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를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돌아와 보니 주말 이틀간의 흔적이 방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고3이 되면서 기숙사 생활을 시작한 아이는 수능을 100여 일 앞둔 지금 수험 생활의 절정을 달리고 있다. 일주일분 간식과 빨래해 둔 옷을 챙겨 늦잠에서 깨어난 딸을 다시 기숙사에 데려다 주고 오니 방안이 전쟁터 같다.

멋대로 벗어던진 옷과 마구 쌓인 책을 정리하다 보니 책상 위에 웬 노트가 한 무더기 쌓여 있다. 뭔가 두고 갔나 싶어 펼쳐보니 다 쓴 것들이었다. 차례대로 살펴본 열권이 넘는 두꺼운 노트는 모두 수학문제 풀이로 빼곡했다. 그리고 표지마다 노적성해(露積成海)란 한자성어가 적혀 있다.

딸아이는 공부를 잘하는 편이지만 유난히 수학에 약했다. 아이들이 어렸던 시절 너무 많이 바쁜 엄마였던 나는 공부에 유난을 떨지 못했다. 그래도 꽤 발달한 언어감각을 지녔던 아이는 영어와 국어 등 과목엔 흥미를 보였고 성적도 잘 받곤 했다. 수학도 그렇게 하려니 마음 놓고 있었는데 고등학교에 올라와 문제가 생기기 시작했다. 선행 학습 없이도 제 진도만 맞춰 가면 된다는 교육 당국 말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 잘못이었는지 아이의 고등학교 수학 성적은 좀처럼 만족할 만한 수준으로 오르지 못했다. 나는 딸의 수학 성적이 안타까웠지만 솔직히 '누구 닮아서 못하나?'하는 의문을 가질 형편이 못되었다. 

학창시절 나 역시 수학에 흥미도 재능도 없었다. 그래서 수학에 이만한 성적만 받아도 나보다 훨씬 낫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딸아이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못했다. 고3이 되면서 아이는 수학공부에 자신의 미래를 걸고 매달렸다. 어느 주말에는 하루에 11시간 수학 공부했다며 스스로 대견해 했다. 이런 노력 덕분으로 성적도 조금씩 향상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무심히 "엄마, 이제 애들이 나한테 수학을 물어봐요"하고 말해 대견했는데 그 이면에 이런 노력이 있었던 것이다. 콧등이 시큰했다. 풀리지 않는 문제를 놓고 씨름했던 흔적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다 쓴 공책에 빼곡히 적힌 많은 문제풀이 흔적은 자신의 바다를 이루기 위한 한 방울 한 방울의 이슬이었던 셈이다. 그렇다면 딸은 아직 바다를 이루진 못했지만 나름의 작은 개울 하나는 이룬 듯하다.

물론 수능이 끝난 것이 아니고, 수능을 잘 쳐서 좋은 대학에 들어간다고 삶이 성공하는 것도 아니다. 또 지금 성적이 좀 올랐다고 그게 무슨 대단한 일도 아니다. 하지만 나는 엄마로서, 목표를 향한 내 딸의 꾸준한 노력만은 온 마음으로 박수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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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수능뿐이겠는가. 삶의 모든 과정이 노적성해(露積成海)가 아닐까. 우리 누구나 자신의 바다를 이루기 위해 매순간 이슬을 하나하나 쌓아가는 중이다. 더러 아침볕에 허무하게 스러지기도 하고 또 풀잎에 닿기도 전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이슬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사소함, 말할 수 없는 연약함이 모여 끝내 인생의 바다를 이루는 것, 그러므로 그 어떤 순간도 소홀히 할 수 없음을 나는 열아홉 살 내 딸의 수학공책에서 배운다.

/윤은주(수필가, 한국독서교육개발원 전임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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