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온갖 공작사건의 주역, 반민특위 암살 음모도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해방 후 서울, 어느 청년의 죽음


1948년 1월 27일 수도경찰청(당시 서울경찰청) 중부경찰서 형사실. 20대 중반의 남성이 모진 고문을 받고 있다. 고문 받는 남자는 박성근이라는 사람으로 3일 전 발생한 장택상 수도경찰청장(현 서울경찰청장) 피습 사건의 용의자로 붙들려온 사람이었다. 그는 총 5명의 경찰에게서 고문을 받고 있었는데, 중년의 남성은 곤봉으로 박성근을 무차별 난타한 뒤, 나머지 4명에게 물고문을 하라고 지시했다. 모진 물고문이 이어졌고, 박성근은 물고문을 견디다 못해 끝내 사망하게 된다.

박성근이 죽자 형사실에 있던 경찰들의 얼굴은 흙빛이 됐다. 수도경찰청장을 피습한 이 사건은 여론의 이목을 받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런데 용의자를 죽여 버렸으니 어찌 이를 수습할 것인가? 잠시 침묵이 흐른 뒤 중년의 남성은 경찰들에게 하나하나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그날 밤, 중부경찰서 2층 창문이 벌컥 열리면서 “저놈 잡아라!”는 고함소리가 일대를 울렸다. 두어 명의 형사들이 창문을 뛰어내려 누군가를 미친 듯이 쫓아가자 주변에 있던 사람들과 경찰 직원들의 시선이 한쪽으로 쏠렸다. 이 틈에 형사실에 있던 사람들은 죽은 박성근의 시신을 동여매고 자동차에 실었다. 그리고 이들은 쏜살 같이 한강으로 내달렸다. 당시 한강은 꽁꽁 얼어 있었다. 드문드문 얼음낚시를 위해 낚시꾼들이 뚫어 놓은 구멍이 있었다. 일행은 그 중에 한 구멍으로 박성근을 밀어 넣었다. 이렇게 한 청년이 사라졌다.

그러나 6개월 뒤 박성근의 시신이 한강 위로 떠올랐다. 사건의 전모는 곧 밝혀졌다. 이 경악할 만한 사실에 여론은 뒤집어졌다. 경무부(경찰청)은 이 고문치사 사건의 주모자로 중년의 남성을 체포했다. 사람을 사정없이 고문하고 시신을 유기했던 이 중년 남성은 이름은 노덕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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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MBC


2. 밑바닥에서 꼭대기까지


노덕술은 1899년 6월 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그는 중학교 2학년 중퇴 후, 일본인 잡화점에서 잠시 일하다 일본 홋카이도에 갔다 왔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다. 교습소를 졸업한 후 일제 순사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비록 학력도 낮고, 든든한 배경도 없었지만 그는 승승장구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1924년 말 경부보 시험에 합격한 후 경부보로 경남지역을 돌면서 근무하다, 1933년에는 드디어 경부(경감)가 됐다. 이만하면 조선인으로서 올라갈 수 있는 사실상 꼭대기에 올라간 셈이다.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 한반도에 1만 9328명(순사보 제외)의 일제 경찰이 있었고, 이 가운데 조선인 경부는 겨우 86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은 여기에 만족하지 않았다. 1943년 9월 30일 그는 드디어 경시(총경 급)에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6년 강점기를 통 털어 21명뿐이었다. 해방 직전인 1943년 2만 2728명(순사보 제외)의 일제 경찰이 있었고, 이들 중 조선인 경시는 8명뿐이었다. 노덕술을 제외한 조선인 경시들은 이미 대한제국 시대부터 경찰 경력이 있거나, 대학을 졸업한 엘리트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그는 낮은 학력으로 일본인들도 달기 힘들다는 경시를 달았다. 이는 단 하나의 이유로 밖에 설명할 수 없다.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는 것이다.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버리지”


그는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 항일인사나 항일사상을 가진 이들을 무자비하게 잡아들이고 고문했다. 대표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1927년 10월 민족단체인 신간회 동래지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이때 노덕술에게 고문 받고 죽은 독립운동가가 3명이나 된다고 한다.

1928년 겨울 부산제2상업학교 비밀결사단체인 혁조회가 적발됐다. 혁조회는 19~23세까지 약 150명의 회원이 있었고, 반일투쟁역사와 조선역사를 정리한 ‘배일지집’을 작성하고 배포했다. 노덕술은 혁조회 가운데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 가운데 김규직과 유진홍, 양정욱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당시 <동아일보> 1929년 7월 11일 자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유진홍은 처음 동래경찰서에 검거되어 혹독한 취조를 받은 후로부터 피를 토하고 몸이 몹시 약해지는 동시에 빈혈증까지 걸리게 되어 (…중략…) 4~5일 전부터는 돌연히 병세가 험해져 지난 7일에는 체온이 40도나 된다는 바, 그의 모친은 지난번에 김규직 군이 죽은 것을 연상하고 하도 걱정스러워 매일 형무소 문전에 와서 눈물로써 세월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1932년 5월 경 노덕술은 통영경찰서에 근무 중이었다. 당시 반일단체인 ML당원인 김재학이 5월 1일 메이데이(노동절)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이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다. 이 외에도 노덕술은 1년 남짓 통영에 근무하는 동안 수많은 사람을 잡아들이고 고문했다.

김재학의 조카 김문한 씨는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53년 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 한 사람들이 허기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 (…중략…)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1929년 동래고등보통학교(동래고등학교)에서 일본 교사와 한국인 학생 간의 민족갈등이 일어나고, 마침 광주항일학생운동의 소식이 들려오자 고등학생들은 동맹휴학을 했다. 이에 노덕술은 2차례에 걸쳐 학생들을 구속해 모질게 고문했다.

그러나 그는 항일운동과 별 관련이 없는 사건도 공안사건으로 만들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1925~6년경 부산에서 외지유학생 강연회라는 것이 열렸다. 일본에 유학 중인 고등학생 대학생들이 ‘기독교적 사회와 사회적인 기독교’라는 주제로 강연을 열자, 노덕술은 ‘내용이 불건전하다’며 연설자 7~8명을 경찰서에 구금해 근 한 달 동안 혹독하게 심문했다.

또한 1929년~30년경 여름방학 동안 동래유치원에서 개최한 조선인 일본유학생들의 귀국강연회를 노덕술은 ‘일본정치 비난’이라는 명목으로 연설자들을 체포해 고문 취조했다.

특이한 것은 이 당시 노덕술은 사법계 주임으로 일하고 있었을 때였다. 사법계란 일반 형사사건을 담당하는 것으로, 공안사건이나 시국사건은 고등계에서 맡고 있다. 노덕술은 사법계에서는 출세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을 파악하고, 고등계에서 해야 할 사건을 직접 나서서 처리하는 ‘오지랖’을 앞세워 일제의 이목을 샀다. 1932년 통영경찰서에 있을 때는 사법계 주임이면서 아예 고등계 업무를 겸하고 있었다.


“조선인 경찰은 손을 꿰어서 잡아 간다”


그러나 단순히 항일인사를 잡아들이고, 고문한다고 해서 그렇게 출세하기는 쉽지 않다. 당시 일제 조선인 경찰 중에서는 노덕술 같이 항일인사를 탄압하고 고문하는 이들이 상당히 많았다. 특히 조선인을 고문할 때는 조선인 경찰에게 맡김으로써 일제는 조선인 사이에서 갈등이 빚어지기를 원했다. 당시 시중에서는 ‘일본인 경찰은 수갑을 채워서 잡아 가고, 조선인 경찰은 손을 꿰어서 잡아 간다’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노덕술은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서는 다른 무언가가 더 있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1931년 만주사변 이래 일제는 중국 침략을 본격화하면서 많은 물자와 원활한 수송이 절실할 때였다. 노덕술은 여기에 초점을 맞추고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다. 일제의 공훈 기록에 따르면 1937~8년 사이 노덕술은 군사수송 관련 업무 84회, 1938~1940년에 군사수송 관련 업무 104회에 달했다. 또한 이 기간에 일제 침략 정당화를 위한 여론 환기 및 선전활동과 친일 좌담회를 35회 차례 진행하는 등 그야말로 일제의 눈에 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하여 1940년 4월 일제로부터 공로상을, 1941년 3월 훈8등 서훈을 받았다. 그리고 드디어 1943년 9월 30일 경시로 승진했다.

한편으로 노덕술은 부패한 경찰이기도 했다. 1923년 3월 울산에서 서응윤이라는 사람이 거액을 들고 소를 사서 돌아오는 길에 친구 황정호라는 사람과 술을 마신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해변가에 시신으로 발견됐다. 상식적으로 황정호를 체포해 심문해야 함이 맞지만 경찰에서는 피해자 서응윤 형에게 호출장을 보내고, 황정호를 제대로 심문하지 않고 풀어주는 등 납득할 수 없는 수사를 벌였다. 황정호의 외삼촌 노덕술은 당시 울산경찰서 순사부장이었다.

1931년 1월에는 사기죄로 고소당하기도 했다. 부산에서 황경홍이라는 사람이 상해죄로 잡혀 들어오자, 황경홍의 어머니는 노덕술에게 장차 어떻게 되겠냐고 물었다. 노덕술은 ‘이 사건은 내 손에 달려 있고, 내가 하기에 따라서 확대시킬 수도 있고, 축소할 수도 있다’고 했다. 이에 황경홍의 어머니는 당시 돈 100원(현재 시세로 800만 원 가량)을 노덕술에게 건넸고, 노덕술은 ‘무사히 해줄 터이니 안심하고 있어라’고 했다. 그러나 노덕술은 돈만 받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고, 황경홍의 어머니는 노덕술을 사기죄로 고소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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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사기죄 피소 기사./동아일보 1931년 1월 25일 자

반민특위에 따르면 1949년 노덕술의 재산은 60~70만 원에 달했다. 이는 당시 80킬로그램 쌀 8만 가마를 살 수 있고,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 재산을 모은 셈이다.


3. 노덕술 못지않았던 악질 친일 경찰들


노덕술은 일제시대 ‘고문귀신’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는 과거에 시도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고문을 창시하기로 유명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것으로 대표적인 노덕술 고문은 다음과 같다.

-좁은 상자에 가둬두고 밖에서 못을 박는 고문.

-피해자의 혀를 잡아 빼는 고문. 혁조회 취조 당시 학생들에게 사용한 고문이다.

-피해자의 머리카락을 뽑는 고문. 역시 혁조회 취조 당시 학생들에게 사용했다.

-손을 앞으로, 발을 뒤로 묶어 놓고 매달아 놓은 다음 구타하거나 물을 먹이는 고문.

하지만, 이는 노덕술이 ‘개발’한 고문 가운데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에서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그렇지만 이것만을 가지고 노덕술을 ‘최고의 친일 악질 경찰’이라고 부르기는 힘들 것이다. 일제시대 노덕술 외에도 쟁쟁한 경쟁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고문 지켜보는 게 더 괴로워”


당시 노덕술과 함께 고문귀신으로 악명 높은 사람 중 하판락이 있다. 하판락은 1934년 순사로 경찰생활을 시작했다. 1930년대 말 부산에서 일제 신사참배를 거부한 기독교인 수십 명을 고문하면서 악명을 떨치기 시작했다. 1943년 ‘친우회 불온 전단사건’으로 여경수 외 7~8명을 고문했는데, 그 가운데 3명이 죽고 나머지는 전원 반신불구가 됐다. 이때 하판락이 한 소위 ‘착혈고문’은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하판락에게 고문당한 이광우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이미경의 혈관에 주사기를 삽입했다. 그리곤 혈관을 통해 주사기 하나 가득 피를 뽑아낸 하판락은 다시 그 피를 고문 피해자인 이미경을 향해 뿌렸다. 증언을 거부하면 또 주사기로 착혈한 후 고문 피해자의 몸이나 벽에 피를 뿌리는 행위를 반복했다. (…중략…) 고문을 당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일은 내가 고문당할 순서를 기다리는 것과 또 하나는 다른 이가 고문당하는 것을 지켜보는 것”고 한다. -오마이뉴스 2013년 3월 1일 자. 최후의 친일파, ‘고문귀신’ 하판락을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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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판락./MBC

하판락은 해방 이후에 미 군정 경남도 제7경찰청 회계실 주임으로 있으면서 일본인 적산처리(일본이 남겨 놓고 간 주인 없는 재산)를 맡았다. 이 과정에서 엄청난 재산을 모았다. 1949년 1월 반민특위에 체포될 때 당시 부산시민들은 “당장 여기서 우리가 처리할(죽일) 테니 맡겨 달라”고 애원했다고 할 정도로 원성이 높았다.

노덕술, 하판락이 고문으로 이름을 날렸다면 독립운동가를 숱하게 체포한 김덕기는 거물 친일 경찰로 이름을 날렸다.

김덕기는 1890년에 태어나 1913년에 순사보로 일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반민자 죄상기>에 따르면 그가 체포하고 송치한 독립운동가·항일인사가 무려 1000명에 달하고, 그 가운데 10%가 사형을 언도 받았으며, 10%가 무기징역, 10%가 10년 이상 형을 받았다고 한다. 김덕기에게 붙잡힌 사람 가운데 대중들이 알고 있는 유명한 사람으로 도산 안창호, 조봉암, 박헌영, 오동진 등이 있으며, 창의단 단장 평강열, 낭림단 단장 장창현,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 정의부 이진무, 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 정의부 김형출 등이 있다. 김덕기로 인해 독립운동은 엄청난 타격을 입었다.

이 외에도 독립운동가들을 잡기 위해 백두산을 뒤지고 경기도 경찰서 형사과장을 지낸 최린, 하도 고문을 잘해 ‘출장고문’을 다닌 노주봉 등 일제시대는 그야말로 친일 악질 경찰들이 활개를 치고 다닌 시대였다.


4. 조작의 달인 ‘노덕술’


이렇듯 노덕술 외에도 만만찮은 이들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노덕술이 ‘친일 경찰의 대명사’로 인식된 것은 바로 해방 이후 화려한 그의 행적 때문이다.

1945년 8월 15일 일제 패망 직후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에 잠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인사로 지목돼 구금당하게 된다. 얼마 후 노덕술은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다.

1945년 말 당시 경찰 내부에서는 치열한 논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수도경찰청장이었던 장택상과 경무부장(경찰청장 격) 조병옥은 친일 경찰을 재등용 하자는 입장을 펴고 있었다. 반면 경무부 수사국장 최능진은 이를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나 최종적으로 친일 경찰 재등용이 결정되고 노덕술은 요직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에 임명됐다. 당시 수도경찰청 간부들은 이주호 통신과장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제 경찰 출신이었고, 전국적으로도 경위 이상 1157명 가운데 946명(81.8%)이 일제 경찰 출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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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택상 당시 수도경찰청장./위키백과

특히 장택상은 노덕술을 등용하면서 ‘화룡점정의 격’이라고 큰 기대감을 나타냈다. 그는 1946년 4월 6일 우익 거물 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함으로써 경찰 수뇌부에게 인정을 받았다. 자신의 지위가 확실하다는 것을 확인한 노덕술은 다시금 고문을 일삼기 시작했다.

1946년 5월 15일 조선공산당 정판사 사건이 일어났다. 조선공산당 인사들이 정판사라는 인쇄소에서 위조지폐를 찍어내 유통시켰다는 것이다. 당시 조선공산당 재정부장 이관술이 노덕술에게 체포돼 고문을 받았다. 사실 이관술은 노덕술과는 구면이다. 이관술은 노덕술과 같은 울산 출신으로 노덕술보다 3살 아래다. 이관술은 일본 유학을 갔다 온 엘리트로 조선공산당에서 항일운동을 했다. 이관술은 1940년 초반에 노덕술에게 여러 번 고문을 당했다. 이병주가 쓴 <남로당>에는 이관술과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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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총독부 경무국./독립기념관

“이관술은 몇 번 체포되고 어떤 혹독한 고문을 받아도 전향하지 않았다. 일제시대 고문왕으로 알려진 노덕술이란 경찰관이 있었는데 그의 손에 걸리기만 하면 어떤 애국지사도 배겨내지 못했다. 그런데 이관술은 노덕술의 손에 세 번 걸렸는데도 전향을 하지 않았다. 따라서 항일운동을 하다가 왜경에게 잡혀 그들의 고문을 못 이겨 전향한 사람들에게 이관술은 눈부신 존재였다.”

-<경상일보> 2014년 11월 16일 자 ‘인물로 읽는 울산유사 (128) 일제 강점기 항일운동을 펼쳤던 이관술과 그를 고문했던 노덕술'

노덕술은 이번에는 이관술을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다. 그러나 이관술은 재판에서 고문 때문에 허위 진술을 했다고 밝혔다. 이들의 자백 이외에 유일한 증거는 1만 원 위조지폐 2장에 불과했으며, 조선노동당이 재정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는 증거도 없었다. 그렇지만 재판부는 이관술에게 종신형을 선고했고, 이관술은 한국전쟁 직후 처형됐다. 이 정판사 사건으로 조선공산당이 불법화됐고, 좌익세력을 탄압할 근거가 생겼다. 노덕술은 우익 진영에 큰 공을 세운 셈이다.

노덕술과 이관술의 악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2014년 울산광역시에서 ‘울산의 인물’이라는 책자를 만들었다. 울산을 빛낸 인물 587명이 선정됐는데, 여기에 노덕술과 이관술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그러나 노덕술의 친일 문제가 불거지면서 논란이 일어났다. 최종적으로 울산발전연구원 울산학연구센터는 노덕술은 친일을 이유로, 이관술은 공산주의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두 사람을 ‘울산의 인물’에서 제외했다. 두 사람의 악연은 죽은 후에도 이어진 셈이다.

해방 이후 승승장구하던 노덕술이 암초를 만난 것이 바로 처음에 언급했던 박성근 고문 치사 사건이다. 노덕술은 경무부(경찰청)에 체포됐다. 당시 수도경찰청장 장택상은 노덕술 체포에 반대했으나 막지 못했다. 장택상은 1948년 7월 24일 수도경찰청 부청장 김태일을 경무부로 보내 ‘문의할 것이 있으니 노덕술을 잠시 풀어 달라’고 했다. 그 길로 김태일은 노덕술을 데리고 어디론가 은신해 버렸다.

노덕술이 은신 중이던 1948년 10월, 또 다시 위기가 닥쳐온다. 바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가 출범한 것이다. 반민특위가 악질 고문귀신인 노덕술을 가만히 둘 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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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 조사부 책임자 회의 후 기념촬영/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1948년 10월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는다. 백민태는 만주에서 항일운동을 하다 해방 후 우익에 몸담은 인물이다. 여운형 집에 폭탄을 설치해 여운형 암살을 기도하기도 했으며, 중국인 상인인 이옥청을 납치하기도 했다. 노덕술은 백민태에게 ‘백 동지는 나와 우리 경찰을 위해 전적으로 협력할 용기가 있는가?’라며 접근했다. 노덕술은 백민태에게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최난수와 수도경찰청 사찰과 차석 홍택희를 소개시켜 준 다음 당시 수도경찰청 중부경찰서장이었던 박경림을 통해 매일 집결지를 알려주었다. 노덕술은 백민태와 함께 매일 같이 만나며 치밀하게 반민특위를 무력화시킬 방법을 고민했다.

노덕술-백민태 일당이 구상한 내용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하다. 반민특위 위원, 국회의원, 반민특위 특별검찰관, 반민특위 특별재판관 등 15명을 암살하고, 상황을 고려해서 검찰총장 권승렬도 암살하기로 했다. 재정 분야는 친일 재벌인 박흥식, 언론 분야는 친일 경찰 출신이면서 극우 신문 ‘대동신문’의 사장인 이종형, 경찰 분야는 노덕술이 담당하기로 했다.

이들의 계획은 다음과 같다. 우선 암살 대상자들을 돈이나 기타 방법으로 유혹해 38선 인근까지 데리고 간 다음, 이들을 사살하고 경찰에서는 ‘이들은 원래 공산당의 프락치였는데, 월북하려는 것을 경찰이 저지시키려 하니 완강히 저항하다가 경찰의 총에 숨지게 됐다’는 식으로 발표하면서 사건을 무마하자는 것이다. 사건의 실행자인 백민태에게는 권총과 수류탄 5발, 자금 17만 원이 지원됐다. 이 엄청난 음모는 1949년 1월 24일 노덕술이 반민특위에 체포된 후 1월 26일 백민태가 자수하면서 드러났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노덕술은 반민특위 특경대의 끈질긴 추격 끝에 체포됐다. 노덕술은 체포 당시 경찰에서 지급한 것으로 추정되는 지프차가 한 대 있었고, 호위 경찰관 4명이 그를 따라다녔다고 한다. 여기다 권총 6자루에 현금 30만 원까지 갖고 있었다. 그가 이승만 정권과 친일 경찰들에게는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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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요원 암살음모사건 공판이 열렸던 4호 법정/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디지털 아카이브즈

노덕술 체포와 백민태의 자수로 인해 노덕술은 일약 화제의 인물이 됐다. 반면 이승만은 노덕술 체포에 크게 놀랐다. 이승만은 대통령이 되기 전에 이화장 자택에 불러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잘 수 있다’고 격려할 정도로 노덕술을 아꼈다.

노덕술이 체포됐다는 소식을 들은 이승만은 국무회의를 열고 ‘노덕술을 체포한 반민특위 특경대를 체포하라’고 지시를 내리고, 반민특위에 공식적으로 석방을 요구했다. 또 한편으로는 ‘정부가 보증을 서서라도 석방할 수 있는 방법을 알아봐라’고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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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민특위에 체포되는 노덕술(왼쪽). 오른쪽은 김연수(김성수 동아일보 사주의 동생)./MBC

비록 반민특위 암살 음모는 노덕술의 체포로 실패로 돌아갔지만, 노덕술이 기획한 음모는 유사한 방식으로 재현된다. 1949년 4월, 이승만 정권은 진보성향의 국회의원인 김약수, 노일환, 이문원 등이 남로당 공작원과 접촉해 정국을 혼란시키려 했다는 이유로 체포했다. ‘국회 프락치 사건’으로 불리는 이 사건으로 반민특위는 큰 타격을 받았으며, 1949년 6월 6일 경찰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노덕술은 1949년 7월 병보석으로 풀려났다. 이어 박성근 고문치사 사건, 반민특위 암살 음모 등에 대해서 재판을 받았으나 무죄를 선고 받았다.

1950년 그는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가 헌병대장으로 있던 1952년 부산 정치파동이 일어났다. 1950년 5월 30일, 제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민족주의 계열과 반 이승만 인사가 대거 당선됐다. 위기를 느낀 이승만은 1952년 헌병대와 특무대를 앞세워 국회의원이 탄 버스를 통째로 납치해 헌병사령부로 끌고 갔다. 부산 정치파동의 주도자는 이승만이고, 실행자는 김창룡(특무대장), 원용덕(헌병사령관), 노덕술이었다. 이렇게 국회의원들을 협박하면서 개헌에 성공했고, 이승만은 정권연장에 성공하게 된다.

노덕술은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고 있었다. 당시 이승만 정권 내 노덕술의 위치를 보여주는 문건이 있다. 1951년 5월 5일 무초(John J. Muccio) 주한 미 대사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 따르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한미 양국)신뢰의 결여는 공식적 한국 연락망이나 유엔 연락망을 통해 이용될 수 있는 정보보다 청년모임, 타이거 김(김종원), 몬태나 장(장석윤), 노덕술과 같은 준군사적 조직에 의해 얻어지는 소위 정보 보고서에 무게를 주는 것에서 반영됩니다.”

즉 노덕술 등이 올리는 보고서만 믿고, 미국이 제공하는 정보를 믿지 않음으로써 한미 동맹이 흔들리고 있다는 지적이다.

이승만의 최측근으로 언급될 정도로 노덕술은 당시 무서울 게 없었다. 그러나 1955년 11월 돌연 재판에 회부된다. 당시 보도 기사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노 중령은 1954년 5월 중순 경 부산 제2범죄수사대장으로 재임시에 민간인 오두수로부터 미군 통역과 결탁해 미군 55보급소에서 일본으로 운반키로 한 시가 약 4억 6천만 환 상당의 미군수물자(주로 피복)을 예인선으로 끌어다가 부산시 주둔 병기단의 부두에서 인수하고 매도하고자 하니, 병기단의 부두사용과 물자의 시내운반 및 입고를 주선해 주면 (노덕술에게) 육백만 환을 제공하겠다는 제의에 응하여 (노덕술이)수사를 가장한 교묘한 수법으로 이를 운반해주었다는 것이다.”

-<동아일보> 1955년 11월 12일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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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덕술 뇌물수뢰 기사./동아일보 1955년 11월 12일 자

노덕술은 이 돈으로 선거운동을 하려고 했었다고 한다. 일각에서는 이 사건을 노덕술과 이승만의 ‘양자’인 김창룡 사이에서 일어난 권력투쟁에서 노덕술이 밀려난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장면 총리 비서실장에게 최후의 카드 내밀어”


어쨌든 권력에서 밀려난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다. 그리고 고향에서 1960년 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했으나 8명의 후보 중 6위에 머물렀다. 

낙선 직후인 1960년 가을, 노덕술은 뜻밖의 인물에게 그 모습을 드러낸다. 장면 총리의 비서관인 선우종원, 그는 보도연맹을 만든 우익검사였다. 1951년 장면 부통령의 비서실장을 지내던 중 노덕술 등이 조작한 국제공산당 관련으로 우익임에도 좌익으로 몰려 1952년 일본으로 망명했다. 4·19 혁명 이후 장면 총리가 정권을 잡고 난 후 귀국했다. 도대체 노덕술은 선우종원에게 무엇을 하려 나타난 것일까?

노덕술은 8년 전 국제공산당 사건 문서를 꺼내면서 선우종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홍택희라고 하는 사람이 이렇게 나쁜 짓을 (조작) 했다. 그러니까 그 사람을 잡아 없애는 것이 선우 선생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요.”

홍택희는 노덕술과 함께 반민특위 암살 음모를 꾸민 사람이다. 노덕술은 국제공산당 관련 조작을 홍택희가 한 것처럼 꾸미고, 홍택희 때문에 선우종원이 망명생활을 한 것처럼 인식시키려 했다. 즉 선우종원의 ‘원수’인 홍택희를 제거하는 데 노덕술 자신이 도와주겠다는 것이다. 선우종원이 향후 장면 정부의 실세가 될 것을 계산하고 접근한 것이다.

하지만 선우종원은 국제공산당 관련 조작은 노덕술이 했다는 것으로 이미 짐작하고 있었고, 노덕술이 교활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덕술의 말에 넘어가지 않았다. 선우종원은 노덕술에게 “내가 이렇게 돌아온 것만 해도 천우신조인데, 누굴 죽이고 어쩌고 한단 말이냐. 이것도 하나의 인연이니까 그러지 말고 홍택희 씨를 만나면 손잡고 같이 일하자고 해라”고 했다.

노덕술의 마지막 ‘카드’는 이렇게 실패하고 만다. 노덕술은 1968년 4월 1일 69세의 나이로 사망한다. 특이하게도 노덕술이 죽기 직전까지 살던 궁정동 집터는 지금 청와대 앞 무궁화 동산 자리다. 나중에 궁정동 대통령 안가가 들어서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가 김재규에게 죽는 곳이기도 하다.

의열단을 만들고 항일독립운동을 치열하게 벌였던 약산 김원봉. 그는 1947년 2월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등 수모를 당했다. 의열단 동지였던 유석현 선생의 회고록에 따르면 김원봉은 원통해서 3일 간 울었다고 한다. 꿈에도 그리던 해방 조국이 왔건만 일제시대와 다를 바 없는, 친일 경찰들은 반공투사로 둔갑해 독립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잡아들이는 모습에 절망했을 것이다.

노덕술은 일제시대 고문과 공작기술이 군사독재정권으로 이어지게 하는 중요한 인물이었고 박처원, 이근안 등 현대사를 떠들썩하게 만든 고문기술자들의 대 선배이기도 하다. 따라서 그가 단죄 받지 않고 출세를 거듭할수록 우리 현대사는 뒷걸음치고 말았다.


<노덕술 연표>

-1899년 6월 1일 울산 장생포에서 출생.

-1918년 경상남도 보안과 순사.

-1921년 경상남도 울산경찰서 순사부장.

-1924년 12월 11일 조선총독부 도경부보 시험 합격.

-1926년~1927년 12월 16일 경상남도 거창경찰서 경부보.

-1927년 12월 17일~1931년 경상남도 동래경찰서 근무(사법계 주임). 이때 많은 항일인사, 학생들을 잡아들이고 고문함.

-1932년 경상남도 통영경찰서 근무(사법계 주임이면서 고등계 업무도 함)

-1933년~1934년 2월 14일 경기도 인천경찰서 경부.

-1934년 2월 15일~1938년 11월 8일 경기도 양주경찰서 사법계 주임.

-1938년 11월 9일~1940년 경기도 개성경찰서 사법계 주임.

-1940년 4월 29일 중일전쟁 적극 협력 공로를 인정받아 공로상 받음.

-1941년 경성(서울) 종로경찰서 경부.

-1941년 3월 11일 일본정부로부터 훈8등 서훈.

-1943년 9월 30일 경시로 승진, 평안남도 경찰부 보안과장.

-1945년 8월 15일 일시적으로 평안남도 평양경찰서장, 이후 월남.

-1946년 1월 경기도 경찰부 수사과장에 재임용.

-1946년 9월 제1경무총감부 관방장 겸 수도경찰청 수사과장.

-1948년 1월 27일 박성근 고문 치사, 7월 박성근 시신이 떠오르면서 도주. 경찰 경력 마감.

-1948년 10월 반민특위 암살 음모 기획.

-1949년 1월 24일 반민특위에 체포.

-1949년 7월 반민특위에서 병 보석으로 풀려남.

-1950년 군으로 옮김, 육군본부 제1사단 헌병대장(중령).

-1954년 부산 제2육군범죄수사단(CID) 대장.

-1955년 서울 제15육군범죄수사단 대장.

-1955년 11월 뇌물수뢰 혐의로 파면.

-1960년 7월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 울산 선거구 출마, 낙선(4.24% 득표, 6위).

-1968년 4월 1일 서울에서 사망.

<참고자료>

[자료]저자 미상, <민족정기의 심판>, 혁신출판사, 1949

[자료]김영진, <반민자 대공판기>, 한풍출판사, 1949

[자료]고원섭, <반민자 죄상기>, 백엽문화사, 1949

[자료]친일반민족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도서]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역사비평사, 2006

[도서]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보세, 2011

[전자도서]정길화 외 5인, <우리들의 현대침묵사>, 2012

[도서]반민족문제연구소, <친일파 99인>, 돌베개, 1993

[도서]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편집부, 2009

[논문]송선애, 「해방 후 친일경찰관료 노덕술의 등용 및 활동」, 2010

[방송]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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