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피가 가슴을 치는 우리의 그 누가/무한한 증오를 일순에 내리친 우리들의 그 누가/1919년 3월 1일을 잊을쏘냐!/그날/대한독립만세! 소리는 방방곡곡을 뒤흔들고/짓밟힌 일장기 대신/모국의 깃발이 집집마다 휘날렸다.'

이 시는 항일애국지사의 시가 아니다. 일본 시인 마키무라 고가 1932년에 쓴 시다. 순수 일본인인 그는 20살에 위 시를 남겼다. 이후 조선해방운동, 공산주의 활동을 하다 일본 당국에 체포돼 26살의 나이로 감옥에서 죽었다.

1933년 3월 하순.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던 유격대 앞에 기이한 광경이 펼쳐졌다. 일본군 보급차량이 고장난 채 서 있었고, 이다 스케오라는 일본인 장교가 쓰러져 있었다. 그는 유격대 앞으로 유서를 남겼는데 '일본 파쇼(제국주의)에 나는 반대하지만, 전쟁을 일으킨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도망칠 수가 없었다. 내가 남긴 탄환으로 파쇼군대를 쏘고 혁명을 이뤄달라'는 내용이었다. 그가 남긴 트럭에는 총탄 10만 발이 있었다.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의거 소식을 초조하게 기다리던 독립운동가들에게 한 일본인 기자가 비를 맞으며 뛰어왔다. 그 기자는 "너희 성공했다, 너희 성공했다. 시라카와가 죽고 노무라 사령관 눈알이 빠졌다"며 의거 소식을 독립운동가들에게 전해 주면서 함께 기뻐했다. 그는 독립운동가들의 의거 계획을 사전에 눈치채고 있었지만, 일본 당국에 알리지 않았고 심적으로 지지했다고 전해진다.

1931년 결성된 항일 무정부주의 단체인 '남화한인청년연맹'에는 일본인 청년 2명이 가담해 활동하고 있었고, 적지 않은 일본 지식인들이 항일운동을 지지했다. '당시엔 다 그랬다. 어쩔 수 없었다'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논리가 궁색해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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