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네사람]시조시인 김재길

2013년 2월. 강원도 화천 육군 7사단에서 혹한기 훈련을 준비하던 까까머리 청년에게 전화 한 통이 왔다.

"축하합니다. 2013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시조부문에 당선하셨습니다."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생생한 목소리에도 청년은 한참이나 말을 할 수 없었다. 중학생부터 생각해오던 꿈이 갑자기 현실이 돼 버렸다. 기쁨보단 놀라움이 컸고 표현하기 어려운 슬픔이 뒤따랐다. 그 겨울, 청년 김재길(25·경남대학교 4학년) 씨는 시조시인이 됐다.

'한 수당 3장 6구 45자, 종장의 첫 음절은 3음절'이라는 시조의 정통 형식을 지키며 쓴 작품(극야의 새벽)에 심사를 맡은 정수자(58) 시조시인은 이렇게 평했다.

'낯설고 분방하고 역동적인 비유와 이미지가 돋보인다. 정형의 율격을 시원하게 타 넘어 보기 드문 대륙적 약동을 뿜고 있다.'

침묵을 깨고 세상 속으로 나온 젊은 시조시인 김재길 씨. 김 씨는 세계 곳곳에 아름다운 우리 시조를 알리고 싶다고 말한다. /이창언 기자

곧 재길 씨에게 꿈같은 일들이 다시 밀려왔다. 크고 작은 언론 인터뷰를 진행했고 군 장병 특강에 나서기도 했다. 재길 씨가 몸담고 있던 경남대학교 청년작가 아카데미를 빛낸 공을 널리 인정받거나 재학생 최초로 자랑스러운 경남대인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출판사 원고 청탁을 받는 일도 잦았다. 재길 씨 작품의 단골손님인 별과 달이 금방이라도 잡힐 듯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재길 씨는 전혀 다른 삶을 택했다. 드러내고 뽐내기보단 감추고 아끼는 데 더 힘을 쏟았다. 그리고 지금. 재길 씨는 그 길을 '청춘'이 인도했다고 말한다.

"젊다는 게 마냥 좋은 줄만 알았는데 아니더라고요. 제 이름 앞뒤에 시조시인이라는 또 다른 이름이 붙다 보니 부담감이 컸어요. 무언가를 기대하는 주변 시선에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일도 많이 생겼죠. 어쩌면 작가의 삶을 너무 적나라하게 알아버렸는지도 모르고요."

그렇다고 불행하지는 않았다. 평범한 대학생으로 돌아갔지만 그가 추구하는 글과 더 가까워졌다. 혼자만의 시간을 늘렸고 경험도 쌓아갔다.

"작가 아카데미 정일근(58·시인) 교수님 지도로 시조를 처음 접할 때 다짐했던 게 있어요. 고지식하다는 시조의 편견을 깨자는 거였죠. 한자어 대신 순 우리말로 적고 자연예찬 등 무거운 주제 대신 일상생활에서 이야기를 찾은 이유도 여기 있어요. 남들 눈에서 멀어진 시간은 그래서 더 소중했어요. 훅 불면 꺼질 것 같은, 위태위태한 유명세보단 단단한 자존감이 필요했거든요."

그 시기 재길 씨는 적어도 2주에 한 편은 쓰고자 했다. 먼저 시로 적고 퇴고를 통해 시조로 바꿔나갔다. 길을 거닐다가도 틈틈이 메모하는 습관을 길렀고 거침없는 상상력과 활달한 호흡으로 문장을 풀어나갔다. 하루를 정리하는 일은 무조건 글로 했다. 이전 작품에서 지적받은 '표현의 과잉'을 지우려 애썼다. 그사이 냉장고 안 물건을 열 맞춰 세우는 등 편집증은 좀 더 심해졌지만 미발표 작품은 쌓여갔다. 이윽고 다시 걸어야 할 길도 보였다.

"순 우리말로 글을 쓰려다 보니 스스로 못난 부분이 많이 보이더라고요. 대학원 진학을 생각하게 됐죠. 다음 달 떠나는 키르기스스탄 한국어 봉사활동이 대학원 진학의 시작점이 될 듯해요. 우리말을 가르치는 과정에서 스스로 한 단계 더 성장할 거라 믿거든요. 전통적인 시 율격 위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가득히 수놓겠다, 세계 곳곳에 우리 시조를 알리겠다는 포부도 첫발을 내딛는 셈이죠."

재길 씨는 여전히 젊은 시조시인이다. 그가 혼자만의 시간에 빠진 계기가 '젊음'이었다면 그를 세상 속으로 꺼낸 이유 역시 젊음이다.

"지나친 관심과 기대에 무너질지도 모르지만 다시 일어설 시간도 충분하다 봐요. 제 목표 중 하나가 '언젠가는 고향 통영의 이름난 문인들 사이에 함께하겠다'인데 이 역시도 젊으니까 더 당당히 말할 수 있더라고요. 45자를 채울 기회도, 전할 말도 제겐 많으니까요."

1966년 당시 군인이었던 소설가 최인호는 조선일보 신춘문예 소설부문에 당선됐다는 소식을 듣자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당선된 데가 거기뿐입니까?'

2013년 군인 신분으로 시조시인이 된 김재길 씨는 2년 뒤 이렇게 말한다.

'내 글이 어디 그거뿐이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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