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차는 멈췄지만 우리네 삶은 아직 그 길 위를 달리네

네모난 벽에 알맞은 크기로 나있는 창문이 끝없이 이어진다. 반가운 손님을 기다리며 내다보는 창이 아니다. 집주인이 소홀해지는,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창이다. 집주인은 철로를 등지고 살았으리라. 열차 소리에 잠을 깨고 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영원할 것 같은 경적소리는 멈추었고 아무에게도 내보이고 싶지 않았던 창문은 길을 만들었다.

창원시 마산회원구와 마산합포구에 걸쳐 있는 '임항선 그린웨이'.

쓸모가 없어진 철로는 '그린'이라는 단어와 어울리는 작은 숲이 있는 산책로가 됐다.

옛 마산 시민의 삶의 애환을 싣고 달렸던 임항선은 1905년 개통해 마산 항구까지 닿았다. 마산 시내 깊숙이 들어갔다 바다로 간다. 철도 주위에는 사람들이 모였다. 가난했던 시절 피난민의 판자촌이 만들어졌다.

도시화가 가속화하면서 임항선은 석탄을 실어나르는 화물전용 철도로 활용되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현재 철로는 새로운 길이 됐다. 임항선 그린웨이는 마산회원구 석전동 개나리맨션에서 마산합포구 마산세관까지 총 연장 4.6㎞다.

임항선 철로는 총 4.6 ㎞ 산책로로 변신했다. 그 길을 걸으면 평범한 소시민의 일상과 마주하게 된다. /이미지 기자

석전사거리에서 바다를 향해 걸었다.

육교에 오르니 아래에서 보지 못했던 삶이 새롭게 펼쳐졌다. 깨끗하게 세탁한 일복이 빨랫줄에 걸려 있고 LPG통 3개가 나란히 서 있다. 무더운 여름을 대비한 집주인의 손길이 창문에 닿아있다. 까만 햇빛 가림막이 창을 덮었고 언제 적 태풍을 막으려고 했는지 노란 테이프를 엑스자로 붙인 창문이 보인다.

그렇게 산책로의 낮은 나무들 너머로 창들이 이어진다. 대문이 훤히 열려 있는 집도 있다. 마당 안쪽 흰둥이가 낮잠을 자고 낮은 대문은 커다란 보일러 물통을 이고 있다. 집을 지켰을 담벼락의 창살은 세월을 입고 색이 변했다. 밑으로는 녹물이 흘렀다.

방 한 칸에 문 하나를 둔 집은 산책로가 마당이다. 수십 번 빨아 입었을 옷이 널려 있고 작은 꽃밭도 만들어져 있다.

임항선 그린웨이는 숲을 산책하기보다 오래된 골목에 들어선 인상을 준다.

창문 너머로 들리는 누군가의 전화통화와 TV 소리. 철로를 중심으로 들어선 오래된 미장원과 소주방에서는 중년 여성들의 수다가 들렸다 멈췄다. 한낮의 적적함을 달래려는지 횟집 사장은 식탁 위에서 잠을 청하고 수족관 소리만 그 정적을 깬다.

하지만 철길시장에 들어서자 분위기가 금세 바뀐다. 재개발을 결사반대한다는 붉은 현수막이 눈에 띈다. 철봉으로 골격을 만들고 비닐을 덮은 노점에는 채소와 생선이 놓여 있다. 오래된 아파트 담벼락 밑에서 할머니들이 칼로 생선을 손질한다. 담에는 전세와 달세를 놓겠다는 전단도 덕지덕지 붙어 있다.

노점 앞에 촘촘히 세워진 파라솔을 하늘처럼 쳐다보니 이색적이다. 사진 찍을 타이밍이다. 그런데 그 모습이 맘에 들지 않았던지 한 상인이 불러 세운다. 재개발로 삶의 터전을 잃을 판에 한가하게 하늘이나 구경하느냐고 말한다. 그들의 삶의 터전에 깊숙이 들어가 낭만만 따졌던 마음이 뜨끔해진다. 그러고 보니 유독 집을 내놓거나 빌려주겠다며 손으로 꾹꾹 눌러쓴 전단이 많다. 떠나고 싶은 사람이 많은 걸까.

1970년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는 철길시장은 이제 앞날을 알 수 없다. 재개발이 언제 어떻게 진행될지 그들도 모른다.

철길시장을 빠져나오자 거대한 대기업 아파트가 나타난다. 그러다 작은 창문이 다시 이어진다. 쉼터로 꾸민 북마산역이 보인다. 그린웨이 곳곳마다 놓인 의자는 어르신들 차지다. 이야기를 하고 운동을 하고 잠을 청한다.

오래된 목조건물이 나타났다. 아무도 살지 않는 듯 누구의 손길도 느낄 수 없는 집. 2층 창문 너머로 꽃무늬 커튼이 달렸다. 조금 더 걸으니 정말로 꽃이 많다. '그린웨이테마꽃길'인데 성호동 주민이 지난해 4월 코스모스와 튤립, 영산홍을 심었단다.

몽고정에 닿기 전 오르막 계단이 나타난다. 문신미술관 입구다. 마산세관으로 갈수록 작은 창은 사라진다. 대신 양쪽으로 아파트가 마주 보고 있다.

여름날 그늘을 찾아다니며 천천히 걸으면 3시간 정도다. 가뿐하지도 그렇다고 숨이 벅차지도 않다. 탁 트인 마산 바다 대신 자꾸만 메워지는 풍경에 발길을 돌린다.

임항선은 구간 구간 다른 삶을 보여준다. 오늘도 고층 빌딩을 올려다보느라 힘이 빠졌다면 도심에 깊숙이 들어가 낮은 담벼락과 낮은 창에 눈을 맞춰보자. 보통의 일상이 있다.

기사제보
저작권자 © 경남도민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