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8) 유진종 우리수산 대표

유진종(59) 대표는 지난 7월 15일 경남지역 56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했다. 사천에서는 최초다. 인터뷰하는 동안 힘겨웠던 지난 시절을 이야기하면서 유 대표는 몇 번이나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자신의 어려웠던 과거가 기부를 하게 된 결정적 이유는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어려운 이웃을 위한 선택이었지만 우리 사회가 나눔이 넘치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도 컸음을 강조했다.

◇지긋지긋했던 고구마 = 유 대표는 1956년 삼천포와 창선도 사이에 있는 신수도라는 섬에서 태어났다. 그는 가난한 어부의 5녀 2남 중 다섯째이면서 장남이다. 어린 시절 어려웠던 탓에 세 끼를 모두 먹은 날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다고 했다. "아버지는 평생 어부로 사시다 돌아가셨죠. 아버지가 바다에 고기 잡으러 나가시면 집에 7명이 남았는데…. 고구마를 솥에 삶으면 여섯 조각이었어요. 누군가 못 먹었는데 아마 어머니였겠죠. 그것도 모르고 먹을 것이 적다고 투정만 했으니…." 그의 눈에는 살며시 물기가 고였다. 한동안 정적이 흐르고 뒤이어 그는 길게 한숨을 품어냈다.

너무 사는 게 어렵다 보니 결국 가족은 그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삼천포로 이사를 나왔다. 하지만 여건이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전학해 새 학교로 가야 하지만 그는 1년을 쉬어야만 했다.

경남지역 56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사천 우리수산 유진종 대표.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신수도에서 학교를 다니다 삼천포로 왔는데 제대로 정착을 못 하면서 1년은 학교에 가지 못했고 그다음 해에 삼천포 초등학교에 들어갔어요. 정말 기억하기도 싫은 시절인데 이런 이야기를 계속해야 하는지…."

군대 가기 전까지는 부산에서 객지 생활을 하며 번 돈으로 집안 생계를 도왔던 그는 제대 후 고향 삼천포로 돌아와 생선 중도매 일을 하게 된다. 잠시 다른 일을 하기도 했지만 그는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 있었다.

"중도매 일을 하다 일반 직장에 좀 다녔어요. 그러다 93년 제 나이 마흔이 안돼 지금의 사업을 하게 된 거고. 자리를 잡느라 얼마나 힘들었던지…."

◇"표나는 부자는 아닙니다" = 우리수산, 그가 운영하는 수산물 무역업체다. 주로 쥐치를 수입해 삼천포 일대 가공업체에 공급하는 일을 하고 있다. 93년 회사를 차려 올해로 22년째를 맞았다.

"사업 시작할 때 그때는 비행기 왕복 티켓 사고 나면 돈이 없었어요. 고작 100달러짜리 지폐 한두 장이 여비 전부인데, 그걸 잃어버리면 안 되니까 중국 출장 갈 때 팬티 안에 작은 호주머니를 만들어 거기에 넣고 다녔어요. 호텔에 들어가 잔 적도 한 번도 없었어요. 중국 내에서 이동할 때도 가능하면 비용이 저렴하고 잠자리까지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는 배로 다녔어요." 다시 그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는 회사가 이만큼 성장한 것은 끈기와 부지런함, 신뢰 덕이었다고 말했다. "저와 파트너인 중국업체 사람들은 국적만 다를 뿐 형제입니다. 주로 단둥, 저장성, 푸젠성 지역 업체들과 거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분들도 저와 같이 힘든 시기를 견디며 서로 도와주면서 성장을 했어요. 지금도 제가 어렵다고 하면 그 사람들 수십억 원어치는 그냥 줄 사람들입니다. 그만큼 신뢰가 두텁죠."

하지만 난관에 부딪혔던 순간이 한두 번 아니었다. IMF 외환위기 때는 부도 위기와 직면해야만 했다. "특히 IMF 외환위기가 가장 힘들었습니다. 아이고…. 경기가 어려워지고 소비가 줄어들면서 거래하는 생산업체에 자금경색이 오고 저희도 받을 돈을 제때 못 받게 됐죠. 그러니 저희가 지급해야 할 것도 못하게 되고, 돈을 빌리자니 빌릴 데도 없고…. 부도 위기였죠. 그런데 그나마 지금까지 버티며 죽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도 신용 덕이죠."

우리수산은 22년 만에 쥐포 등을 만들고자 국내로 수입되는 쥐치의 70∼80%를 공급하는 업체로 발돋움했다. 지난해 매출은 60억 원에 이른다. "20년 넘게 한우물을 파며 신뢰를 통해 성장했죠. 전 세계에서 잡히는 쥐치에 대한 정보가 가장 많고, 또 가장 많이 다룬다고 보시면 됩니다. 그렇다고 큰 부자는 아닙니다."

◇기부는 열심히 살아온 징표 = 그는 나눔에도 세밀한 배려 기술과 지혜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경남사회복지모금회를 통해 기부한 것 또한 이러한 이유 때문이라고 했다. "모 고등학교에 가정환경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급식비를 지원한 때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학교 선생님이 전화해서 '한 학생이 급식 도움을 안 받겠다고 한다면서 통장으로 다시 보내 준다'는 거예요. 이유를 알아보다 '모르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는 게 싫다. 굶는 것보다 자존심이 먼저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게 됐습니다. 보통 우리가 뭘 조금 베풀면 자만이 생기죠. 주는 사람은 어쩌면 갑의 입장이죠. 그 학생은 자기가 을의 느낌을 받는 것이 싫었던 것일 겁니다. 기부를 한답시고 공공연히 우리 사회에 갑과 을이 존재한다는 불신만 심어 준 것이 아닌가 후회했죠. 그러면서 반성하고 느꼈죠. 나눔에도 상대를 먼저 헤아리는 기술과 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요. 그래서 고민 끝에 이 분야에 노하우가 있는 전문기관인 사회복지공동모금회의 아너소사이어티라는 방식을 통해 나눔을 실천하기로 결정한 것입니다."

그는 기부를 하게 된 데는 별다른 이유가 없었고, 평소에 가져왔던 소신을 실천한 것이라고 담백하게 말했다. "저는 큰 부자가 아닙니다. 그러니 돈 자랑하려고 기부한 것도 아니죠. 다만 열심히 세상을 살아왔고 제 마음의 징표 하나를 만든다는 뜻에서 실천을 한 것입니다. 오래전부터 가져왔던 소신이기도 합니다. 이런 문화가 확산하는 데 작은 도움이라도 됐으면 하는 것이죠. 그 정도의 욕심입니다."

◇나눔 확산하는 씨앗이 되길 = 그는 자신의 기부가 어려운 이웃을 넘어 여유 있는 사람에게도 도움이 되길 바랐다.

다시 말해 그는 자신의 기부가 나눔 문화 확산의 작은 홀씨가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기부 방식에서 익명으로 할까, 실명으로 할까 고민하다 사회단체 봉사활동을 하는 동료들이 실명을 권유해서 그렇게 결정했습니다. 앞으로 사천에서 2호, 3호, 4호 계속 이어져야 한다는 생각에서죠. 그다음 고민이 기부 이후에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칭찬을 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일부에서는 '돈 자랑 한다. 잘난 척한다'는 투로 곱지 않게 보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동안 제대로 챙기지 못한 주변 분들도 마음에 쓰였고요. 아직 나눔문화가 성숙하지 못한 과도기적인 상황이라 그럴 겁니다. 이런 고민은 지나고 보니 사소한 것이었어요. 저와 같은 고민을 하시는 분이 계신다면 걱정 말고 결단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는 기회가 된다면 앞으로도 꾸준히 나눔을 실천할 계획이라고 했다. 오히려 그런 기회를 '축복'이라 표현하며 다시 기회가 찾아오길 간절히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십시일반(十匙一飯)이라는 사자성어가 있잖아요. 그런데 그릇에서 한 술을 퍼주면 얼마나 도움이 될까 하고 생각하거나 아까워하시는 분들이 많잖아요. 사실 한 끼에 한 술 안 먹는다고 큰 문제가 생기는 것은 아니거든요. 문제는 한 술에만 시선을 집중해서 보기 때문입니다. 그 한 술만 보지 말고 더해질 수십 개 수백 개의 숟가락을 봤으면 합니다. 금액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한 것이죠. 비우면 그만큼 채워집니다. 내가 어려우면 돌려받기도 하고 그렇게 사는 세상이 좋은 세상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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