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장열전] (28) 창녕군청 정구부 김용국 감독

정구는 테니스보다 덜 알려진 종목이다.

테니스보다 작은 라켓과 물렁물렁한 공을 사용하는 정구는 테니스와 비슷한 규정을 적용한다. 하지만 테니스의 세부종목이라는 점 때문에 항상 코트에서는 테니스에 밀려 2인자 신세다.

그렇지만, 국제 대회 성적만 놓고 보면 정구는 절대 테니스에 뒤지지 않는다. 지난해 인천에서 열린 아시안게임에서 정구는 2002 부산 대회 이후 12년 만에 7개 전 종목 석권의 위업을 달성했다.

경남에도 창단 14년째를 맞은 정구팀이 있다. 바로 창녕군청이다.

창녕군은 비인기 종목인 정구부를 지난 2001년 11월 창단해 14년째 유지해오고 있다.

타 지자체에서 예산절감을 이유로 있던 팀도 없애려고 할 때 창녕군청 정구부는 꿋꿋이 명맥을 유지해오고 있다.

초대 감독으로 창단 때부터 창녕군청 팀을 이끄는 김용국(46) 감독을 만났다.

김 감독은 창녕에서 나고 자란 '창녕토박이'다. 물론 좁은 지역에서 14년째 감독생활을 유지하는 데는 지역 사정을 잘 아는 장점도 있지만, 그의 롱런은 묵묵하게 14년을 헌신한 결과다.

김용국 창녕군청 정구부 감독은 "선수들이 최고의 시설과 훈련 환경에 걸맞은 행동과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구연 기자 sajin@idomin.com

김 감독의 정구 인생은 화려하지 않다. 태극마크는 본 적도 없고, 선수 때도 그다지 주목받는 선수는 아니었다.

"남들과 비슷하죠. 어렵던 시절 운동부에 가면 라면이나 우유 등 간식을 많이 줬잖아요. 그래서 정구부 가입원서를 적어 감독님께 덜컥 내밀었죠."

김 감독은 창녕초 6년 때 처음 정구 라켓을 잡았다. 또래보다 운동신경이 남달라 운동에 대한 권유가 많았던 데다 정구부에서 풍겨오는 간식 냄새가 그를 정구 코트로 이끌었다.

그는 "당시에 공부를 곧잘했다. 집에서는 당연히 반대가 심했고 그래서 부모님께는 당분간 운동한다는 걸 숨기고 학교를 마치면 정구라켓을 잡는 이중생활을 한동안 했다"고 말했다.

이후 창녕중에서 본격적인 선수생활에 돌입한 그는 전국 대회 4강권에 들 만큼 실력도 인정받았다.

그가 졸업할 즈음 창녕제일고가 정구부를 창단한다고 해 입학을 했지만, 본격적인 운동을 하기에 어려움이 많아 당시 정구 명문이던 진주고로 전학을 갔다.

고교 시절 그는 당시만 해도 만연하던 학교운동부의 폭력문화에 쉽게 적응을 하지 못했다. 운동도 힘들었지만, 그를 더욱 힘들게 했던 건 선배들의 폭력과 폭언이었다.

그는 "버스에 제대로 앉지도 못할 정도로 엉덩이를 맞은 적도 많았다. 운동을 그만둘 생각도 몇 번이고 했지만 '그래도 대학을 나와야 장가라도 가질 않겠느냐'는 아버지의 말씀이 귓전을 맴돌아 대학 진학 때까지 꾹 참고 견뎠다"고 했다.

정구 특기생으로 충북대에 진학했지만 그는 더는 운동선수로서 삶을 이어갈 생각이 없었다. 대학 2학년을 마치고 도피하듯 군대를 택했고, 그 길로 정구와 인연은 끊어졌다.

대학 당시 그의 전공은 체육이 아닌 화학공학과였던 탓에 진로 찾기도 쉽지 않았다.

무작정 짐을 싸서 고향인 창녕으로 내려온 그는 아버지가 하던 장사를 물려받아 한동안 돈을 버는 데 집중했다.

'창녕토박이' 김 감독은 14년째 감독생활을 이어오고 있다. 그의 롱런은 묵묵히 맡은 일에 헌신한 결과이다.

이후 창녕군체육회에서 근무하던 그에게 1999년 새로운 제의가 들어왔다. 군과 군체육회에서는 도민체전에 출전해 군부에서 유일하게 좋은 성적을 내던 정구를 제대로 한 번 키워보자고 그에게 팀 창단을 제안했다.

한동안 정구계를 떠난 그는 백방으로 수소문해 선수 6명을 긁어 모았다.

정작 팀 창단 준비를 끝냈지만 창단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군의회에서 운동부 창단에 대해 회의적인 반응을 보여 예산 확보에 실패했다.

"하늘이 노랬죠. 선수들은 데려왔는데 급여가 나오지 않으니 사비를 털어 1년간 선수들을 먹이고 재웠죠. 안면이 있는 식당에서 선수들을 먹였는데 밥값만 1000만 원이 넘게 나왔더랬죠."

창녕군의회는 2001년 추경 예산을 통해 직장운동부 창단을 승인했고, 결국 그해 11월 정식으로 팀이 창단했다.

신생팀 핸디캡에다 얇은 선수층에도 김 감독과 선수들은 의기투합했고 지금의 창녕군청을 만들어냈다. 창녕군청은 지난 2010년 국무총리기와 실업연맹전 등 2관왕을 차지할 정도로 남자실업 정구의 강팀으로 성장했다.

지금도 창녕군청은 달성군청, 문경시청, 이천시청 등과 함께 국내 남자정구의 4강으로 손꼽히고 있다.

창녕군청은 개인 실력보다는 팀워크 위주의 팀이다.

팀 구성도 일류가 아닌 다른 팀에서 방출됐거나 아픔을 간직한 선수들이 많다.

그래서 그는 스파르타식의 강도 높은 훈련보다는 선수들에게 '자율'을 강조한다.

김 감독은 "우리 팀 선수들은 훈련할 때 서로 격려하는 목소리를 많이 낸다. 기존 선수와 새 얼굴 간의 화합 구도가 잡히면서 자연스럽게 분위기도 좋아졌다"고 말했다.

하지만, 자율에 따르는 책임은 선수 몫이다.

그는 "우리 팀은 어느 팀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최고의 시설과 훈련 환경, 좋은 분위기를 갖추고 있다"면서 "선수들도 걸맞은 행동과 자세를 보여줘야 한다"고 책임감을 강조했다.

김 감독 스스로 군림하는 위치가 아닌 자세를 낮추다 보니 선수들도 팀에 헌신할 수밖에 없다.

창녕에서 나고 자란 때문인지 김 감독은 고향 팀에 대한 자부심이 누구보다 강하다.

그는 스스럼없이 '올림픽 메달보다 전국체전' 우승이 간절하다고 말할 정도다.

김 감독은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꼭 해보고 싶은 것이 바로 전국체전 우승이다. 결승에 올라 아쉽게 준우승을 차지한 적이 있어 체전 우승에 대한 갈망이 강하다"면서 "전국체전에서 선수들이 금메달을 따면 올림픽 금메달 못지않게 기쁠 것 같다"고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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