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8년 5월, 봄의 산복도로는 아름다웠다. 벚나무의 꽃은 졌지만 막 돋아난 잎들이 푸름을 더하고 있었고 월남천 위로 걸쳐진 연애다리는 되바라진 이름 때문인지 시골서 갓 올라온 나의 감흥 때문인지 실제보다 훨씬 아름다워 보였다. 그 다리 끝에 언니가 서 있었다.

언니는 겨우 열아홉 고삼의 소녀였는데 그때는 앞으로 엄마를 대신하여 나를 책임져 줄 보호자라 생각해서 그렇게 커 보일 수가 없었다. 시골에서 엄마를 졸라 졸라서 얻어낸 전학, 그토록 그리던 나의 마산 생활이 막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나는 기대에 부풀어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

"이게 뭐야?" 풍선처럼 부푼 가슴에서 바람이 빠져나가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석유곤로 하나에 그릇 몇 개 덩그렇게 놓인 부엌과 좁아터진 월세방 한 칸, 책상도 제대로 없는 데서 가난한 자취생 언니는 살고 있었다. 6·25 때 월남하여 혼자되신 주인 할머니는 근검절약하다 못해 인색하기까지 하셨다. 전기 아껴 쓰라는 것은 기본이었지만 재래식 화장실 빨리 찬다는 이유로 소변은 화장실 말고 수채에서 누라는 이야기는 압권이었다.

이제 막 중학교 1학년, 더구나 엄마 떠나 도시로 와서 모든 게 서툴던 촌뜨기에게 그런 망측한 일이 없었다. 결국 생각해 낸 방법이 할머니가 없거나 한눈 팔고 있을 때 화장실 가기였다. 하지만 배변 욕구라는 게 내 마음대로 조절되는 일이 아니라서 할머니 눈을 피해 화장실을 몰래 쓰는 일은 곤혹이었다. 냉장고가 없어서 시골집에 갈 때마다 가져오는 반찬이라곤 콩자반과 멸치볶음, 김치가 전부였고 어느 때는 저녁으로 끓인 라면에 어찌 들어갔는지 개미가 익어 둥둥 뜨기도 했다. 가난했으나 세상 무엇이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은 이 모든 남루를 견디고도 남게 하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고픈 배를 꿈으로 채우며 산복도로에서 익어가는 풋것의 시간을 보냈다. 허술한 부엌아궁이가 말썽을 일으켜 그해 겨울 결국 연탄가스를 마시고 자취집을 옮겨야 했다. 마당 넓은 집은 어느새 아파트로 바뀌어 흔적도 없이 사라졌지만 내 도시 생활의 첫 집, 가난한 자취방은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있다. 이후 고등학교까지 산복도로에서 6년을 보냈다. 등·하교 시간 산복도로의 15번, 25번 버스는 중고등학생들이 남녀 없이 마구 뒤섞여 발 디딜 틈이 없었고 '은하철도 999'를 개사했던 '쌔빠지게 달려라 산복도로 25'는 그 시대 우리들의 주제가로 자리 잡았다.

내가 단발머리 중학생으로 다니던 길을 내 딸이 후배가 되어 똑같은 단발머리로 다니게 되었고 어느새 세월은 40년 가까이 훌쩍 흘러버렸다. 40여 년의 세월은 가늘고 볼품없던 벚나무를 둥치 굵은 든든한 나무로 바꾸어 봄이 되면 소담스레 가지마다 꽃구름을 피워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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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시간이 가고 길 위의 삶도 어디론가 속절없이 흘러가고 있다. 초가을의 산복도로에 서보니 추억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밀려든다. 남겨진 추억을 무게로 잴 수 있다면 무거워서 감히 들 엄두도 나지 않을 것 같다. 그 길 위에서 내가 자랐고 내 딸이 자라고 있다.

/윤은주(수필가·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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