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영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참석한 정명렬 씨

지난해 11월 독일 북동부 폴란드 국경지역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州) 한 방송과 신문에 '명률 브라운이 위커뮌데 시를 떠나려 한다'는 기사가 실렸다. 신문은 '위커뮌데 시는 그녀의 작별을 받아들이기 어려워한다'고 썼다.

한 도시가 '떠나지 말아달라'고 애원하는 사람 명률 브라운(Moug Yul Braun), 그의 한국명은 정명렬(67·사진)이다.

세계국제결혼총연합회 이사장이기도 한 그는 지난 25~28일 열리는 세계한민족여성네트워크 참석차 통영을 찾은 글로벌 리더 중 한 명이다.

그는 창원(진해)이 고향이다. "날씨가 문디같아서"와 같이 걸쭉한 사투리를 쓰는 독일형 경상도 아줌마이기도 하다.

정 씨는 45년 전인 1970년 1월, 22세에 120명 동료와 독일로 떠난 파독 간호사 중 한 명이었다.

"전쟁 후라 사람이 많이 죽어 독일에는 대부분 나이 든 40~50대 간호사가 있었어요. 도착했는데 눈이 얼마나 내리는지, 날씨는 얼마나 춥고 문디같던지…."

외로움과 맞지 않는 음식이며 말까지 통하지 않던 곳, 그는 당시 한 사건을 기억했다.

모국어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치던 그때 동료 한 명이 정신 이상을 보였다. "일도 잘하고 영리했던 언니였죠. 함께 간 간호사들이 얼마나 울었는지 몰라요."

"3개월간 단어장이 헐고 찢어져 넘기지 못할 정도로 읽었어요. 처음 응급실에서 덩치 큰 서양인 옷을 벗기고 입히고 씻기고…. 음식이 맞지 않아 먹지 못하고 있는데 하루는 수간호사가 빵 두 조각과 수프를 주며 '먹지 않으면 나오지 마라'며 문을 잠가버리는 일도 있었죠."

월급 850마르크를 받던 그 시절에 그는 바짝 3년을 벌어 집을 살 정도가 되면 독일을 떠나겠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생활비 50마르크를 제외하고 한국으로 송금하는 것 외에 모두 저축했고, 조금 더 아끼려 6㎞가량 떨어진 시장을 찾는 것도 예사였다.

4년 만에 휴가를 내고 고국 땅을 밟은 그는 가족을 위해 논과 밭, 텔레비전, 냉장고를 사드렸고, 어머니 비행기도 태워드렸다. 나중에 집을 지어드리기까지 했다.

독일로 되돌아간 그는 지금의 시누이가 병원에 입원한 인연으로 독일 정착을 생각하게 된다.

"시누이가 영화배우 아내였어요. 활발하고 잘 웃는 제가 좋았나 봐요. 어느 날 시누이의 초대를 받아 간 집에서 남편과 처음 만났죠. 그 얌전한 사람이 '첫눈에 반했다'며 '사랑한다'고 하더라고요."

28세에 결혼한 그는 아들과 딸을 키우고자 휴직했다. 1990년 10월 "벽이 무너졌다"는 소릴 들었고 통일 독일을 보면서 내 나라가 아파서 펑펑 울기도 했다.

몇 년 후 시댁이었던 옛 동독 지역에 오래된 네덜란드 풍차를 시아버지가 사들였고, 이 즈음 한국 여행을 앞두고 위암 판정을 받았다. "차를 타고 나무를 들이받아 죽을 생각했지만 어린 아이들, 혼자 일 해본 적도 없는 남편 걱정이 앞서 포기하기도 했죠."

1997년 시아버지는 "싫다"는 그에게 "타고난 사업가"라며 호텔 운영을 맡겼고, 이후 18년간 정 씨는 풍차호텔을 운영했다. 2만 1000평이 넘는 터에 세미나 시설과 수영장, 사우나, 미용실 등을 갖춘 호텔은 영업이 잘돼 계속 증축했다. 독일 유명 정치인과 연예인들이 찾는 이곳은 침상 규모 100개 이상으로 성장했다.

성장의 비결은 매년 160여 개국이 참가하는 베를린 '국제 녹색주간 박람회장'에서 사람들 눈길을 사로잡은 것이었다. 그는 위커뮌데 시 상징물을 디자인한 챙이 넓은 4kg의 모자를 쓰고 단 한 번도 앉지 않고 몇 날 며칠을 박람회장에서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를 소개했다. 이 퍼포먼스로 유명해진 그는 지난 13년간 매년 모자를 바꿔 만들면서 언론과 유명인들에게 주목받았고, 덩달아 빼어난 호수를 가진 그의 지역이 일약 독일 명소가 됐다.

메르켈 총리는 박람회 기간에 그를 찾아와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주의 진주(Pearl)"라고 불렀다.

이런 그가 지난해 호텔을 팔고 여행을 준비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방송국이 놀라 취재를 했고, 이후 신문이 "명률 브라운이 '아듀'라고 해 시민들이 큰 충격을 받았다"고 전했다.

그는 이처럼 이 지역을 명소로 만든 주인공이고 위커뮌데의 상징이자 마스코트 그 자체였다.

그는 얼마 전 호텔 사업에서 은퇴했다. 나이가 들었던 것이고 아들이 사업을 이어받길 원했지만 대학 진학을 말리지 않았다. 아들은 "(호텔 사업을) 이어받으려면 공부는 왜 했겠느냐"며 정중히 거절했다.

"외롭고 힘들어서 저는 평생을 울면서 살아왔어요. 하지만 사람들 앞에서는 한 번도 울지 않았어요. 동정받기 싫었기 때문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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