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심은 살아 움직이며 진화하는 생명체…잔혹동시 논란, 이 나라 언론의 무지 탓

두 달이 지났다. 이른바 '잔혹동시'로 명명된 초등 5학년생 동시집 <솔로 강아지> 논란이 최근 한국문단을 발칵 뒤집어놓은 신경숙 표절사태와 맞물려 다시 회자되고 있다. 언론의 힘(?)이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이 나라 일부 언론의 무지 때문이다. <한겨레21>은 지난 15일 기획기사를 통해 문제가 된 동시집을 출판사에서 모두 폐기한 탓에, 인터넷 중고책 거래 사이트에는 100만 원에 팔겠다는 사람도 나왔다고 편집자주로 달아놓고 잔혹한 시대를 건너는 어린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사회비판 문학이라고 주장한다. 같은 날 밤 방송된 SBS <영재 발굴단>에는 잔혹동시라고 불린 '학원 가기 싫은 날'을 쓴 이순영 양과 엄마인 김바다 씨의 인터뷰가 소개됐다.

정말 그럴까. 어린이의 글은 무조건 그 자체로 사회비판 문학일까? 그리고 잔혹동시를 쓴 이 양은 영재일까? '잔혹동시' 논란 두 달 뒤 언론이 바라보는 동심과 그 해석이 왠지 끔찍하지 않은가. 이들 언론에 따르면 아직도 '동심'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고, 동심의 승리는 핍진과 순진이며, 잔혹하고 야박한 건 어른의 '재단'이다. 그러니까 신경숙 표절 사태를 옹호하는 어느 평론가의 발언과 맥락을 같이해 '혐의에 비해 과도한 징벌의 여론재판'인 셈이 된다.

아동문학가 이오덕(1925∼2003)이 1975년 계간 <창작과 비평> 겨울호에 실은 평문 '동심의 승리'―'이윤복 일기 <저 하늘에도 슬픔이>에 나타난 동심론'을 인용해 시작되는 기사의 요지는 앞에서 언급했듯이 어린이의 글은 그 자체로 사회비판 문학이라는 것이다. 이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이오덕 동심론과 함께 인용한 또 다른 글은 소설가 조세희의 사진·산문집 <침묵의 뿌리>(1985). 널리 읽혔듯이 초등학생들의 일기가 많이 소개돼 있다.

강원도 정선군의 탄광 마을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솔직한 목소리가 담긴 이 일기들은 그곳 사북초등학교 교사이면서 동시를 쓰던 임길택에 의해 한 권의 책으로 엮이기도 했는데 기사에는 그 책에 실린 시 한 편을 소개하고 있다. "삼학년 때 밥을 안 싸가지고 갔기 때문에 배가 고파서 집으로 왔다. 집에 오니 밥이 없었다. 나는 배가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었다."(5학년 김상은) 그리고 당당하게 묻고 주장한다. 모두 초등학교 5학년 아이들이다. 이윤복이 그러하고 이순영이 그러하며, 인용한 시를 쓴 아이가 그러하다. 배가 고파 아무나 때리고 싶다는 마음과, 학원에 가기 싫어 '엄마'를 먹고 싶다는 마음이 다른 것인가. 매한가지 '뿔난 마음'이라고 말이다.

한 번 더 묻고 싶다. 정말 그럴까? 1970년대 집이 너무 가난해서 일을 해야 하는 아이가, 1980년대 탄광촌에 사는 가난한 아이가 배가 너무 고파서 아무나 때리고 싶은 마음과 이즈음 서울에 사는 아이가 학원하기 싫어서 "엄마를 씹어 먹어, 삶아 먹고 구워 먹어, 눈깔을 파먹는"('학원가기 싫은 날') 아이의 마음이 같은 것일까. 이오덕의 통찰처럼 불행한 시대를 견디는 어린이들의 정직한 시는 그대로 사회비판 문학이 된다고, 이윤복이 그러하고 이순영이 그러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문제는 동심이다. 동시라는 문학 장르가 요구하는 동심은 단순히 거울에 비친 세계의 문제가 아니라 '진화(進化)'의 문제다. 동심을 고여 있는 물이나 벽에 걸린 거울로 보고 그리는 것이 아니라 입체적 공간에서 살아 움직이는 생명체로 해석해야 한다는 뜻이다. 언론의 주장처럼 아직도 '동심'은 발견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아동문학의 상투성은 동심이 진화한다는 지극히 상식적인 일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두 달 전 논란 당시 잔혹동시를 옹호한 진중권의 말처럼 "어린이들은 천진난만하지 않다. 내가 해봐서 아는데, 더럽고 치사하고 때로는 잔인하기까지 하다." 그리고 "그 더러움/치사함/잔인함의 절반은 타고난 동물성에서 비롯되고, 나머지 절반은 후천적으로 애미/애비한테 배운 것"이라는 말이 적확한 건지 모른다. 그렇다고 논란이 된 잔혹동시가 뿔난 동심이 빚어낸 문학, 그것도 사회비판 문학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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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어린이문학은 어른이 아이한테 베푸는 선물이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아이들을 응원하는 마음, 이 마음이 곧 어린이문학의 출발점이며 어린이문학은 어른에게도 아름다운 선물인 것이다. 그러니까 결론은 이렇다. 이건 뭐, 동심이 무슨 옥수수수염차도 아니고 정말 잔혹하고 야박한 건 어른의 '재단'이 아니라 언론의 무지이며, 뿔난 동심이 아니라 동심에 인조수염을 달려고 하는 이 무지 때문에 이 나라의 미래가 심히 걱정스럽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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