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 많이 한 년들은 고생하면서 살고, 공부 못 한 년들은 편하게 살고, 쯧쯧쯧."

모처럼 네 자매가 모여 있는 평화로운 오후에 느닷없이 엄마가 던진 한 마디에 우리 네 자매가 모두 빵 터졌다. 엄마의 어록에 또 하나의 명언이 추가되었다며 눈물까지 찔끔거리며 깔깔거리는데 이런 우리를 바라보는 엄마의 표정은 영 마뜩잖다.

우리 네 자매 중 첫째 언니와 막내는 전업 주부이고, 둘째 언니와 셋째인 나는 고등학교 교사다.

이제 일흔이 된 엄마는 우리 집과 둘째 언니네 집을 오가며 살림살이에 육아를 돌봐 주시곤 한다. 올 해 담임을 맡은 둘째 언니와 나는 귀가가 늦기 일쑤고 집에 들어오면 피곤하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으니 엄마는 그게 영 맘에 안 드시는 모양이다.

이에 비해 첫째 언니와 막내는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편하게 산단다. 그게 문득 억울하셨던 모양이다.

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데 편하게 사는 딸들이 못마땅해서였겠는가. 방학도 없이 학교에 다니며 일하랴, 애들 키우랴 전전긍긍하는 둘째 언니와 내가 측은해서였을 테지. 우리는 엄마의 대사에 깊이 함축된 지난한 삶을 너무도 잘 알기에 누구도 엄마에게 섣부른 변명이나 위로를 하지 않는다.

엄마는 세상에서 월급 받고 사는 사람이 제일 부러웠단다. 돌아가신 아버지가 변변한 직장이 없이 막노동 해서 벌어 오는 재감 없는 수입으로 평생을 가슴 졸이며 살았기 때문이다. 못 배워서 몸이 고생하는 거라고, 엄마 아빠가 조금만 배웠어도 우리도 고생 안 하고 살았을 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없는 살림에도 악착같이 딸들을 공부시켰고, 없는 형편에도 공부를 잘 해 주었던 우리들에게 늘 고마워했다. 그러다 제일 공부 잘 했던 첫째 언니를 돈이 없어 대학에 보내지 못한 걸 평생을 두고 한스러워하고 미안해했다. 이런 우리 엄마의 소원은 네 딸을 모두 월급 꼬박꼬박 나오는 공무원을 시키는 거였는데, 엄마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편안하고 안전한 직업이었기 때문이다. 자신처럼 고생하며 살지 말라고, 자신처럼 하고 싶은 것, 먹고 싶은 것 참아가며 살지 말라고, 남편의 무능력 때문에 가슴 졸이며 살지 말라고, 못난 부모 만나 부모 덕은 못 봤지만 우리들의 자식은 하고 싶어 하는 것 다 뒷바라지 해주며 살라고.

여하튼 엄마의 소원대로 넷 중에 둘은 공무원이 되었으니 50%는 성공한 셈이라 여겼을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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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엄마의 신념처럼 공부한 만큼 편하게 잘 살아야 맞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엄마 계산에 예기치 않은 변수가 생겨버렸으니 황당하고 배신감이 들 수밖에. 엄마에겐 평생의 신념이 뒤엎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귀여운 우리 엄마의 신념인데 지켜 줘야지. '작은 언니야, 이제 우린 힘들고 피곤하면 안 되니 이참에 진짜 슈퍼우먼 워킹 맘으로 거듭나는 게 어때?' 

/이정주(김해분성여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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