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30) 황창근 경남체육회 소프트볼 감독

"우리나라에 소프트볼을 도입한 1세대고, 국가대표팀 감독 경력만 20년이 넘는 분이시니까 '명장열전'에 딱 어울리겠네요."

도체육회 배희욱 사무처장은 경남체육회 소프트볼팀 황창근(57) 감독을 추천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해 제주에서 열린 전국체전에서 그를 지켜본 적이 있었다.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그라운드를 호령하는 그에게선 범상치 않은 기운도 느껴졌다. 그동안 '명장열전'에서 다뤘던 지도자와는 사뭇 다른 경력에다 1시간 남짓한 인터뷰를 위해 수도권에서 와야 했기에 불안함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모든 게 기우였다. 익숙한 유니폼 차림으로 약속 장소에 나타난 황 감독은 기자의 예상(?)과는 달리 푸근하면서도 선한 인상의 소유자였다. 소프트볼 문외한인 기자의 질문에 참을성 있게 답했고 유머감각도 뛰어났다. 먼저, 그가 소프트볼에 입문한 이야기부터 꺼냈다.

인천이 고향인 황 감독은 야구 선수 출신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야구에 입문한 그는 인천남중을 거쳐 지금은 이름조차 생소한 철도고등학교에 입학했다.

국가대표팀만 20년 넘게 지도한 경남체육회 소프트볼팀 황창근 감독은 지원만 뒷받침된다면 2018년 자카르타아시안게임에서는 메달 획득이 가능할 것으로 내다봤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1971년 야구부를 창단한 철도고는 첫해 청룡기대회 서울 예선에서 우승하는 돌풍을 일으켰고, 이듬해에는 대통령배 4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고교 재학 당시 황금사자기와 봉황대기에서 타격상과 홈런상을 받을 만큼 기량도 출중했다.

"지금 NC 다이노스에서 수석코치를 맡고 있는 양승관 코치와 동기예요. 같은 학교를 다닌 적은 없지만 집이 근처라 친하게 지냈죠. 제가 선수 생활을 계속했다면 지금쯤 야구판에서 만났을 수도 있었겠죠."

그는 고교 졸업 이후 철도청에서 매표요원으로 근무하면서 프로야구 출범을 지켜봐야 했다. 야구를 그만두고 현역으로 군 복무를 하고 온 그에게 프로야구는 '그림의 떡'이었다.

이후 황 감독은 24시간 근무 후 24시간 휴무인 철도청 시스템상 서울시야구협회 심판위원으로 활동하며 야구계와 인연을 이어갔다.

1988년 그에게 뜻하지 않게 제의가 들어왔다. 국내에 여자 소프트볼을 도입할 계획인데 팀을 좀 맡아달라는 것. 야구 선배의 부탁으로 그는 숙명여대 감독으로 소프트볼과 첫 인연을 맺었다.

"야구에 '야'자도 모르는 여학생을 데리고 운동을 하려니 막막했죠. 그나마 운동신경이 있는 체육학과 학생들을 데리고 시작했는데 덜컥 아시안게임에도 나가게 됐죠."

당시 우리나라는 북한에 승리를 거두는 등 나름 선전했지만 중국, 일본, 대만에 밀려 메달 획득에는 실패했다.

소프트볼이 정식 종목으로 채택된 1990년 베이징대회부터 지난해 열린 인천대회까지 우리 대표팀은 한 차례도 빼놓지 않고 출전했다. 그러나 메달권 진입에는 번번이 실패했다.

아시안게임에서 소프트볼에 계속 출전한 국가는 한국, 일본, 중국, 대만 4개국이다. 이 중 한 번도 시상대에 서지 못한 팀은 한국이 유일하다.

소프트볼은 일본과 함께 중국, 대만이 '3강'으로 꼽힌다. 일본은 소프트볼이 1부 리그와 2부 리그로 나뉘어 있을 만큼 구단 수도 많고 선수층도 두껍다.

황 감독은 "비교 자체가 안 되는 수준이다. 일본은 1부 리그부터 사회인리그까지 소프트볼 인구만 1만 명이 넘고, 대만은 국제대회에서 메달을 따면 교사로 채용하고 아파트를 주는 등 파격적인 대우를 해주고 있다"면서 "반면 우리나라는 비인기 종목이라 실업팀은 5개에 불과하고, 전용 구장은 고사하고 연습 장소가 없어 떠돌이 신세로 지낸다"고 한탄했다.

그는 특이하게도 해외 국가대표팀 감독 경력도 보유하고 있다. 황 감독은 2000년에는 동유럽 국가의 요청으로 파견감독을 지내면서 크로아티아를 이끌고 처음 출전한 14회 유럽 선수권대회 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이런 공로로 황 감독은 국내 지도자로는 최초로 세계소프트볼연맹(ISF) '명예의 전당'에 헌액이 됐다. 황 감독의 ISF 명예의 전당 헌액은 국내 소프트볼 관계자 중 민준기 심판에 이어 2번째고 선수와 감독을 통틀어서는 처음이다.

그는 "명예의 전당에 헌액됐다는 증표로 다이아몬드 반지를 받았고, 세계연맹이 주최하는 대회에는 항공편을 주는 등 혜택도 많다"면서 "불모지와 다름없던 한국에 소프트볼을 보급하고 동유럽 국가 등에서 지도자 생활을 한 점을 높이 평가한 것 같다"고 말했다.

황 감독은 지난 2009년부터 경남체육회 소속의 소프트볼 감독으로 재직 중이다.

"2009년 경북체육회 팀을 맡던 중 전국체전 1회전에서 탈락했다. 경북에서 팀 해체를 결정했는데, 그때 경남에서 손을 내밀어줬다. 이후 전국체전에서 2번이나 금메달을 따는 등 경남을 위해 열심히 뛰고 있다."

경남체육회 팀은 국가대표급 선수 구성을 자랑한다. 지난해에는 아시안게임에 대비해 재일교포 선수인 배유가, 배내혜 자매를 영입해 전력을 보강했다.

재일교포 3세로 투수인 배유가는 팀 에이스를 맡고 있다. 배유가의 언니 배내혜는 베이징올림픽 당시 금메달을 목에 걸었던 일본대표팀 출신으로 세계 정상급 실력을 갖췄다.

그는 "야구처럼 소프트볼도 투수가 좋아야 한다. 배유가 등 좋은 선수를 많이 영입했으니 올해도 전국체전에서 우승해 대회 2연패를 이루겠다"고 힘주어 말했다.

황 감독은 한국 여자 소프트볼이 세계정상권에 서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공언했다. 투자와 지원만 이뤄진다면 아시아권은 물론 세계무대에서도 우승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그는 "한국 여자가 운동에는 소질이 많잖아요. LPGA(미국여자프로골프) 투어에서 뛰는 선수들도 그렇고 이번에 여자축구도 얼마나 잘했어요. 소프트볼도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봐요. 7번 도전하는 동안 한 번도 메달을 따지 못했지만 3년 뒤 열리는 자카르타아시안게임에서는 꼭 메달 딸 것"이라고 전했다.

한국 소프트볼 1세대로 국가대표팀 감독만 20년을 지낸 황 감독. 소프트볼을 위해 뭘 했으면 좋겠느냐는 질문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렇게 말했다.

"여자축구도 그렇지만 아직 여자가 야구를 한다는 편견이 아쉽죠. 그러다 보니 국내에선 비인기 종목이고 선수들도 운동이 끝나면 파트 타임으로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기도 해요. 운동에만 전념해야 하는 선수지만 생계도 걱정해야 하는 처지니…. 어휴, 감독인 저조차 훈련을 하면 비디오 촬영부터 스피드건 조작, 물리치료까지 1인 다역을 해야 해요. 저는 불편함에 익숙해 있지만 앞으로 선수들은 운동에만 전념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인터뷰가 끝나고 같이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는 이런 부탁을 하나 했다.

"우리 팀 선수들이 공을 아주 잘 던져요. 명색이 경남 대표로 전국체전에 뛰는 데 아직 연고지 프로야구팀인 NC에서 시구 한 번 안 불러주네요(하하). 기회가 되면 시구 초대해주세요. 안 그럼 제가 친구 (양)승관이한테 한 번 말해 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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