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8) 김해지역 항일독립운동

낙동강 하구 비옥한 토질에 넓은 평야를 지닌 김해지역은 일제강점기 일찍이 동양척식주식회사 김해농장, 대지주인 박간(迫間) 농장 등 일본인 농장 진출이 많았다.

이 탓에 농민을 중심으로 한 일제에 대한 저항 활동이 활발했다. 농민운동에 영향을 받은 청년운동도 활발했는데 이 같은 저항 움직임은 행정 중심지인 김해읍과 철도 교통 요충지인 진영읍을 중심으로 나타났다.

한데 아쉽게도 이들이 활동 근거지로 삼은 농민회관이나 청년회관 위치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그 장소성을 바탕으로 한 김해항일독립운동 기억은 요원한 상태다. 반면 3·1항일독립운동 장소에 대한 기록이 남아 이 지역 민중적 항일독립운동 형태를 어렴풋이나마 기억할 수 있다는 점이 다행으로 여겨진다.

◇김해 3·1운동 초석 다진 배동석 선생 = 김해는 국제도시다. 이 지역 6500곳이 넘는 중소기업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가 8만 명에 달한다. 동상동 외국인 거리는 주말 많을 땐 3만 명이 오갈 정도로 북새통을 이뤄 이곳이 한국인지 헷갈릴 정도다. 하지만 한국인과 외국인 간 차별 없는 공존의 장이 된 이곳이 96년 전 선조의 항일독립 열망이 끓어 넘치던 저항의 장이었다는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과 맞닿은 이곳 거리는 김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의 시발점이라는 점도 그렇다. 이 중심에는 애국지사 배동석(1891∼1924) 선생이 있었다. 김해중앙상가 아케이드 골목 끝 동상동 외국인 거리와 만나는 지점에 자리한 휴대전화 대리점. 김해사람들 추억의 음식점이던 옛 '경화춘' 자리. 이곳에 배동석 선생 생가가 있었다.

배 선생은 김해장로교회(1894, 남한에 한국인이 스스로 세운 가장 오래된 교회)를 창립하고 김해합성초등학교(1907)를 설립한 배성두(1840∼1922) 선생 아들이다.

배 선생은 대구 계성중학교 재학 시절부터 항일 의식이 강해 배일 혐의로 3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목포에서 교직 생활을 하던 중 다시 배일 혐의로 체포됐으며 이후 상하이와 만주로 가 김좌진 장군과 함께 활동했다. 그러다 1918년 귀국한 선생은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재학 중 서울 3·1운동 학생단 대표로 활약하기에 이른다.

배동석 선생 생가 터. 지금은 휴대전화 대리점이 들어서 있다.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인 이갑성(1889∼1981) 선생이 조선독립을 위한 경남지역 민족대표 추천을 위해 마산을 방문했다가 실패하자 이 지역 연고자로 파견한 이가 배 선생이었다. 배 선생은 1919년 2월 25일 마산에서 이상소·손덕우·이승규 선생 등을 만나 조선독립운동에 참가해 청원서에 연서로 날인할 뜻을 권유했다. 임무를 마친 배 선생은 서울로 돌아가 학생단 대표로 3·1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독립선언서를 가지고 고향 김해로 돌아온 배 선생은 임학찬, 배덕수 선생 등과 은밀하게 의논해 김해면 3·1항일독립만세운동을 주도했다.

1919년 3월 30일 밤 10시. 자신의 집과 인접한 김해면 중앙거리에서 태극기를 흔들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친 배 선생과 동료는 미리 부산에서 파견돼 있던 일본군에 의해 검거됐다. 이것이 김해지역 최초 만세시위였다.

이날 만세시위 이후 김해군 가락면 대사리 허병(許炳) 선생이 최덕관·최계우·조병중·김석암·송세탁·송세희 선생 등과 함께 거사를 모의하고 김해장터(현 김해전통시장, 동상시장) 장날인 4월 2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이날 오후 4시께 이들이 김해장터 십자로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일제히 달려나가자 군중 60여 명이 호응하면서 만세를 불렀다. 일본 헌병은 재향군인과 불량배까지 동원해 무자비한 폭력 진압에 나섰고 이 과정에서 송세탁과 송세희 선생이 크게 다쳤다. 허병 선생 등은 김해헌병분견소로 잡혀가 모진 탄압을 받았다.

1919년 3월 30일 배동석 선생이 주도한 김해지역 최초의 만세시위 후 4월 2일 만세운동이 벌어졌던 김해장터(현 김해전통시장·동상시장).

◇나는야 독립군 대장 안기호 = 항일독립만세 들불은 김해평야를 타고 진영으로도 번졌다. 현재 진영상설시장이 들어선 자리 옛 진영장터에서 1919년 3월 31일 장날 오후 1시 수많은 장꾼 속에 청년 5명이 광목 태극기를 들고 종이 태극기를 나눠주며 독립만세라 쓴 전단을 뿌리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일을 기획한 이는 김우현(金禹鉉) 선생. 당시 하계 면서기이던 그는 신문으로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지는 소식을 접했다.

이내 3월 29일 김성도·김정태·김용환 선생 등과 함께 만세운동을 계획해 이날 실행에 옮겼다. 많은 군중이 호응했으나 김성도 선생 등이 일본 헌병에 잡혀가는 바람에 확대되지는 못했다.

그렇다고 이날의 열기가 꺼진 것은 아니었다. 다음 장날인 4월 5일 하계리 서당에 다니던 안기호·김종만 선생이 '독립군대장 안기호'라 쓴 깃발을 들고 학생 30여 명과 함께 태극기를 흔들며 시장으로 돌진해 만세를 불렀다. 수백 명 장꾼도 너나 할 것 없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닷새 전보다 늘어난 만세 시위자들 앞에 일본 헌병 진압도 한층 가혹했다. 헌병이 쏜 총에 2명이 크게 다치고 많은 시위군중이 구타를 당했다. 이날 안기호와 김종만 선생도 붙잡혔으나 당시 17세 소년이었기에 구속되지는 않았다.

◇3000명이 들고일어난 장유 무계리 = 김해에서 진영으로 다시 장유로 번진 들불은 더욱 거세게 불타올랐다. 1919년 4월 12일 낮 12시 장유면 무계리 장터. 고요하던 장터의 정적을 깬 것은 김종항(金鐘恒) 선생의 독립선언서 낭독이었다.

1919년 3월 31일 만세운동이 일어난 옛 진영장터(현 진영상설시장).

김종항 선생은 민족교육 산실인 평안북도 정주 오산학교 출신이었다. 서울 3·1운동 이후 독립선언문을 옷깃에 숨겨 고향 장유로 돌아온 그는 지역유지 김승태와 상의해 이강석·김용주·조용우·조항래 선생 등 동지 10여 명을 규합했다. 이들은 4월 11일 이학도 선생 주막에서 지역별 동원 책임을 분담하고 범동포 갯가 갈대밭에서 태극기와 독립선언문을 만들어 각 대표에게 나눠주었다. 이튿날인 거사 당일 내덕리에서는 이강석 선생이 새벽부터 모임을 알리고 김승태 선생이 나팔대와 풍물 북대를 조직해 장터로 들어온 것이다. 3000여 명 시위대는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며 무계리 중심을 향해 행진해 이내 헌병주재소를 포위했다. 압도당한 일본 헌병은 크게 당황해 총을 난사하기에 이른다. 이때 손명조·김용이·김선오 선생 등이 총에 맞아 순국했다.

이에 격분한 시위대는 주재소로 몰려가 건물 등을 파괴했다. 김해헌병분견대에서 파견 나온 기마대와도 충돌하면서 김승태·김종환 선생 등 10여 명이 검거되고 군중은 해산됐다. 김해에서 가장 조직적이고 대규모로 일어난 3·1항일독립만세운동이었다. 그 역사 현장인 무계리 장터는 겉모양만 바뀌었을 뿐 지금도 5일장이 선다.

김해에는 장유면 내덕리 산에 김해 3·1운동기념탑이 있다. 이곳은 그러나 장소성에서 김해장터와 진영장터 항일독립만세운동 역사를 다 담아내지 못하는데다 가까운 무계리 장터 시위지와도 접근성이 떨어지는 단점이 크다. 이와 함께 배동석 선생 생가와 김해장터 일대는 김해 3·1운동 시발인 점에서, 진영장터는 3·1운동 관련 행사나 거리 지정 등 추모행사가 없어 이 지역 사람들조차 시위지인지 모른다. 이 점에서 역사 현장이 된 각 장터와 배동석 선생 생가에 표지석을 세워 이를 기리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게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지적이다. 이에 대한 열망은 '3·1동지회' 같은 지역 보훈단체와 근현대사 연구가들 또한 마찬가지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