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 간다] (12) 함양 상림숲

오후 햇살이 촘촘하게 하늘로 뻗은 가지와 잎을 뚫지 못했다. 매미 울음과 새소리가 이따금 적막을 깨지만 숲 깊숙이 들어갈수록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함양 상림숲은 '천 년의 숲'이라고 불리는 그대로, 세월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낙엽관목 40종을 포함해 나무 116종이 1.6㎞ 둑을 따라 조성되어 있는 상림. 신라 말 고운 최치원(857~925)이 함양태수를 지내며 조성한 인공 숲이란다.

최치원은 해마다 범람하는 위천의 물길을 돌려 둑을 쌓고 나무를 심었다. 물줄기는 80~200m 폭으로 심긴 나무뿌리를 촉촉하게 적셨고, 천 년 동안 피고 지고 다시 피어난 잎은 거대한 나무 터널을 만들었다.

'천년의 숲'이라고 불리는 함양 상림숲. 낙엽관목 40종을 포함에 나무 116종이 1.6㎞ 둑을 따라 조성돼 있다.

태풍이 지나간 습한 날씨 탓에 상림의 녹음이 더 짙다.

오래전에 버스가 다녔다는 길은 현재 산책로로 쓰인다. 끝없이 이어지는 호젓한 길에서 한 아주머니가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다. 그 앞을 조심스레 지나다 순간 한 남성이 달리며 일으킨 무거운 바람에 놀란다.

평일 고요한 숲은 주말이 되면 천 년의 기운을 받으려는 이들로 넘쳐난다.

천연기념물 제154호로 지정된 상림은 문화해설사가 있을 만큼 전설이 많다.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관광 안내를 받을 수 있다.

위천이 넘쳐 농토와 가옥이 유실되고 군민의 생활이 궁핍해짐을 안타깝게 여긴 최치원의 업적을 기린 '문창후 최선생 신도비'가 있고, 고종황제 46년(1906) 경남 유림이 최치원 선생을 추모하려고 세운 사운정이 자태를 뽐낸다. 역사인물공원을 알리는 비석이 보인다. 왼쪽 좁은 길에 들어서니 넓은 잔디밭에 흉상 열한 개가 놓여 있다. 최치원, 김종직(1431~1492), 박지원(1737~1905)이 보인다.

상림을 거닐다 보면 닿는 사운정.

얼마 후 상림에서 나왔다.

물길을 따라 걸으니 색다른 풍경과 마주한다.

연리목이다. 나무 앞에서 부부가 서로 손을 꼭 잡고 기도하면 애정이 더욱 두터워지고 소원을 성취할 수 있단다. 바로 옆에는 운동기구에 몸을 맡긴 어르신이 많다. 직접 수확한 복숭아와 고구마 줄기를 팔러 나온 할머니와 아이스크림과 시원한 커피를 파는 상인이 수줍게 호객 행위를 한다.

소금쟁이와 까만 물잠자리가 많은 개울에서 잡초를 맨 아주머니들이 장화를 씻고 있다. 어디서 잡초를 맸나 싶어 따라가 보니 연꽃이 장관을 이룬다. 6만 6000㎡(2만 평)에 달하는 연꽃단지에 백련, 홍련, 분홍련이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있다.

상림에서 한동안 시간을 보냈더니 연꽃단지를 둘러볼 엄두가 안 난다. 상림 뒤로 조성된 연밭 또한 규모가 엄청나다.

입구에서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연꽃 위에 바로 내리쬐는 햇살에 눈이 부시다. 그 위로 잠자리가 맴맴 노닌다. 상림에서는 보이지 않던 놈들이다. 새끼 원앙이 연꽃단지를 이리저리 휘젓는다. 개구리밥처럼 생긴 아주 작은 잎이 나뉘며 새로운 물결이 인다. 연꽃 줄기마다 우렁이가 산란한 분홍색 알도 보인다.

함양은 '울고 왔다 울고 가는 곳'이라고 한다. 지리산 골짜기에 울며 유배왔다 인심 좋은 곳을 떠나니 서운해 다시 운다고 한다.

가야와 신라의 국경지대, 신라와 백제의 경계지점이었던 함양은 이렇다 할 유물도 유적지도 없는 곳이다.

그저 군민과 천 년의 세월을 함께한 상림이 이들을 감싸 안았으리라.

상림 옆에 조성된 연꽃단지.

군수의 지혜와 마을 사람들이 빚어낸 울창한 숲이 오늘날 함양을 알린다.

그렇다고 고즈넉한 분위기만 떠올려선 안 된다. 상림 입구는 전국 관광객을 맞을 준비로 공사가 한창이다. 유명 프랜차이즈 카페가 들어서 있고 조만간 연꽃단지 뒤로 놀이공원이 있는 관광단지가 개발된단다.

늦은 오후 교복 입은 학생들이 상림 옆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우르르 쏟아져나온다.

숲 옆 미술관이다. 아니 미술관 옆 천 년의 숲이라니.

'조화와 모색전'에 내걸린 겨울 그림이 후텁지근한 공기를 바꾼다.

오늘은 여름날 녹음과 연꽃을 봤으니 가을엔 30만 구가 판다는 꽃무릇을, 겨울에는 설경을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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