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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김원봉 길러낸 힘' 민족교육에 있었다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22) 밀양지역 근대교육과 3·1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8월 04일 화요일

현재 흥행 가도를 달리는 영화 <암살> 속 김원봉(1898~1958) 선생은 신분을 확인하는 상해 임시정부 요인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밀양 신랑, 약산 김원봉이오." 밀양은 김원봉 외에도 항일독립운동 역사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인물들을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이 인물들 활약은 한반도는 물론 중국과 만주에 이름을 떨친 3·1운동, 의열투쟁과 함께 밀양 내 항일독립을 위한 문화, 사회, 학생운동 영역 등 항일독립운동 전반에 씨줄과 날줄로 엮여 있다. 이 때문에 밀양은 항일독립운동 심연이 깊은 지역이다. 김원봉과 같은 수많은 항일독립운동가를 낳은 밀양. 밀양이 이들과 함께 항일독립운동사 중심에 서게 된 이유는 뭘까.

◇밀양독립운동가 산실 동화학교 =경남 북동부에 자리한 밀양은 주로 산간지대를 이루고 있지만 남쪽으로는 낙동강과 밀양강 유역 광활한 하남평야와 상남평야를 가진 곡창지대다.

일본이 밀양을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은 1905년 경부선 철도 노선에 밀양을 포함한 데서 알 수 있다. 곡창지대임과 동시에 일본과 한반도의 관문인 부산과 가깝고 예부터 한양으로 향하던 영남대로 상에 있는 교통 요지인 점을 중요하게 본 것이다. 일본인들은 주로 밀양읍내와 삼랑진에 살며 자신들 권익옹호와 정치·경제침탈을 일삼았다.

<조선총독부통계년보>를 보면 1920년 밀양군 인구는 10만 9840명으로 이 중 조선인은 10만 7611명, 일본인 2209명이 살았다. 소수 일본인이 다수 조선인을 수탈하고 삶을 억압하는 데 따른 분노가 쌓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같은 사회경제적 상황에 앞서 밀양엔 일찍이 개화 인사들에 의해 근대학교가 설립됐다.

특히 전홍표 선생이 세운 동화학교(현 밀양시 내일동 477번지 밀양택시 자리)의 민족교육은 이 지역을 항일독립운동 중심으로 만들었다.

전 선생은 밀양 유림이 시서예악(詩書禮樂)을 강습하고 시국을 논하던 연계소(蓮桂所)를 중심으로 활동하며 한말 의병진을 구성해 거병을 준비하기도 했다. 전 선생은 대한제국 초기 군관청 자리에 동화학교를 세우고 일제강점기 학생들에게 국권 회복을 위한 항일투쟁 필요성을 가르쳤다.

학교에는 민족교육을 한다는 소식에 인근 지역에서 수많은 애국지사가 몰렸다. 이곳에서 전 선생 지도 아래 김원봉·윤세주·최수봉·김상윤 등 의열 투쟁에 앞장선 인물이 다수 배출됐다. 김원봉 선생 등은 밀양공립보통학교 등 일제 노예교육에 반대해 동화학교에 편입하기도 했다. 덕분에 동화학교는 한층 반일적인 분위기 속에 항일사상 심화와 항일투사 양성을 담보할 수 있었다. 이곳 학생들은 '연무단'이라는 비밀결사 조직도 결성하는 등 의열단 조직 기초를 닦았다. 밀양 3·1항일독립만세운동 지도자 상당수도 이곳 출신이었다.

◇밀양 항일독립 격전지 밀양상설시장 = 밀양지역 항일독립운동에서 가장 큰 장소성을 가진 곳을 들자면 현 '밀양전통시장'(밀양아리랑시장·밀양시 내일동 192, 583번지) 일대를 꼽을 수 있다. 일제강점기 이곳은 밀양장터와 밀양공립보통학교, 밀양공립보통학교 이전 후 밀양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밀양전통시장 일대에는 밀양장터·밀양공립보통학교·밀양경찰서가 자리하고 있었다. 사진은 밀양상설시장(아리랑시장) 입구 모습. /김두천 기자

1919년 3월 윤세주·윤치형 선생은 고종 장례식에 참석하려 서울에 갔다가 3·1운동에 참가하게 된다. 이들은 돌아와 전홍표 선생과 함께 밀양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한다. 특히 김병환·윤보은·김소지·지종관·박상오·정동찬·정동준·김상이 선생 등 동화학교, 밀양공립보통학교 졸업생들과 기독교인이 중심으로 만세시위를 계획했다. 3월 13일 밀양장날을 의거일로 삼은 이들은 위북산에서 밤을 새워 등사한 독립선언서와 태극기 수백 개를 품고 장터로 잠입한다. 오후 1시 30분 주요 인사들이 태극기를 펼쳐들자 군중 1000여 명이 모여들었다.

윤세주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사이 나머지 인사들은 재빨리 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군중에게 나눠줬다. 이들은 "대한독립만세"를 삼창한 뒤 '독립만세(獨立萬歲)'라 크게 쓴 깃발을 앞세우고 읍내거리를 누볐고 일부 군중은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들어가 종이 태극기 수십 매를 투입했다. 이들 군중은 부산에서 급파된 일본군 헌병과 수비대 총검에 물러섰지만 이날 시위는 이튿날 밀양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3·1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이어졌다. 이날 전교생 160명은 학교 직원들 저지를 뚫고 만세 소리에 호응하는 군중 200명과 합세해 비폭력 시위를 펼쳤다. 일본은 비폭력 시위였음에도 무자비한 탄압을 벌여 김병환·이장수·정동찬·박만수 선생 등 5명을 구속했다.

밀양공립보통학교는 동화학교와 마찬가지로 개화 인사인 손정현 선생이 세운 사립 민족학교였다. 일본은 이 학교를 계승해 밀양공립보통학교로 만들었는데 3·1항일독립만세운동 이후 돌연 학교를 삼문동으로 이전시키고 인근에 있던 동화학교를 폐쇄했다. 이는 이 학교 학생이 3·1독립만세운동에 대거 가담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때 이 운동 막후 역할을 한 전홍표 선생은 일본 경찰 체포를 피해 만주로 건너갔다. 일본은 밀양공립보통학교가 이전한 자리에 밀양경찰서를 세우는데 이곳은 이듬해 12월 동화학교를 졸업한 의열단원 최수봉 선생이 투탄의거를 한 역사 현장으로 다시금 기억된다.

밀양 동화학교 터.

◇종교를 가리지 않은 의거 = 밀양읍내에서 발현한 3·1항일독립운동은 각지로 퍼져 나갔다. 만해 한용운 선생 지시로 범어사 승려 대표 7명은 서울 만세운동에 참가하고서 귀향해 지역 시위운동을 주도한다. 통도사 승려 50명은 밀양 단장면 표충사에 모여 이곳 승려들과 비밀 회동을 하고 4월 4일 단장면 태룡리 장터(현 밀양시 단장면 태룡리 190번지) 장날에 맞춰 거사를 치르기로 결의한다. 태극기를 안고 온 장석준 선생 등 학생들은 승려들과 모여든 장꾼들에게 이를 나눠줬다. 낮 12시가 되자 이곳에 5000명이나 되는 사람이 모였다.

낮 12시 30분 주도 인물들이 '조선독립만세' 깃발을 들고 만세를 삼창하자 군중이 일제히 호응해 만세를 외쳤고, 이내 그곳 헌병주재소로 몰려갔다. 헌병 발포로 군중은 해산했으나 일부는 이튿날 수차례 주재소를 습격했다.

4월 6일에는 부북면 춘화리 김 씨들에 의해 춘화교회 3·1항일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이들은 일찍이 기독교를 받아들여 춘화교회(현 밀양시 부북면 396번지 춘화교회)를 세우고 경신학교와 일신학교를 세웠다. 마침 경신학교 교장 김내봉 선생이 일이 있어 평양에 갔다가 독립선언서를 입수해 돌아왔다. 이들은 항일독립만세운동을 논의하고 김성수 선생이 주동적 역할을 맡아 인근 각 마을로 연락해 농민 400~600명을 의거일에 맞춰 교회에 모이게 했다. 이날 낮 12시 시위 군중은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북과 징을 치고 나팔을 불며 마을을 행진했다. 이들은 의거와 동시에 주변 거주 일본인들에게 퇴거를 요구하기도 했다.

춘화교회 3·1운동 현장.

밀양문화원은 이 두 곳에 표지석을 세웠으나 태룡리는 시위장소와 동떨어진 곳에 세워 옮겨야 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춘화교회 앞 표지석은 인근에서 운동을 주도한 김성수 선생 집터 소개를 하지 않고 있어 이를 연계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독립운동가 김성수 생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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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