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기고]유윤임(김해 장유고 2)

광주와 전남 담양으로 문학기행을 간단다. 문학보다도, 실은 전라도를 한번 가보고 싶었다. '지평선이 끝없이 펼쳐진다'는 문구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문구를 새삼 확인해 보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처음 간 곳은 광주였다. 버스를 타고 가면서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저희들을 잊지 말아 주세요'라는 외침이, 1980년 5월 그날 새벽 골목에 울렸을까? 영화 속 군인의 상기된 표정이 떠오른다. 사람을 때리며, 점점 희열이 가득한 얼굴.

광주는 평화로워 보였다. 하지만 그곳엔 아픈 기억이 있었다. 그리고 그 기억을 온전히 기억하고 알리려는 사람들이 있다. 그 기억이 비록 다시 난도질을 당하더라도, 5월 18일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그들은 거기에 있었다. 광주에 있는 5·18 자유공원에는 군복을 입은 사람들이 있었다. 고문현장을 재현하려 했는데, 교복을 입은 어린 학생들이 있어서 차마 그렇게 못 하겠다고 했다.

광주 5·18 자유공원 법정. /장유고

5·18의 정당성을 찾는다는 그들의 말 속에서 '나는 평화롭게 살고 있는데, 그들은 그렇지 못하구나'라고 느꼈다. 그들은 아픈 기억 속에서 계속 상처 입고, 그러면서도 그 상처를 이겨내고 있었다. 끊임없는 그 싸움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나는 미안해졌다. 또, 생각했다. 왜 5·18은 일어났을까? 국가가 아니라 국가를 이루는 '개인'의 욕망 때문이 아닐까? 사람의 생명을 자신의 '욕망'의 제물로 바친 그는 과연 인간일까?

나는 누군가의 고통에 무감하지 않게, 사람의 마음을 볼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의 기억을 떠올려 이 세상에 다시는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살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역시 광주에 있는 용아 박용철 시인의 생가에 갔다. 1930년대 만든 순수시 전문지 <시문학>의 발행인으로 시문학파 운동을 주도했단다. 문학교과서에 나오는 시 '오월'을 쓴 김영랑이 바로 시문학파였다. 문학교과서 속에서 보던 단어를 실제로 듣자 드디어 '문학기행'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박용철 생가로 들어가는 쪽문, 거기서 얼핏 보이는 정원이 멋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노란 꽃이 쪽문으로 어른거렸다.

광주 용아 박용철 시인 생가. /장유고

담양 가사문학관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죽도리(대나무) 선생님이다. 이름을 듣는 순간 모두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현대시가 서양과 외세의 영향으로 인해 짧다고 말했다. 나는 전통과 문학성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 나라 고유의 형식을 지키면서, 세계적으로 보편적인 문학성을 얻기, 그리고 그렇게 만든 형식은 현대와 어울릴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다.

다음 목적지는 소쇄원이었다. 대나무 숲이 울창했다. 푸른 하늘 위로 뻗은 녹색 기둥들이 마치 편지지 같다고 생각했다. 흙담 돌들에 이끼가 끼어 있었다. 그것은 마치 '나는 아주 오랜 시간을 지나왔단다'라고 말하는 듯했다. 소쇄원 정자 뒤편으로 길이 있었다. 산 너머로 가는 그 길을 누군가는 걸었을 것이다. 그 길의 끝을 상상해봤다. 계곡이 있었는데, 가물어서 그런지, 아니면 원래 그런지, 물이 얕게 흐르고 있었다. 정자에 앉아 계곡에 비가 내리는 것을 상상했다. 대나무 이파리에 흐르는 물방울을 그려봤다. 이런 곳에서 글을 읽고 시를 쓰던 사람들은 분명 행복했을 거다. 나는 그곳에서 낮잠을 실컷 자고 싶었다.

버스를 타고 다음 장소로 가면서 구름 사이로 노을이 비치는 것을 보았다. 그걸 보며 화덕과 모닥불을 떠올렸다. 구름이 화덕이고, 그 사이에서 노을이 조용히 모닥불처럼 타오르는 것을 상상했다. 담양에 있는 또 다른 정자, 송강정에서도 하늘을 봤다. 소나무 가지 사이로 달이 떠 있었다. 초승달이었다.

이번 문학기행에서 나는 많은 풍경을 보았다. 그리고 그 풍경 속에서 살았던 사람들을 또 생각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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