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소농을 찾아서] (96) 산청 시천면 풀꽃누리 박영진·김옥순 부부

'물들이는 집, 풀꽃누리는 자연 그대로의 빛깔을 살려냅니다. 풀꽃들이 산과 들을 아름답게 하듯이 그 빛깔로 우리는 사람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고 합니다. (중략) 천연염색은 흰빛에서 시작해서 고운 빛깔에 물들고 세월 따라 빛깔은 햇살과 바람에 바래고, 다시 흰빛의 순수로 되돌아가는 자연의 순환을 받아들이는 일. 그것은 모든 생명체들의 삶을 따라 사는 유쾌한 여정입니다.…'

산청군 시천면 남명로길에서 박영진(44)·김옥순(45) 부부가 어머니 김순옥(70) 씨와 함께 자연염색을 추구하며 운영하는 '풀꽃누리'를 소개한 글이다. 짧은 글이지만 이들의 삶을 보여주는 것 같다.

◇청출어람(靑出於藍) 하나 - 쪽에서 우러난 물감, 쪽빛보다 더 푸르다

인사를 나누자 대뜸 낫을 챙겨들고 박 사장이 집 앞 밭으로 이끈다. "자연염색이 어떤 것인지 보여드리는 것이 풀꽃누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겁니다. 간단한 천연염색 과정을 한 번 경험해 보시죠. 이게 바로 '쪽'입니다. 이 쪽으로 물들이면 파란 하늘을 닮은 맑고 아름다운 색깔이 나옵니다." 박 사장은 싱싱하게 자란 쪽을 낫으로 베어 광주리에 한가득 담는다.

"자 이제 본격적으로 준비작업을 해 볼까요? 수온이 20도를 넘으면 쪽물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항상 얼음을 얼려 두었다가 물에 넣어 차갑게 식힙니다." 그러고는 박 사장이 줄기를 제거한 쪽을 대야에 담가 빨래판을 놓고 비비기 시작한다. 쪽물을 만드는 과정이란다. 그런데 이 작업을 왜 힘들게 손으로 할까? 궁금증이 발동한다.

"흔히 믹서로 갈면 안 되냐고 묻습니다. 그런데 기계로 갈면 열이 발생해 쪽물이 잘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힘들어도 손으로 비비고 치대는 작업을 합니다." 그렇게 한참 쪽을 치댄 박 사장은 아내 김옥순 씨가 받친 체에 쪽물을 부어 건더기와 불순물 등을 건져낸다. 부부의 손길이 바빠진다. 흰색 옷감이 쪽물 대야에 들어가기를 서너 차례 반복하자 고운 빛깔이 드러난다. 부부가 집 앞마당 건조장에 쪽물들인 실크를 펼치자 지리산 하늘 아래 하늘을 닮은 쪽빛의 옷감이 펼쳐졌다.

염색한 천을 말리기 위해 널고 있는 박영진(오른쪽)·김옥순 부부. /김구연 기자 sajun@idomin.com

◇"손으로 하는 천연염색, 돈 버는 직업 아냐"

"쪽을 발효시켜 염색도 하는데 그렇게 하려면 재료 숙성과정 등 1년이라는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야 해 만만한 작업이 아닙니다." 박 사장이 천연염색의 힘든 과정을 넌지시 이야기한다.

풀꽃누리가 자리한 시천면 낮은 언덕배기는 염색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자리였다. 온종일 햇볕이 드는 탁 트인 공간, 안채를 비롯해 작업장과 건조마당, 쪽 밭 등 700평쯤 된다고 했다. 이곳에서 부부는 침구류와 의류, 소품 등을 만들어 판매하고 또 서울 등지에 납품한다. 침구류는 어머니 김 씨가 직접 만들고, 한복과 생활복은 다른 곳에 맡기며, 소품들은 박 씨 부부가 직접 만든단다.

"돈을 벌기 위한 직업으로는 이 일이 마땅하지 않습니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시스템이 아니니까요." 다소 황당한 이야기였다. 직업으로 마땅하지 않다니…. 그러나 쪽물을 들이면서 흘리던 박 사장의 굵은 땀방울을 떠올리니 힘든 직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수익은 어느 정도일까?

"연간 매출로 3억 원 정도, 순수익으로는 절반쯤 됩니다. 하지만 1억 5000만 원엔 우리 부부와 어머니 노동력까지 포함돼 있습니다. 교육사업 수익도 포함됐고요. 자연염색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1년 과정으로 신청합니다."

박영진(오른쪽) 씨와 김옥순 씨가 옷감을 쪽물 대야에 넣고 있다. /김구연 기자

◇청출어람 둘 - 스승 뛰어넘은 제자

거창이 고향인 박 사장은 97년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병원 임상병리과에서 시작했다. 그런데 환경운동을 해왔던 어머니는 막내아들이 병원 일을 오래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퇴사를 종용했단다. 결국 어머니 뜻에 따라 1년 반만에 병원 생활을 접고 99년 천연염색에 뛰어들었다.

"환경운동을 할 때 서대구 염색 공단에 갔었습니다. 그런데 공장에서 어떤 생명도 살 수 없는 폐수를 그냥 내보내더군요. 이후 내 삶이 많이 바뀌었습니다. '내 옷부터 화학염색 안 한 것으로 입어야겠다'라는 생각을 했죠." 어머니 김 씨가 말을 보탠다.

어머니 뜻에 따라 직업을 바꾼 박 사장이지만 천연염색에 소질이 있었다. 어머니는 "아들이 색감에는 천재라고 생각합니다. 이 일을 물려주면서 이걸로 돈을 많이 벌기는 어려울 것이니 남들 따라하지 말고 창조해야 한다고 강조했죠. 그런데 아들이 생각지도 못한 것을 창조했습니다." 청출어람이었다.

박 사장은 처음 자연염색으로 낼 색이 없어 고민을 많이 했다. 고작 황토나 숯, 검은색 외에 색깔을 낼 게 없어 고문헌을 공부했다. "백반으로 만들었다는 기록이 있어 약국에 갔더니 백반도 화학약품으로 만든 것이었죠. 그런데 공부를 하니 백반 대신 동백나무를 활용한 게 있더군요. 그래서 동백나무를 쓰고, 또 콩대 태운 잿물을 활용하고, 매실식초도 활용하고…. 이젠 못 내는 색깔이 없습니다. 산에서 나는 모든 것이 염료죠."

◇가족 사랑으로 견디어 낸 어려운 시절 천연염색

박 사장이 산청에 온 계기는 뭘까? 이 궁금증도 어머니가 들려줬다.

"거창 시장에서 일을 하다 보증을 잘못 서 알거지가 됐습니다. 아이들 공부시키려고 시장 구석 집을 빌려 김밥집을 차렸습니다. 김밥집은 애들에게 밥이라도 쉽게 먹이기 위해서였죠." 그런데 너무 치열하게 살다 보니 체력이 완전히 소진됐단다. 결국 일을 접고 이사를 했다. 19층 아파트였는데 흔들리는 느낌에 잠을 못 잤다고 했다. 그때 지인 중 염색일을 하던 사람이 산청에 집이 있으니 와서 좀 쉬라고 했단다. 그곳이 성철 스님 생가가 있는 단성 겁외사 근처였고, 틈틈이 염색을 해 주위 사람과 나누기도 했단다.

박 사장은 어머니와 겁외사 앞에 장소를 빌려 염색일을 시작했다. 하지만 규모가 작은데다 납품처도 없어 일정한 수입이 나오지 않았단다. 가정을 이루고 아이도 태어났는데 생활이 불안정하니 가장으로서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몸이 많이 아팠습니다. 몸도 피로했지만 심리적으로도 감당이 안 됐습니다. 하루는 운전을 하던 중 쓰러졌는데 깨어나 보니 병원이더군요. 다행히 중학교 동창이자 제 아내 덕분에 힘든 시절을 잘 견뎌냈고, 2009년 12월 시천으로 터전을 옮겨 이젠 마음의 풍요를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천연염색 대중에게 알리는 교육사업 할 것"

박 사장은 시천으로 온 이후 세상에 나갈 수 있게 됐다고 말한다. "10여 년 전만 해도 사람들을 만나기 두려웠습니다. 염색에 대한 자신감이 없었기 때문이었죠. 그런데 이곳에서 6년 동안 배우고 경험하면서 이제 다른 사람에게 내 기술을 보여줄 수 있는 수준까지 왔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박 사장은 앞으로 천연염색을 주변 사람들에게 많이 알리는 교육에 치중하고 싶다고 했다. 편리함에 물들어 손쉬운 화학염료만 찾는 세태가 안타깝다는 것이다. "염색하는 곳을 찾아 배우려 가 보면 화학약품을 사용하는 곳뿐이었습니다. 문제는 화학약품으로 된 매염제를 더 많이 사용하는 추세라는 것입니다. 심지어 빨간색 옷감을 다시 화학약품이 든 염료에 담갔다가 자연염색이라고 할 정도이니 안타깝죠."

다행히 이젠 소비자들이 문제를 인식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기과정으로 천연염색을 배우려는 사람들이 먼 곳에서도 찾아오고 있단다. 박 사장은 천연염색을 하는 사람들이 주변에 많이 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함께하는 사람이 많다면 천연염색 가치를 대중에게 더 많이, 쉽게 알리지 않겠느냐는 것이다.

<추천이유>

◇경남도농업기술원 강소농지원단 농산물가공전문가 이영미 = 풀꽃누리 박영진 대표는 천혜의 자연환경을 갖춘 지리산 자락에서 한방 약초를 이용한 전통염색과 자연식(食) 체험을 하는 진정한 농업인입니다. 천연염색에 관한 다양한 공부와 기술을 습득해 직접 재배한 '쪽'과 지리산에서 자생하는 다양한 산야초를 이용한 전통 천연염색을 실천하면서 사람과 자연을 생각한 천연매염제를 사용하는 것이 특징입니다. 특히 산청한의학박물관에 '풀꽃누리 뮤지엄숍' 운영으로 전국에 알리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한방약초 전통염색 일인자로 쉴새 없이 열심히 노력하는 강소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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