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비춤]오치근 일러스트 작가의 귀촌 이야기

넉넉함과 포근함으로 늘 어머니 품 같은 감성을 지닌 하동 악양면 평사리 들판. 그곳을 가로질러 길게 이어진 꼬불꼬불 좁다란 돌담길, 길 옆 추수를 기다리는 감나무 과수원을 지나면 하얀 페인트로 칠한 아담한 그의 집이 눈에 들어온다.

"누추한 곳까지 오셨네요. 너무 바빠서 그동안 정리정돈을 못 하다 보니 집 안팎이 엉망입니다."

집 앞마당을 차지한, 아무렇게 자란 이름 모를 잡초가 민망했는지 그는 연방 머리를 긁적이며 낯간지러워했다. 그의 집은 마을에서 살짝 벗어난 외딴곳에 자리 잡았으나 아름다운 풍경을 지닌 악양을 모두 품은 듯했다.

집 뒤로는 지리산 천왕봉에서 뻗은 줄기가 섬진강을 목전에 두고 멈춘 형제봉이, 옆으로는 지리산의 또 다른 줄기인 구제봉이 버티고 있다.

앞쪽으로는 가을 색으로 갈아입은 황금색 평사리 들판, 섬진강과 모래사장이 시원스럽게 한눈에 들어왔다.

일러스트레이터로 활동하는 오치근(45) 작가와 하동 녹차에 푹 빠져 차 공부를 하는 아내 박나리(37), 은별(12), 은솔(7), 은반(19개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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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근 씨 가족.

오 작가 부부와 세 딸이 이곳 악양에 터를 잡은 지 햇수로 11년째다. 결혼하기 전 자유분방한 서양화가로 활동할 당시까지 포함하면 오 작가는 악양과 15년 넘게 연을 맺어 왔다. 태어나고 자란 고향 남원보다 지금은 가족이 함께하는 이곳 악양이 몸과 마음의 고향이 됐다.

"지인이 '그림책 버스'를 만들어서 전국을 돌아다녔는데, 그림책을 알리고 체험하는 일종의 어린이 문화운동이었습니다. 저보고 해보지 않겠느냐고 권유를 하더군요. 2003년도였으니까 큰딸 은별이가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괜찮을 것 같았고 아내도 흔쾌히 동의해서 셋이서 광주, 제주도, 하동, 진해 등 전국을 돌아다녔죠. 하고 싶은 일이어서 행복하기도 했지만 생활비를 제대로 못 벌다 보니 생활은 어려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전 재산인 신혼집 전세금도 다 날렸죠(웃음). 제 작업도 못하니 이래저래 스트레스가 많았습니다. 때마침 지인이 오라고 해서 무작정 악양으로 왔습니다."

거처도 마련하지 않은 채 5t 트럭에 살림 도구만을 싣고 야반도주하듯 악양으로 왔다. 일주일 후 지인의 소개로 겨우 구한 허름한 빈집은 전기도, 수돗물도 들어오지 않는 외딴 섬에 던져진, 불편하고 두려운 환경이었으나 각박한 도시 삶과 생활고에 지친 그와 가족들에게는 포근한 안식처나 다름없었다.

"주변에 아무것도 없어서 첫날밤을 자는데 너무 무서웠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니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려오고, 쪽창 밖으로 홍매화가 보이는데 너무 예뻤습니다. 무릉도원이 따로 없더군요."

정착 이후 그의 삶과 주변 환경은 180도로 바뀌었다. 그의 손을 거친 새 보금자리가 생겼고, 은솔이와 은반이가 태어나면서 식구도 늘었다.

무엇보다 넉넉하지는 않지만 경제적인 안정과 지리산 자락과 섬진강이라는 자연 속에서 찾은 몸과 마음의 여유는 창작 활동에 전념할 수 있도록 했고, 그렇게 해서 그의 대표작들이 세상 빛을 보게 된다.

북한 출신의 천재 시인으로 불리는 백석의 12편 동화시집 〈집게네 네 형제〉 중 '집게네 네 형제', '개구리 한솥밥', '산골총각', '오징어와 검복'이 그림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그는 나머지 8편도 그림책으로 낼 계획이다. 하동이 품은 자연도 빠질 수 없는 작품의 단골 소재다. 17개월간 맏딸 은별이와 섬진강을 함께 여행하며 펴낸 <섬진강 그림여행>, <지리산 그림여행> 그리고 하동 차 등 우리나라 차 역사와 먹는 방법 등을 그림으로 엮은 <초록비 내리는 여행>이 그것이다. 그의 작품 활동은 단순히 자신만의 영역에 머물지 않고 지역과 지역민을 연결하는 소통의 매개체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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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치근 씨 일러스트 작품 삼성궁 .

귀농·귀촌인과 현지인이 뜻을 모아 만든 악양지역 작은 도서관 '책 보따리'가 그 시작이었고, 그 과정에 생각의 차이로 뜻하지 않은 불협화음이 생겨 마음의 상처를 받기도 했다.

지금은 마을 아이들이나 어린 학생들과 함께 미술 교육과 다양한 놀이 활동으로 또 다른 소통 공간을 만들며 지역과 호흡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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