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4) 밀양 의열단 역사지도

영화 <암살> 끝 무렵. 김원봉 선생은 조국 해방 소식에도 웃지 않은 채 중국 독주에 불을 붙이며 이렇게 말한다. "최수봉, 나석주, 윤세주…. 너무 많이 죽었어요. 잊혀지겠지요? 미안합니다."

밀양은 김원봉 외에도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이 인물들 활약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만주에 이름을 떨친 3·1운동, 의열투쟁과 함께 밀양 내 항일독립을 위한 문화, 사회, 학생운동 영역 등 항일독립운동 전반에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이 때문에 밀양은 항일독립운동 심연이 깊은 지역이다.

밀양은 특히 '항일 무장 투쟁' 단체의 본산이자 그 활동의 시발점이었다. 의열단 제1차 암살파괴의거 대상이 밀양경찰서인 점에서다. 의열단원 최수봉이 김원봉 지시를 받아 김상윤·고인덕 등과 함께 한 밀양경찰서 투탄 사건은 일제에 큰 타격을 입히지 못했으나 밀양 출신 의열단원 대부분이 이에 동참한 데서 일제 폭압에 대한 밀양민의 한과 고통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많은 역사가는 여러 항일독립운동 유형(애국계몽, 실력양성, 외교론 등) 중에도 '무장투쟁'을 높이 친다. 의열투쟁은 이 점에서 국내 항일독립운동사에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 '무장 투쟁'이 가장 직접적인 저항형태인 데다 무엇보다 자신의 '목숨'을 바쳐 몸을 던진 그 숭고한 정신이 후세에 주는 교훈이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방 이후 무장투쟁 세력은 남한에서 제대로 대접받지 못한다. 집권자 이승만이 외교론자인 데다 친일파를 적극 등용해 이 투사들을 억압한 탓이다. 김원봉 선생이 일제 고등계 악질 형사였다가 미군정 때 수도 경찰청 고위 경찰로 변신한 노덕술에게 가혹한 고문과 수모를 당한 것이 이를 방증한다. 이 같은 수모와 탄압은 김원봉 선생이 무장투쟁 세력이 집권한 북한으로 넘어간 이유로 작용했다.

이렇듯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 바쳤으나 잊혀 간 의열단원들을 다시 기억하고자 그들의 흔적을 지도로 정리한다. (클릭하면 이미지가 확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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