웅크리곤 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영화들을 보고나면 얼른 집이란 곳으로 차를 돌리곤 했는데, 더욱 오싹해지는 건 차에서 듣는 음악이 한 달째 같은 노래 무한 재생 반복이라는 사실.

"장막을 걷어라, 나의 좁은 눈으로 이 세상을 떠보자, 창문을 열어라" 한대수가 열일곱, 열여덟쯤에 만든 노래라 그런지 순수함이 차라리 서글픔으로 번지는 곡. 이 음악에 도착증(?)이 생긴 건 사실 지난여름의 끝부터다. 팔 월 말, 그날은 유난히 부산스러운 하루였다. 벌여놓은 일을 마치고 집으로 향하는 길 한 신호등 앞, 형광 뉴스판 활자로 맞게 된 그분의 갑작스런 죽음. '총장 간선제 반대 부산대 교수 투신.'

곧 집에 돌아와 남편에게서 그분이 고현철 선생님이라는 것을 듣지 못했다면 얼마간은 먼 유에프오처럼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분의 마지막 말씀처럼 우린 너무 둔해져버린 탓인지. 도무지 세상은 80년대가 아니니까. 먹고사는 절체절명의 문제도 아니니까. 그러나 그 여름의 끝, 단 하나를 위해 모든 걸 버린 한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 불을 끄고 옆에 누운 내게 남편은 그분에 관한 한 일화를 무심히 건넸다. 학생이었을 때인데, 시험 때마다 남편은 그분 과목은 늘 시험을 못 쳐 낭패였더라는 거다. 그리고 그걸 자신도 잘 알고 있어서 좋은 성적도 기대한 바도 전혀 없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분은 남편에게만은 항상 'A+'를 주시더라는 거다. 나중에 세월이 흘러 한 술자리에서 그때 일을 들추어 여쭤보니, 그분 특유의 군말 없이 전해주시는 외마디인즉슨, '내가 네를 쫌 좋아했다'란 말씀. 남편의 마지막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고 말았다. 그리고 한참을 울었던 것 같다. 난 며칠 밤을 불면 속에서 그 문장만 도착적으로 되뇌었다.

일면식도 없었던 내가 그분을 충분히 이해하고도 남음이 있었던 건 바로 '내가 네를 쫌 좋아했다'란 그 한 마디에서 어떤 뜨거운 기운을 느꼈기 때문. 곧 그것이 이 세상을 사랑했던 그분 특유의 방식이었음을 나는 안다. 올해 부산국제영화제의 영화들이 뱉어내는 한숨들처럼, 진정 사랑은 아픈 걸로 느껴지는 것이니까. 뜨거웠던 지난여름 끝, 그날 당신의 새벽별은 그런 식으로 빛났으리라고, 그렇게 당신은 이 세상을 '쫌 좋아했'으리라고, 나는 아직도 무한 재생 반복으로 믿는 중이다. "손에 손을 잡고서 청춘과 유혹의 뒷장 넘기며, 광야는 넓어요, 하늘은 또 푸르러요. 다들 행복의 나라로 갑시다." 노래는 다시 끝 부분, 난 또 반복 버튼을 누를 것이다. 한 달째 같은 여름이 떠나고 있다. 

/서은주(양산 범어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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