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권력 탐내다 옛 부하들에 피살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김창룡의 죽음


1956년 1월 30일 오전 7시 30분. 육군 특무부대장 김창룡 소장은 그날도 원면(군복에 들어가는 원자재) 비리 문건을 손에 들고 출근을 하고 있었다. 그 문건에는 당시 최고위 군 간부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집에서 100미터 정도 떨어진 용산구 용호로 1가 51번지 미원미장원 앞. 그곳에 차량 번호판·부대 표식이 없는 지프차가 가로로 길을 막고 있었다. 김창룡을 태운 지프차는 좁은 길에 멈춰 설 수 밖에 없었다. 경적을 울렸지만 길을 막은 지프차는 요지부동이었다. 순간 2명의 괴한이 김창룡 지프차 문을 열고 권총 6발을 발사했다. 김창룡은 몸을 날려 현장에서 피하려 했지만 몸에 여러 발의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사건 직후 김창룡은 서대문적십자병원으로 이송됐지만 10분 만에 사망했다. 이승만 대통령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로 불린 김창룡은 불과 39세의 나이로 죽었다.

사건 재현 장면-김창룡 차량 막은 범행 차량.jpg
당시 현장 재현 모습. 왼쪽 지프차가 김창룡이 탄 차량, 오른쪽 지프차가 범인들이 길을 막은 모습./국가기록원

도대체 어떻게 불과 마흔도 안 된 사람이 왜 이런 모습으로 죽어야 했을까? 그리고 그를 죽인 이들은 누구인가?


2. 일제도 놀란 ‘실력’


김창룡은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요덕면 일산리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다. 10살이 되던 해 덕성사립보통학교(초등학교)에 입학했다. 이후 영흥공립농잠실습학교에서 누에를 키우고 실을 뽑는 기술을 배우고 일본인이 운영하는 직물회사에 취직했다. 그러나 2년 만에 회사를 나와서 만주철도 신경(장춘)역 직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다시 2년 만에 철도 직원을 그만두고 일본인의 추천을 받아 만주 주둔 일본 헌병부대 군속(잡무를 처리하는 직원)으로 일하게 된다. 3년 동안 군속으로 온갖 노력을 기울인 끝에 1941년 4월 일본 관동군 소속 헌병교습소에 입소했고, 교습소를 수료한 후 1941년 10월 헌병 보조원이 됐다.

df7e9d870d925fde9db76807fd715c67_eolCLyC4qs8QuNdRqLukELxdCyjfNM.jpg
▲ 김창룡./한국한중앙연구원

그의 업무는 소련과 만주국 국경지역에서 항일인사를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사복을 입고 주요 인물들을 탐색하고 접근하는 것이 주로 그가 한 일이었다. 당시 그는 자신의 임무 수행을 위해 최선을 다했는데, 예를 들면 중국 공산당의 거물 왕진리(왕근례, 王近禮)를 체포할 때 그는 중국인 거지로 가장해 왕진리의 가게 종업원으로 일하게 된다. 그는 왕진리의 신임을 사기 위해 경찰서 유치장을 7번이나 드나들었다. 덕분에 왕진리와 주변 중국인들조차 그를 ‘진짜 중국 사람’으로 인식했다. 일제는 그의 활약으로 왕진리를 검거했을 뿐만 아니라 왕진리와 관련된 9개 항일 지하조직을 색출하고 50여 명을 검거했다. 이때가 1943년이었다. 그의 활약에 탄복한 일제는 바로 헌병 오장으로(하사) 특진시켰다.


“북한에서 2차례 체포됐으나 탈출”


그는 1943년 9월부터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까지 불과 2년 사이에 무려 50여 개의 항일조직을 적발했다. 그야 말로 눈부신 활약이었다. 1945년 일제가 패망하자 사복으로 갈아입고 바로 고향인 영흥으로 돌아왔다. 영흥에서 소련군에게 친일부역 혐의로 체포당해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탈출했고, 이후 다른 지역을 전전하다 다시 친일 혐의로 체포돼 사형선고를 받았으나 거듭 탈출에 성공했다고 한다.

2차례 친일파로 체포됐기에 그는 도저히 북한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그는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서울에서도 그는 마땅한 일을 찾지 못해 전전하던 중 마침 만주 일본군에서 안면이 있던 박기병을 만나게 된다. 박기병은 당시 3연대에서 소대장을 맡고 있었다. 박기병은 그를 국방경비대 5연대 일반 사병으로 입대시켜주었다. 그러나 그는 사병 생활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시 박기병을 찾아간 그는 3연대에서 정보하사관으로 복무했다. 그러던 중 만주군 대위 출신인 김백일의 추천으로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육군사관학교 전신) 3기로 입교해 그해 4월 소위로 임관했다.

그는 소위가 된 후 자신의 ‘전공’을 살려 일제 경찰과 헌병 출신들을 모아 정보소대를 편성하고 좌익 색출 작업을 담당했다. 이후 분단과 반공이데올로기가 맹위를 떨치면서 그에게도 출세의 길이 열리기 시작했다.


3. 빨갱이 때려잡는 데 귀신


1947년 5월, 서울에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다. 미소공동위원회가 서울에서 열리고 있었고 소련 측 인사를 경호하기 위해 소련군이 주둔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때 한 소련 군인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김창룡은 발견했다. 김창룡은 격투 끝에 소련 군인을 제압하고 필름을 압수했다. 미소공동위원회에 이 사실이 알려지면서 소련은 난처해졌다. 미국은 소련 측에게 ‘정탐을 하러 왔느냐’고 따졌고, 김창룡의 이 행동은 군 수뇌부의 주목을 받았다.

1948년 1월 중위로 진급하고 8월 정부 수립과 더불어 대위로 진급했다. 8월 말 육군본부 정보국에 배속됐다. 그러던 중 1948년 10월 여순사건이 일어났다. 여순사건 직후 이승만은 대대적인 숙군을 지시했다.

숙군이란 군대 내 반체제 인사를 숙청한다는 뜻이다. 1946년 국군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실 군대의 ‘진입장벽’이 낮았다. 영어 한 마디만 할 줄 알면 장교가 될 수 있었고, 추천서 한 장이면 요직에도 손쉽게 들어갈 수 있었다. 당장 군대를 육성하는 것이 시급했기 때문이다. 일본군 출신들도 쉽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고, 마찬가지로 좌익계열들도 어렵지 않게 군에 들어갈 수 있었다.

1948년 10월, 여순사건으로 14연대가 통째로 반란을 일으키자 이승만은 군법무관 김완용에게 “한 달 내로 빨갱이들을 다 잡아 죽이고 오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때 김창룡이 실무자로 있던 육군 정보국 3과(방첩과)가 나섰다. 1948년 11월 11일 김창룡과 정보 요원들은 박정희 소령을 체포하고 심문했다. 박정희가 체포됨으로써 군대 내 세력을 확장하던 남로당 조직들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1949년 3월까지 방첩과는 불과 4개월 동안 1500명에 달하는 이를 숙청했다. 당시 군 병력의 3%에 해당하는 엄청난 인원이었다.

숙청당하는 군인들. 월간 말.jpg
숙청 당하는 군인들./월간 '말'

그러나 짧은 시간 안에 실적쌓기 식 숙청이 됐기 때문에 문제가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증거 보다 자백을 받아내는 식으로 심문을 했고 고문이 혹독하게 가해졌다. 자백을 한 뒤에는 연루된 좌익 인물을 대라고 또 다시 고문이 이어졌다. 이 같은 방식으로 애매하게 숙청되는 인물이 많았다.

대표적인 예로 최남근 중령은 남한 정부를 전복할 목적으로 동지들을 규합했다는 죄명이 씌워졌다. 최남근은 처형당할 때 애국가를 부르고 ‘대한민국 만세!’를 외쳤다. 자신이 억울하다는 것을 마지막까지 항변한 것이다. 당시 숙군 작업으로 처형된 사람 가운데서는 이처럼 애국가를 부르거나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거나 심지어 ‘이승만 대통령 만세’를 외치면서 죽어간 사람도 있었다.

이후에도 숙군은 이어져 1949년 7월까지 4749명이 처벌받았다. 숙군 과정에서 짧은 시간 안에 뛰어난 실적을 올린 김창룡은 1949년 초 소령으로 승진하고, 6월 육군 방첩대(CIC)대장으로 임명되고, 7월 중령으로 승진했다. 불과 2년 3개월 만에 소위에서 중령까지 올라간 것이다.

1950년 9월 28일, 이승만은 북한군에 점령당했던 서울을 수복하자마자 김창룡을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했다. 합동수사본부는 북한군이 수도권 지역을 점령하고 있을 당시 북한군에 협조한 ‘부역자’를 찾아내고 처벌하는 무시무시한 권한을 가졌다. 그뿐이 아니라 합동수사본부장은 대통령에게 직접 보고했다. 정치적으로도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된 것이다.


“안 의사, 수고하셨소”


1950년 10월 초 부터 1951년 5월까지 김창룡은 숙군 때와 마찬가지로 그야말로 엄청난 속도로 부역자를 처벌하기 시작했다. 당시 내무부 치안국 자료에 따르면 1950년 말까지 검거된 인원만 15만 3825명, 자수한 인원 39만 7090명으로 총 55만 915명이 부역 혐의를 받았다고 한다. 이 가운데 서울지역에서만 1298명이 처형됐다. 그러나 진정으로 북한과 협조한 사람들은 이미 북한군과 함께 북으로 올라가고 없었다.

부역자로 지목된 사람을 때리는 장면 연합뉴스.jpg
▲ 당시 부역자 체포 장면./연합뉴스

이에 따라 실적을 중시한 김창룡의 부역자 처벌은 여론과 정치권의 거센 비판을 받아왔다. 특히 합동수사본부는 어느 법에도 설치 근거가 없었다. 결국 합동수사본부는 1951년 5월 23일 해체됐지만, 김창룡은 이 시기 이승만에게 절대적인 신뢰를 얻게 됐다. 김창룡은 1950년 10월 말에 대령으로 다시 승진했으며, 1951년 5월 15일 육군 특무부대장으로 임명됐다. 당시 그의 나이 불과 35세였다. 육군 특무부대는 지금의 기무사령부의 전신으로 역대 정권에서 막강한 권한을 누려왔다.

김창룡은 빨갱이만 때려잡은 것이 아니었다. 1949년 6월 26일, 백범 김구 사무실인 경교장에서 여러 발의 총성이 울렸다. 안두희가 백범 김구를 살해한 것이다. 안두희는 김구를 살해한 직후 경교장 주위에 있던 헌병들에게 체포됐다. 체포된 안두희가 끌려간 곳이 김창룡 앞이었다. 김창룡은 안두희에게 “안 의사, 수고하셨소”라고 했다.

김창룡은 이후 안두희를 끊임없이 챙겼다. 감옥에 있을 때 좋은 음식을 대접했고, 책 쓰는 것을 도와줬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김창룡은 안두희를 형무소에서 빼내 주었다. 안두희가 소위로 다시 임관할 때부터 대령으로 제대할 때까지 김창룡은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안두희는 1992년 4월, 김창룡이 김구 살해를 지시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김구 암살의 배후가 누구인지는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4. 빨갱이가 없으면 만들어라


이렇듯 엄청난 출세와 이승만의 신임을 얻었지만 문제가 있었다. 숙군과 학살, 부역자 처벌로 대부분의 좌익들을 소탕했을 뿐 아니라, 남아있던 좌익들도 북한으로 넘어가버려 이제 남한 내 좌익들은 거의 자취를 감추게 됐다. ‘빨갱이를 때려잡을’ 기회가 줄어든 것이다. 그는 이 상황에서 기발한 돌파구를 마련한다. 이를 테면 ‘빨갱이가 없으면, 빨갱이를 만들면 된다’는 것이다.

1951년 한 무리의 청년들이 상복을 입은 채 관을 메고 지리산으로 향하고 있었다. 당시 특무부대장 김창룡은 이들이 관 속에 총기를 숨겨 놓고 지리산 빨치산에게 가는 것을 붙잡았다고 이승만에게 보고했다. 기분이 좋아진 이승만은 국무회의에서 “여러분들, 김창룡 대령을 자식처럼 사랑해 주세요”라고 공개적으로 칭찬했다.

그런 뒤 이승만은 국무회의장으로 김창룡을 불러들인 뒤 노획한 총기를 전시하도록 했다. 당시 국무회의 참석했던 공안검사 출신 선우종원은 훗날 이렇게 증언한다.

“빨갱이한테서 압수했다는 무기라는데 개머리판도 없고 낡아 저게 살상용으로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물건을 보는 이 박사의 입가에는 흐뭇한 웃음이 배어 있는 것을 어쩌랴.”

-선우종원 회고록, <격랑 80년>

선우종원의 증언대로 이는 이승만의 신임을 얻기 위한 김창룡의 조작이었다. 그러나 이는 김창룡이 벌인 숱한 조작 사건 중 아주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

이승만으로부터 훈장 받는 김창룡 동아일보 제공.gif
▲ 이승만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김창룡./당시 동아일보 보도 사진

최초의 ‘빨갱이 만들기 작전’은 1950년 10월 그가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취임한 직후 일어났다. 인민군 패잔병으로부터 빼앗은 무기를 삼각산 뒤편에 있던 주민들에게 쥐어주고 이들을 공산분자로 몰았고, 이들이 서울을 습격하려 한다고 꾸며 모두 죽인 사건이다. 이것이 소위 ‘삼각산 사건’이라 한다.

1952년 5월 24일 무장 북한군으로 보이는 일당이 임시수도 부산 금정산에 나타나 총격을 가한 충격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어떻게 국군과 미군 병력이 밀집해 있는 임시수도 부산에 북한군이 나타난 것일까? 

당시 김창룡은 대구형무소에 있는 무기수, 중형수들을 상대로 ‘큰 일을 치르고 나면 석방해 주겠다’고 제안했다. 김창룡은 이 제안에 따른 형무소 재소자 7명을 북한군으로 꾸민 다음 부산 금정산에서 총격을 하도록 한 것이다. 물론 이들 7명은 순식간에 사살 당했다. 하지만 김창룡 공작에 힘입어 이승만은 다음날 부산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5월 26일 야당 국회의원들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한 ‘부산정치파동’을 일으켰다. 이를 토대로 이승만은 재집권에 성공한다.

그런데 김창룡은 자신이 이 사건의 직접 마무리하고 싶었지만, 김창룡의 직속상관 김종평(육군 정보국장)이 그가 부산으로 이동하는 것을 막았다. 결국 공은 원용덕 헌병사령관 등 다른 사람에게 돌아갔다. 공을 빼앗긴 김창룡은 김종평에 원한을 품고 있었고 이는 또 다른 조작사건으로 만들어진다.

원용덕 위키.jpg
원용덕./한국어 위키 백과

1953년 김창룡은 ‘동해안 반란 사건’을 적발했다고 발표했다. 동해안 속초에 있는 1군단에 이승만이 방문하면, 이승만을 저격하고 김종평 육군 정보국장이 군 병력 1000명을 동원해 부산을 장악해 정부 요인을 처단한 다음 조봉암 국회부의장을 대통령으로 추대한다는 엄청난 내용이었다. 나중에 군법회의에서 여러 증인들이 김창룡의 조작임을 증언하면서 사건은 커지지 않았지만, 김종평은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김창룡이 판 함정에 걸린 독립운동가들”


김창룡이 사적인 감정으로 일으킨 조작 사건은 또 있다. 1946년 김창룡이 3연대에서 사병으로 근무하고 있을 때 소대장이었던 김도영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김창룡이 야간 순찰 후 보고하라는 명령을 위반하자, 김도영 소대장은 김창룡을 때리고 꾸짖었다. 김창룡은 김도영에 대한 원한을 품었다. 3년 뒤인 1949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적과 내통하고 제주도 좌익세력과 내통한다고 혐의를 뒤집어 씌웠다. 김도영은 무려 6개월 간 구금당한 뒤 수사를 받다 간신히 풀려나왔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1954년 김창룡은 김도영이 야당 국회의원 신익희의 사주를 받아 논산훈련병들을 이끌고 쿠데타를 한다는 혐의로 구속했다. 김도영은 4개월 뒤 풀려났지만, 김창룡 때문에 번번이 승진의 기회에서 누락됐고, 변변찮은 보직도 맡지 못했다.

김창룡이 만든 조작 사건 가운데 가장 ‘고급기술’을 쓴 것은 바로 1955년 ‘이승만 암살 음모 사건’이었다. 1955년 과거독립운동을 했던 나재하, 김병호, 민영수, 김재호, 김익중, 이범륜, 유성연, 김동혁, 김동훈에게 한 청년이 접근한다. 이종태라는 이 청년은 이승만을 비판하면서 노령의 독립운동가들에게 ‘이대로는 안 된다.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서는 이승만을 제거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독립운동가들은 ‘열혈 청년’의 등장에 반가움과 함께 과거 독립운동 시절이 생각났을 것이다. 이들은 이종태에게 1955년 10월 3일 개천절 행사 때 수류탄을 터뜨려 이승만을 죽여달라고 부탁했으며 수류탄 등을 지원했다.

하지만 이 음모는 거사 직전 특무대에 발각됐다. 독립운동가들이 체포돼 김창룡 방에서 얻어맞고 있을 때 이종태가 군복을 입고 태연히 나타났다. 김창룡이 판 함정에 걸린 것이다. 아마 김창룡과 이종태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을 것이다. 이 일로 이범륜과 김동훈에게는 사형이 선고됐다.

이 외에도 여간첩 김수임 사건 등 숱한 사건이 그의 손에 의해 조작돼 많은 사람들이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5. 권력욕이 부른 죽음


1953년 5월 김창룡은 육군 준장이 됐고, 1955년 1월 육군 소장으로 진급했다. 이 당시 김창룡을 사람들은 ‘이승만의 오른팔’, ‘이승만의 양자’라고 불렸다. 이 시기가 되면 김창룡은 ‘빨갱이를 만들어내는’ 단계를 넘어 권력투쟁에 직접 개입하게 된다.

가장 먼저 타깃이 된 이는 정국은이라는 사람이었다. 당시 가장 영향력이 강하던 연합신문과 동양통신의 양사 편집국장을 겸임하고 있었다. 정국은은 이범석, 원용덕 등과 함께 이승만 정권의 외곽세력인 ‘조선민족청년단(약칭 족청)’ 출신이었다. 김창룡은 이 족청과 대립관계에 있었다. 

김창룡은 족청을 밀어내기 위해 1953년 8월 31일 정국은을 간첩 혐의로 체포했다. 정국은이 체포된 지 10일 만에 내각에서 족청 계열 장관 3명이 동시에 파면되고, 곧 자유당에서 족청 계열 거물인사 8명이 제명됐다. 김창룡 반대세력이었던 족청은 순식간에 권력에서 이탈했다. 나중에 정국은은 사형에 처해지는데 당시 판사였던 태윤기 씨는 다음과 같이 증언하고 있다.

정국은 처형 직전동아일보.jpg
▲ 정국은 처형 직전 모습./동아일보

“간첩으로 몰아 죽게 했던 사건인 만큼 인간적으로 고민이 많았습니다. 죽일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당시 상부의 의견이 사형 쪽이었고, 언론의 대문짝만한 보도 때문에 여론도 비등해서 사형으로 결정됐지요.”

-월간 <말> 1989년 9월호.


“서로 상대방을 빨갱이로 보고”


족청을 제거한 김창룡은 다음 타깃으로 반공검사로 유명한 오제도를 삼았다. 오제도는 1950년 10월 김창룡이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으로 임명될 때 마지막까지 본부장 자리를 놓고 경쟁하던 인물이다. 오제도는 국가보안법의 기틀을 만들고, 진보당 사건으로 조봉암을 사형시키는 등 자타공인 우익반공검사였다. 김창룡은 이승만에게 ‘오제도가 빨갱이입니다’고 보고했다. 이 사실을 듣자 오제도 또한 ‘아닙니다. 김창룡이 빨갱입니다’라고 보고했다. 극우반공인사끼리 서로를 가리키며 빨갱이라 부르는 웃지못할 장면이었다. 김창룡의 오제도 검사 제거 시도는 성공하지 못했다.

오제도.jpg
▲ 오제도./오마이뉴스

1955년 11월, 일제 경찰 출신으로 공작의 달인인 노덕술 헌병사령부 범죄수사단장(중령)이 파면됐다. 노덕술 또한 김창룡과 마찬가지로 이승만에게 신임을 받고 있었지만, 군수물자를 빼돌린 정황이 포착됐고, 언론에 대문짝만하게 실리면서 파면되고 말았다. 이 사건도 김창룡이 잠재적 경쟁자가 될 수 있는 노덕술을 제거했다는 설이 우세하다.

박정희도 견제의 대상이었다. 1953년 박정희가 미국 유학을 떠나려 할 때 김창룡이 막았다. 당시 미국 유학을 다녀오면 그 이력이 쌓여 군대 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박정희가 남로당에 있을 때 그를 잡아내고 심문한 사람이 바로 김창룡이었다. 김창룡으로서는 박정희의 출세를 막아야만 했다.

이렇듯 김창룡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자 육군참모총장인 정일권과 상관인 강문봉 중장조차 그를 감당하지 못했다. 훗날 강문봉은 법정에서 당시 김창룡에 대해 이렇게 증언하고 있다.

“김창룡은 직속상관인 참모총장이나 국방부장관을 무시하고 직접 대통령에게 보고하는 따위의 월권을 자행했다. 비위사실의 보고내용도 사적인 감정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김창룡은 정보를 군사목적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세력 확장에 이용했다. 그는 또 지휘관 사이를 이간시켜 장성들을 분열시켰다. 특무대는 본래의 사명을 망각하고 군 지휘관들을 감시하는 데 열중했다. 특무대는 군의 암적 존재다.”

1955년 10월 김창룡의 횡포를 더는 두고 볼 수 없었던 정일권과 강문봉은 이승만 대통령의 별장이 있는 진해에 직접 찾아갔다. 그들은 "김창룡을 다른 부대로 보내거나 차라리 미국 유학을 보내 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이승만은 이들의 요청을 거부한다.

이 소식을 들은 김창룡은 발 빠르게 대응했다. 김창룡은 때마침 터진 원면(군복에 들어가는 원자재) 비리를 활용하려했다. 당시 알려진 바에 따르면 원면을 받은 장성들이 이를 시장에 되팔아 10억 환 이상의 부당이익을 취해 자유당 고위층에 상납했다고 한다. 김창룡은 이를 가지고 자신을 탄핵한 정일권, 강문봉 등 군 장성을 제거하려고 시도했다. 이기붕조차 김창룡에게 ‘그만 들춰라’고 경고했지만 김창룡은 멈추지 않았다.

결국 1956년 1월 30일 김창룡은 암살된다. 김창룡은 자신의 권력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숱한 정적을 만들었고, 결국 자신을 죽음으로 이끌었다. 김창룡 암살범 4명(허태영 대령, 신초식, 송용고, 이유회)는 모두 특무대 출신이었다. 자신의 옛 부하들에게 살해된 셈이다. 특히 이 가운데 주범인 허태영은 1950년 한국전쟁 때 김창룡이 CIC대장을 맡고 있는 동안 CIC 마산파견대를 이끌었다. 이후 특무대 대전파견대장을 지냈을 정도로 김창룡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허태영은 법정 진술에서 김창룡을 죽인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김창룡은 평소 개인의 영달을 위해 무분별하게 사람들을 잡아들였으니 공산당 1명에 무고한 양민 10명의 비율로 무고한 사람들이 그의 손에 희생되었다. 김창룡이 취급한 사건들도 전부가 협박 공갈로 자백을 받은 것으로 대부분 허위 날조됐거나 침소봉대된 것들이었다. 한편 뒤켠에서는 살인, 약탈, 협박 등으로 군수품을 빼돌리고 밀수를 하는 식으로 수단과 방법을 다 동원해서 김창룡이 그간 모은 재산만 20억 환이다.”

허태영은 이유회와 함께 1957년 9월 24일 대구 육군정보학교 야외훈련장에서 총살됐다. 총을 맞고 쓰러질 때까지 애국가를 불렀다고 한다.

이유회 허태영 아카이브즈.jpg
▲ 김창룡 피살 사건 범인 이유회(왼쪽)과 허태영(오른쪽)./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즈 제공

한편 이승만은 김창룡의 죽음을 보고 받은 그날로 중장으로 추서했다. 사건 발생 4일 후인 1956년 2월 3일 국군 최초로 ‘국군장’이 열렸다. 그날 하루 육해공군 전 군부대는 조기를 게양했고 장병들의 음주와 가무도 금지됐다. 김구가 죽었을 때 한 번도 조문하지 않았던 이승만은 김창룡 영전에 3번이나 조문하면서 진심으로 애통해했다. 이승만은 조사에서 “김 중장은 나라를 위해서 순국한 것이며 충령의 공을 세웠다”고 했다.

그의 비문은 친일 역사학자로 유명한 이병도가 직접 썼다. 이병도는 “그 사람됨이 총명하고 부지런하고 또 불타는 조국애와 책임감은 공사를 엄별하여 직무에 진수하더니 급기야 그 직무에 죽고 말았다”고 적었다.

김창룡 장례식 빈소.jpg
김창룡 빈소 모습./국가기록원

김창룡은 젊은 나이에 죽었지만, 그가 남긴 그림자는 짙고 깊었다. 특무대는 육군방첩대, 보안사령부로 이름만 바꿔가며 막강한 힘을 휘둘렀고 권력에 깊숙이 개입했다. 결국 16대 보안사령관을 지낸 김재규는 박정희를 쐈고, 20대 보안사령관 전두환과 21대 보안사령관 노태우는 대통령이 됐다.


<김창룡 연표>

-1916년 7월 18일 함경남도 영흥군 출생.

-1938년~41년 일본 관동군 헌병대 군속 근무.

-1941년 일본 관동군 헌병 보조원.

-1943년 중국 공산당 거물 왕진리 체포. 일본 관동군 헌병 오장(하사) 특진.

-1945년 일제 패망 후 부역자로 2번이나 체포됐으나 탈출. 월남.

-1946년 국방경비대 5연대, 3연대 사병으로 입대.

-1947년 1월 조선경비사관학교 제3기 입교.

-1947년 4월 소위 임관.

-1948년 8월 육군본부 정보국 정보국 3과 배속. 대위로 승진.

-1948년 11월 여순사건 직후 숙군 작업 시작.

-1949년 6월 육군 정보국 방첩대(CIC)대장. 7월 중령으로 진급.

-1949년 6월 26일 김구 암살 사건 때 범인 안두희를 ‘체포’하고 특별 배려.

-1950년 8월 경남지구 방첩대장.

-1950년 10월 군·검·경합동수사본부 본부장. 북한군 부역자 처벌 주도.

-1951년 5월 15일 육군특무부대장.

-1953년 5월 육군 준장.

-1955년 1월 육군 소장.

-1956년 1월 30일 피살. 육군 중장 추서.

-1956년 2월 3일 건군 이래 최초의 국군장으로 장례.

-1998년 2월 대전 현충원 장군묘역으로 이장.


<참고자료>

[자료]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 <진실화해위원회 종합보고서> 3권 민간인 집단희생 사건, 2010

[자료]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전자도서]정길화 외 5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2012

[도서]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편집부, 2009

[도서]김석준, <미군정시대의 국가와 행정: 분단국가의 형성과 행정체제의 정비>, 이화여대 출판부, 2006

[도서]한용원, <창군>, 박영사, 1978

[도서]강준만, <대한민국 다큐멘터리>, 인물과 사상사, 2004

[도서]김주완, <토호세력의 뿌리>, 불휘, 2006

[방송]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여수 14연대 반란’, 1999

[논문]박원순, 「전쟁부역자 5만여 명 어떻게 처리되었나」, 1995

[논문]노영기, 「1945-50년 한국군의 형성과 성격」, 2008

[논문]노영기, 「국방경비대·육군의 세력 분포와 숙군」, 2009

[논문]김득중, 「부역자 처벌의 논리와 법의 외부」, 2014

[논문]후지이 다케시, 「족청·족청계의 이념과 활동」, 2010

[논문]강성현, 「한국전쟁 전 정치범 양산 ‘법계열’의 운용과 정치범 인식의 변화」, 2010

[논문]김득중, 「한국전쟁 전후 육군 방첩대(CIC)의 조직과 활동」, 2010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