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아름다운 나눔] (7) 박지원 (주)위딘 부사장

박지원 ㈜위딘 부사장은 2013년 5월, 경남사회복지공동모금회에 1억 원 기부를 약정하면서 28번째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됐다. 남편 권동현 사장에 이어 동참해 부부회원 2호로도 이름을 올리며 눈길을 끌었다. 하지만 그녀는 "단지 작은 도움이 힘든 시기를 견디는 이웃에 에너지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라며 담담하게 이유를 밝혔다.

◇청소년기에 찾아온 혼란

박 부사장은 1965년 창원시 마산합포구 성호동에서 1녀 1남의 장녀로 태어났다. 비교적 부유하고 단란한 가정이었지만 부모님 이혼으로 그녀를 둘러싼 환경은 뒤바뀌기 시작했다.

"성호초, 성지여중, 마여고를 나왔어요. 중학교 때 부모님 이혼으로 갑자기 혼란이 찾아왔죠. 어머니하고 남동생이랑 지내게 됐어요. 어머니는 그때 화장품 방문판매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렸어요. 청소, 설거지, 빨래 등 살림을 제가 많이 챙길 수밖에 없었죠. 사춘기 반항심 탓에 비뚤어질 수도 있었지만 오히려 그때를 잘 견디면서 독립심을 키운 것 같아요."

가족들은 서로 도와가며 조금씩 적응해 갔고, 어머니는 부산에 조그마한 갈빗집을 개업하게 된다. 그녀 또한 부산으로 대학 진학을 한다. 하지만 모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남편 권동현 ㈜위딘 사장에 이어 지난 2013년 5월 28번째 경남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이 된 박지원 부사장./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부경대(당시 부산수산대) 무역학과에 입학했어요. 당시에도 경제적으로 여유롭지는 않았어요. 근로장학생으로 장학금을 받거나 과외수업, 방학이면 전자부품 조립회사에서 일을 해 학비와 생활비를 스스로 해결했어요. 닥치는 대로 아르바이트를 했죠."

그녀는 대학 졸업 후에도 공부를 계속했다. 정확히 말하면 대학원 1학년 때 결혼을 했고, 아이를 키우며 석사 학위를 받았다. 그녀의 인연 이야기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간다.

"마산여고 시절 불교학생회 활동을 하면서 남편을 알게 됐어요. 그러다가 남편이 제대하고 연락이 되면서 다시 만났죠. 대학 졸업하고 우리는 하나가 됐는데 저희 졸업 후에 학교도 하나가 됐어요. (웃음) 저는 부산수산대, 남편은 부산공업대를 졸업했는데 나중에 통합돼 부경대가 됐죠. 공교롭게도 저희는 같은 대학동문이 된 거죠." 그 사람이 바로 ㈜위딘 권동현(53) 대표다.

◇4년간 미국 시장 개척 주도

결혼할 당시 남편 권 대표는 수입 절삭공구 판매영업을 했다. 이후 권 대표는 기계를 들여와 다 쓴 외국산 절삭공구를 재가공해 판매하다 1988년께 직접 생산에 뛰어들었다. 1995년에는 함안군 칠원면으로 공장을 옮겨 지남기공이라는 이름으로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간다. 이때부터 박 부사장은 남편을 뒷받침하며 회사일을 돕는다.

"회사가 자리 잡기 전에는 과외, 학원강사를 해서 돈을 벌었어요. 칠원으로 가면서부터 회사 경리파트를 맡았죠. 그때 남편과 저 돈 때문에 잠을 못 이룬 밤이 얼마나 많았는지…. 돌아서면 월급 주고, 돌아서면 세금 내고, 또 기계 리스비용 지급하고…. 돈이라는 벽에 부딪혀 그만둬야 하나 했던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후 회사는 하나정공, 하나툴스를 거쳐 2007년 지금의 ㈜위딘으로 이름을 바꿨다. 2012년에는 지금의 창원시 팔룡동으로 회사를 확장 이전 했다. 성장 가도를 달리면서 국외시장 진출 필요성을 느낀 회사는 2006년 미국법인을 설립한다. 박 부사장은 법인장으로 미국에서 영업을 담당하게 된다.

"아들이 셋인데 당시 큰 애가 중학교 3학년이었고 둘은 초등학생이었어요. 고민 끝에 같이 미국으로 갔는데…. 영어도 제대로 안 되는 제가 회사일 챙기고, 학교에 나가 영어 배우고, 사업 챙기고…. 어휴∼ 여러 일을 한꺼번에 하려니 얼마나 버거웠던지…."

시장 개척은 생각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다.

"밤낮없는 노력 끝에 귀가 조금씩 뚫리면서 출장을 다니며 영업을 했는데…. 차를 타고 오가며 업체를 들러는 방식으로 수천 킬로미터를 강행군했죠. 처음에는 바쁘다고 만나주지 않는 곳도 많았어요. 그런데 우리 공구를 시험 사용해보고는 조금씩 태도가 달라지더라고요. 그렇게 쉼 없이 출장으로 미국과 캐나다를 누비면서 영역을 조금씩 확대해 나갔어요."

그녀는 4년간 미국에서 생활을 하며 영업망을 다져 놓고서 2010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지금도 부사장 겸 미국법인장 역할을 맡고 있다. 한국에 돌아온 그는 2012년부터는 박사과정을 공부, 최근 <해외 진출 환율 요인이 기업 성과에 미치는 영향> 논문으로 학위를 받았다.

◇기술 개발 하나로 승부

㈜위딘은 30년가량 각종 부품·금형 등을 가공하는 기초 설비인 초경절삭공구를 생산한 기업이다. 초경절삭공구는 절삭날 부분을 초경질 합금으로 만든 공구로 다이아몬드만큼 단단하고 열에 잘 견디는 것이 특징이다. 세부적으로는 홈을 깎고 측면 절삭하는 엔드밀, 재료에 구멍을 뚫은 드릴, 구멍의 내면을 다듬질하는 센터릴링 툴과 리머, 암나사를 만드는 탭과 초경 소재 등을 생산하고 있다.

㈜위딘은 기술개발에 총력을 기울이며 새로운 신화를 써가고 있다. 현격한 차이를 보였던 기술력은 지금 외국 유수의 기업과 어깨를 나란히 하면서 기업체 원가부담을 줄이는 데 이바지하고 있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위딘은 올해도 장비·시설, 기술개발에 250억 원을 투자할 예정이다.

현재 ㈜위딘은 창원 본사 외에도 대구 공장과 8개 지사를 두고 있으며 40여 개국에 제품을 수출하고 있다. 권동현 대표 혼자서 시작했던 사업이 박 부사장이 힘을 보태면서 30년 만에 직원 200여 명, 매출 300억 원에 육박한 기업으로 성장한 것이다.

◇베풀면 그 이상 돌아온다

그녀의 기부 결정은 남편의 적극적인 권유가 가장 큰 계기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신의 인생에서 손으로 꼽을 수 있는 잘한 선택 중 하나라고 당당하게 말한다.

"조금 무리다 싶어도 하고 나면 또 그만큼 채워지고 그런 거라 생각이 들어요. 미신을 믿지는 않지만 사실 기부를 하고 나서 모든 일이 잘되는 것 같아요. 물론 마음이 더 긍정적으로 변해 에너지가 생긴 덕이겠죠. 아무튼 돈이 나중에 더 모인다는 보장도 없고 또 모은 재산 가지고 저 세상 가는 건 아니잖아요. 그래서 결단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박 부사장은 이러한 에너지가 도움을 받는 사람에게도 전달돼 좌절하지 않고 고비를 넘기는 조그마한 힘이 되기를 기원했다.

"사실 되돌아보면 주위 도움 속에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이거든요. 또 어려울 때 누군가 조금만 도와주고 고통을 나누면 큰 힘이 되고요. 눈앞에 큰 산도 당장은 힘겹지만 지나고 보면 별것 아니잖아요. 요즘 사회 양극화 등으로 우리 사회에 힘들어하는 분들이 많잖아요. 어렵지만 힘을 내길 응원하고 또 서로 돕는 사회를 만들어 갔으면 해요."

박 부사장은 아들과 함께 한 달에 한두 번가량 창원 성심원을 찾아 봉사하는 '햇살가족 봉사단' 활동을 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그녀의 관심도 노인복지 쪽으로 기울고 있다. 박 부사장은 조금 더 여유가 된다면 노인복지시설, 실버타운 등을 설립·운영하고 싶다는 마음을 조심스럽게 밝혔다.

"기부를 하고 또 봉사활동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배웠어요. 그만큼 저 자신도 성장하고 또 시선이 넓어진 것이죠. 같이 봉사 다니는 아들도 긍정적인 영향을 많이 받는 것 같아요. 아직 설익은 생각이지만 지금부터 10∼20년 준비해서 노인복지시설을 설립할까 생각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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