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9) 합천지역 항일독립운동

경남 서북부에 위치한 합천군.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합천·초계·삼가 세 지역이 통합돼 합천군이 됐다.

경남의 정신적 뿌리라 여겨지는 남명 조식(1501~1572) 선생이 합천 삼가와 깊은 인연이 있다. 남명 선생이 태어나고(외토리) 부모상을 치르고(하판리) 학문을 완성하면서 13년(1548~1561) 동안 제자를 가르친 고을이 이곳이다.

1919년 삼가장터에서 두 차례 일어난 만세 시위에는 3만이 넘는 사람이 참여했다. 1907년 군대 해산으로 일어난 정미의병에도 삼가 사람들이 적극 가담한 역사가 있다. 삼가가 큰 고을이 아님에도 의거에 많이 나선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 이곳이 교통 요충인 원인이 있으나 경(敬)·의(義)로 실천을 강조한 남명의 가르침이 시대를 뛰어넘어 발현한 덕도 있다.

◇"생명이 있는 한 끝까지 싸우겠다" = 옛 합천군청 자리던 지금의 합천읍사무소. 이곳은 일본 강압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한 한말 의병의 피 끓는 한이 서린 곳이다

합천군 덕곡면 독산동 출신 의병장 김판용 선생은 의병 40여 명과 함께 1908년 4월 8일 합천우체국과 군청을 습격해 일본인 우체국장을 저격, 큰 부상을 입히는 등 일본 군경에 타격을 가했다. 이들 의병은 우체국과 군청을 습격한 후 서쪽으로 도주했는데 총성을 듣고 뒤따르던 일본군 총에 의병 1명이 맞아 쓰러졌다. 일본군은 신음하던 의병의 목을 칼로 쳐서 숨통을 끊었다. 의병들 중 절반은 산을 넘어 도피했으나 절반은 읍내에 남아 거세게 저항했다. 이들 중 2명은 일시후퇴하려다 일본군을 만나 저항했으나 약 100m 거리에서 총탄을 맞았다. 이 중 1명은 일본인 우체국 사무원 칼에 목숨을 잃었고 남은 1명은 "생명이 있는 한 끝까지 싸워 복수하겠다"는 말을 남기고 도망했다. 그러나 그는 읍내 야학교에서 왼쪽 팔과 오른쪽 복부에 총상을 입은 채 일본군에 잡혀 심문을 당하다 고개를 떨구었다. 이로써 김판용 의병장을 비롯한 의병 3명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고 만다.

▲ 대규모 항일 만세운동이 일어났던 삼가장터 일대./김구연 기자

◇전국 최대 3만 군중이 외친 대한독립만세 = 합천 삼가장터. 쌍백면 장전리 멱실에서 시작한 양천이 휘감아 도는 수운에 합천 남단 관문으로 2개 군 4개 면이 인접한 교통 요충인 이곳은 예부터 사람이 들끓었다. 닷새에 한 번 장이 서면 일대 쌍백·가회·가화는 물론이고 합천읍, 진주, 의령, 산청에서 모여든 장꾼들로 시끌벅적했다. 해방 후 1960~70년대에도 명절 때면 서부경남 각지에서 이곳으로 장을 보러 올 만큼 물산이 풍부한 큰 장이었다. 그만큼 세상 돌아가는 소식 전파가 빠른 곳이기도 했다.

이 덕에 1919년 3월 18일 이곳 삼가장터에서도 대규모 항일독립만세운동이 펼쳐진다. 당시 서울에 있던 정현상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나자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와 첫째 형인 정현하 선생에게 전한다. 이기복 선생도 이원영 선생으로부터 독립선언서를 구해 삼가로 왔다. 이들은 비밀리 면내 유지들을 규합해 의거에 나선다.

약속한 3월 18일. 이곳에 인파가 몰려들자 정연표 선생이 태극기를 높이 들고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시위를 전개했다. 이윽고 경찰관 주재소를 포위하자 합천경찰서 경찰들이 재향군인들을 함께 데리고 와 주재소 경찰들과 힘을 합쳐 주도인물 정연표 선생 등 수십 명을 검거하고 군중을 강제 해산했다.

면민들은 가만히 있지 않았다. 5일 뒤인 3월 23일 삼가·쌍백·가회·가화면 등 인근 일대 면연합시위가 펼쳐졌다. 윤규현 선생은 친구 한필동 선생 등과 함께 면내 각 동리 대중 동원을 준비했다. 이들 주도 인물은 비밀리에 가회·쌍백·삼가면 등 각 면 주민들을 거사일에 맞춰 삼가장터로 모이도록 했다. 이날 쌍백면에서는 군중 4000여 명이 봉기해 면사무소를 불태우고 장터로 몰려왔다. 이후 가회·생비량 등 인근 면에서 몰려 온 군중이 3만 명(일본 경찰 추산 1만 명)에 이르렀다. 이들은 오후 3시 정금당(正衿堂) 앞 광장에서 일본 규탄 성토대회를 했다.

이때 일본 경찰이 군중을 포위한 후 발포하자 흥분한 시위대는 주재소 앞으로 몰려갔고 경찰은 다시 발포를 일삼았다. 이 과정에서 42명(일본 자료 13명)이 순국하고 100여 명(일본 자료 30명)이 부상을 당했다. 검거된 주도 인물 등 38명은 길게는 3년, 짧게는 6개월 이상 형을 선고받아 모두 진주감옥에 투옥됐다.

전국 최대 규모 3·1항일독립만세운동으로 기억되는 만큼 2005년 장터 초입에 들어선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은 멋지면서도 씩씩하다.

2005년 세워진 삼가장터 3·1만세운동기념탑./김구연 기자

◇유림, 불교, 민초 할 것 없는 독립 열망 = 삼가에서 솟구친 항일독립에의 들불은 합천과 초계 멀리 해인사에까지 이어졌다.

1919년 3월 19일 합천장터. 합천면 장날이던 이날 오후 4시 장터에 모인 500여 명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군경은 폭력 진압을 일삼으며 17명을 검거해 가뒀다.

이튿날인 3월 20일 전날 일본 경찰에 잡혀간 17명의 석방을 요구하고자 다시 모인 시위대는 합천읍내 행진을 벌였다. 이들 500여 명은 합천경찰서 앞에 도착해 심맹권 선생 등 17명 석방을 요구하는 만세시위를 했다. 경찰은 이에 총을 쏴 이 자리에서 4명이 순국하고 11명이 부상을 당했다.

지금은 하나로마트 합천축협 판매장이 자리한 이곳에는 주차를 겸한 너른 터가 형성돼 있다. 기억을 위한 표지석이나 안내문을 세우기 좋으나 아직 계획이 없는 것으로 알려진다.

전국적인 의거에 초계장터에서도 3월 21일 장날에 맞춰 항일독립만세운동이 펼쳐졌다. 초계면 무릉리 유지 이원화·전하선·성만영·김덕명 선생, 대평리 노호용·정점시 선생 등을 주축으로 시위가 계획돼 온 것이다. 이날 주도 인물들은 거사 준비물을 가지고 시장에 잠입했다. 오후 1시 수천 명으로 불어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이원하·전하선·성만영 선생 등이 "대한독립만세"를 선창하자 많은 사람이 이에 호응했다. 시위대는 시장을 누비며 목이 터져라 만세 소리를 높였고, 일본 무력 탄압에 맞서 초계 우편소를 습격해 건물과 기물을 파괴 한 뒤 초계 주재소로 몰려갔다. 당황한 일본 경찰은 공포탄을 쏘았으나 군중은 더욱 격분했다. 이때 합천경찰서로부터 온 지원 병력이 군중 속에서 총검을 휘둘렀다. 이 과정에서 김장배 선생 외 1명은 총탄에 맞아 순국하고 군중을 지휘하던 이원탁 선생은 다리에 총을 맞아다. 주도 인물 상당수는 일본 경찰에 검거돼 각 1년 또는 3년 형을 받고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했다.

초계장터가 있던 자리는 현재 사정교 다리가 건립돼 있고 주변에 장터 흔적이 사라졌다. 하지만 표지석을 세워 독립운동 사적지임을 적극적으로 알릴 필요성이 제기되나 요원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밖에 해인사 부속학림 학생 홍태현 선생 주도로 3월 31일 해인사 홍하문(紅霞門·현 일주문) 밖에 200여 명 학생이 모여 독립만세를 불렀다. 학생들은 해인사 주재소로 몰려가 시위했으나 경찰이 총을 쏴 해산했다. 그날 밤 11시께 군중 200여 명이 다시 봉기해 해인사 도로 앞에서 만세시위를 펼치자 학생들도 합류해 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러나 이도 곧 경찰에 의해 강제 해산됐다. 이날 홍태현 선생이 검거 돼 대구형무소에 6개월간 투옥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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