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간다] (16) 하동군 북천면

열차가 하동 북천역에 다다르자 차창 저 너머 하얀 메밀꽃이 장관을 이룬다. 1m가 훌쩍 넘는 코스모스도 만발했다. 오는 22일부터 '제9회 북천 코스모스·메밀꽃 축제'가 열린다더니 기차역도 남달랐다. '북천코스모스역'이라고 부른다. 오래 구경하지는 못했다. 역무원이 안전 문제로 기차 시간에 맞춰 출입문을 열고 잠근다고 했다. 역 직원들이 직접 심고 가꾼 꽃이라고 말하며 승객들에게 축제장을 알린다.

북천역을 나와 행사장이 마련된 직전마을로 향했다. 북천초등학교 앞 마을길이 아니라 역 앞 도로를 따라 걸었다. 4·9일 장이 열리는 북천시장은 날짜가 맞지 않아 텅 비었다.

도로 따라 메밀꽃과 코스모스가 지천이다. 메밀밭으로 들어가 사진을 찍는 이들을 보니 문득 이효석(1907~1942)이 그립다.

가을 달빛 아래 반짝이는 메밀밭을 허생원과 동이가 걷던 모습이 아련하다. 그의 <메밀꽃 필 무렵>을 여러 번 글로 읽었고 지난해에는 애니메이션으로 제작한 영화로 만났다.

지금 하동 북천면은 어딜 가나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만발했다. /이미지 기자

상상만 했던 하얀 꽃 무리가 스크린에 펼쳐졌다.

어부들은 파도가 일었을 때 하얗게 부서지는 포말과 물보라를 뿌리며 일어나는 하얀 거품을 '메밀꽃 일다'라고 말한단다. 참, 좋다.

강원도 평창군 봉평은 아니지만 경남 하동에서도 소설의 정취를 맛보다니. 가을 하면 문학이라는 뻔한 전개가 지겹지만 그래도 높아진 하늘과 살랑이는 바람에 낭만을 찾고 싶은 계절이다.

그런데 눈앞에 '이병주문학관 전방 50m'라는 표지판이 서 있다. 기가 막힌 우연이다. 직전마을로 향하던 발걸음을 문학관으로 옮겼다.

기찻길 옆 이명마을이 나온다. 어느 집 담벼락에 코스모스 마을이라는 큰 글자가 새겨져 있고 다른 집 담에는 코스모스 꽃송이가 탐스럽게 그려져 있다. 소박한 시골이다. 마을은 여름과 가을이 뒤섞여 있다. 매미 소리가 한창이지만 길에 낙엽이 우수수 깔렸다. 벼의 황금빛은 이르지만 나무에서 떨어진 밤송이들은 입을 벌린 채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내음은 분명히 여름이 아니다. 추석 때 찾아간 촌 동네 외가에서 맡았던 가을 냄새가 풍긴다.

50m라는 문학관은 걸어도 걸어도 보이지 않는다. 마을 어르신을 만나 길을 물었더니 조금 더 오르면 된단다. 밤나무 숲을 지나고 소를 키우는 농장 여러 곳을 지나치니 못이 나온다. 어르신이 못이 나오면 좌측으로 걸으라고 했는데, 저 멀리 문학관이 보인다.

이병주문학관에서 만난 이병주 동상.

오르막길이다. 계단식 코스모스 꽃밭이 길을 따라 나있다. 문학관에 서서 내려다보니 한데 어우러진 꽃 천지다.

이병주(1921~1992)는 하동이 자랑하는 소설가다. 한국 현대사를 기록하고 성찰했던 문학인.

'어떤 주의를 가지는 것도 좋고, 어떤 사상을 가지는 것도 좋다. 그러나 그 주의 그 사상이 남을 강요하고 남의 행복을 짓밟는 것이 되어서는 안 된다. 자기 자신을 보다 인간답게 하는 힘이 되는 것이라야 한다.'

그가 <삐에로와 국화>에서 말한 것처럼 이병주는 금기시된 이데올로기 문제를 끄집어 냈고 고뇌했다. 유신정권 시절 '이병주를 읽은 사람과 안 읽은 사람으로 나누자'라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고 한다.

그가 태어난 북천면 이명산 자락 아래 지어진 이병주문학관은 펜촉에서 수없이 나오는 글을 휘감은 원고지가 관람객 눈길을 사로잡는다.

작가 이병주가 궁금한 백발 어르신과 문학관 사람들이 나누는 도란도란 대화를 슬며시 듣다 내리막길을 걸었다.

코스모스가 흐드러지게 핀 길가.

산 밑 마을은 어느새 땅거미가 내려앉았고 내 그림자도 길어졌다.

한 시간을 훌쩍 넘기고서야 이명마을을 빠져나왔다. '이병주문학관 2㎞'라는 표지판이 마을 입구에 있다.

북천역 방향으로 가다 북천초등학교 앞 산책로를 거닐었다. 계절을 눈앞에서 보고 자라는 아이들이 다행이다 싶다. 하교가 끝난 시각이라 텅 빈 운동장에는 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나부낀다.

며칠 후 직전마을 축제장은 코스모스와 메밀꽃이 장관을 이룰 뿐만 아니라 시골장터가 들어서고 문화 행사가 열릴 것이다.

혹 떠들썩하고 번잡한 게 싫다면 어디에 가도 상관없다. 북천면 어디든 발길 따라 진한 꽃내음이 그득할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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