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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 맞닿은 물길에 의병 기개 살아 숨쉬고

[남강 오백리] (28) 송도교∼남강 끝자락 기강나루

권영란 기자 kyr65@idomin.com 2015년 07월 03일 금요일

남강 끝자락이다. 낙동강이 가까워질수록 물 흐름이 느리고 편안하다. 의령군 지정면 송도나루(현 송도교)에서 낙동강과 합수하기까지 이 구간의 물길에는 천강홍의장군 곽재우와 역사가 기록하지 못한 수많은 의병들의 이야기가 얽혀 있다. '의병의 강'이며 '곽재우의 강'이다. 임진왜란 당시 곽재우가 최초로 의병을 결성한 곳도 이곳이고 의병들의 최초 전승지도 이곳이다.

◇'물굼티' 이어 '한심이들'까지

남강의 최하류 지역은 의령군 지정면과 함안군 대산면이다. 남강이 낙동강과 합류하는 길목이다. 두 지역은 또 낙동강을 가운데 두고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를 건너다보고 있다.

마지막 구간은 의령 쪽에서 톺아보자면 송도교(송도나루)에서 기강나루까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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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령군에 따르면 지정면은 남강을 낀 여타의 마을과 마찬가지로 우기에는 침수피해가 자주 발생하는 곳이다. 강변지역 지명을 살펴보면 대부분 물이 많이 드는 곳임을 알 수 있다. 마을 앞으로 남강이 가까이 흐르는 포외마을도 포외제 둑방이 생기기 전에는 물굼티, 물구디였다고 한다. 장마철이면 길이 막히는 것은 물론 수해를 입어 농사는 늘 반타작이었다니….

김재도(70) 씨는1969년 남강댐이 완공되고 1970년대 말 이곳 마산리 오천리를 비롯해 경지정리를 한 뒤에야 농사를 안정적으로 지을 수 있었다 한다.

"남강댐이 맹글어지고는 물 걱정이 없었제. 그것도 루사 때는 도로아미타불이었지만서도. 동쪽에서는 낙동강 물이 들이치지 밑에서는 남강이 밀려오지 난리도 그런 난리가 있었으까예. 그때 고생한 걸 생각하몬 말로 다 못하지예. 다시 복구한다고 몇 년 동안 얼매나 고생했는지…."

2002년 태풍 루사를 겪고서야 수백억 원을 들여 이 일대에 제방사업이 실시되었다. 남강을 따라 오천제, 포외제 등이 당시 보강하거나 새로이 건설한 것이다. 동시에 배수개선 사업도 이뤄졌다.

마산리 강변마을 돈지는 돈지진(遯池津·돈지나루)으로 불렸다. 현재 보덕로가 산과 강 사이를 가르며 놓여 있지만 이곳 주민들이 황새등, 먼당산으로 부르는 줄기가 남강으로 이어지면서 산자락이 살짝 강물에 닿아 있다.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둔치공원에서 바라본 남강과 낙동강 물길. 이곳은 두 물길이 합수하는 지점으로 의령군과 함안군, 창녕군 트라이앵글 지역이다. 가운데 멀리 보이는 곳이 남강.

겨울 서너 달을 빼고는 일 년 내내 물난리를 겪어야 했던 이곳 돈지마을은 잠깐 몇 개 지명만 주억거려도 이곳 마을이 어떤 곳인지를 충분히 알 수 있다. 돈지마을 어귀에 있는 고개가 한심이고개다. 한심하다가 아니라 근심 걱정으로 가득한 한숨, 경상도 토박이말로 '한심'을 뜻한다. 고개에서 보면 강변들이 제법 넓게 펼쳐져 있고 그 뒤로 동쪽 낙동강 방향으로 이어지는 남강 물길이 눈에 들어온다. 물난리만 나면 주민들은 물을 피해 이곳 고개로 몰려왔다. 이곳에서 남강물이 들을 치고 들어와 논밭을 시커먼 흙탕물로 만들어놓는 것을 한숨과 눈물로 바라봐야 했던 것이다.

"농사 좀 할라하모는 장마가 들어 물이 넘치고 수확을 할라하몬 태풍이 와 또 물이 넘치고…. 집집마다 한심(한숨)소리가 그치질 않았어예. 걱정이 태산같으모는, 와 우리가 땅이 꺼지라 한심 쉰다안쿠요. 그거랑 같은 거지예."

주민들은 그래서 '한심이고개'이고 강변들은 '한심이들'이라고 말한다. 늘 '물구디'가 되곤 했던 강변쪽 마을 이름도 '한심이'다. 대대로 강 때문에 마음고생 몸고생 했던 주민들의 수난사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이곳 돈지나루에서 임진왜란 당시 의병들의 첫 승전지인 기강(거름강)나루까지는 뱃길로 10리가 채 되지 않는다. 남강가 돈지나루 맞은편은 함안 대산면 장포나루이다.

◇보덕각·쌍절각에 새겨진 의병정신

남강의 마지막 샛강으로 짐작되는 봉곡천과 두곡천이 남강 물길에 닿는 것을 보며 기강로가 무듬이들로 살짝 굽어지는 길모퉁이쯤이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보덕각(報德閣)과 쌍절각(雙節閣)이 나란히 있다. 모두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6호이다.

보덕각은 임란왜란 때 나라 안에서는 처음으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무찌른 '천강홍의장군', 충익공 곽재우를 기리는 것으로, 영조 때 세웠다. '유명조선국 (有明朝鮮國) 홍의장군충익공곽선생(紅衣將軍忠翼公郭先生) 보덕불망비(報德不忘碑)'라 적혀 있다.

'홍의장군(紅衣將軍)'으로 불린 곽재우는 남명 조식의 제자이고 외손사위였다. 남명학파라는 학맥과 사상적 기반을 가진 그였기에 도망가는 관군에 분노하며 최초로 의병을 일으킬 수 있었을 것이다. 이는 전국 각 지역 의병 결성의 도화선이 되었다.

곽재우의 활약은 이미 정암진 전투에서 밝힌 바 있지만 이곳 기강나루에서도 그가 구사한 전술은 놀랍기만 하다. 곽재우는 기강언덕에 미리 의병을 매복시키고 낙동강의 수로를 따라서 이동하는 왜군 선단(船團)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고, 먼저 수로 길목마다 물 밑으로 나무막대를 세워 왜선의 진로를 막았다. 그리고 매복병을 풀어 급습, 왜군을 모조리 몰살시켰다 한다. 전란 후 여러 차례의 관직 제의를 받았지만 핑계를 대 받지 않거나 하는 둥 마는 둥했다. 말년에는 창암진에다 터를 잡고 스스로 망우당이라 호를 정하고 낙동강가에 망우정을 짓고 솔잎만 먹고 살았다 한다.

그 옆 쌍절각은 역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하다 순절한 후지당(後知堂) 손인갑(孫仁甲)과 손약허(孫若虛 또는 若海)의 충절을 기리는 것으로 광해군 때 세웠다. 손인갑(?∼1592)은 조선 중기 무신으로 의병장이다. 합천을 무대로 의병활동을 펼쳤다. 그해 6월말에 있었던 합천 초계(草溪) 마진전투(馬津戰鬪)에서 낙동강을 거슬러 무기와 물자를 보급하던 왜선단(倭船團)을 모조리 격파했다. 하지만 말을 타고 달아나던 왜군을 뒤쫓아 가던 중 그만 강 가운데 모래 진흙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하고 전사했다고 한다. 손인갑의 아들 손약허도 이로부터 몇 달 후인 10월 이 일대에서 최후를 맞았다니….

반구정(伴鷗亭)은 조선중기 학자인 두암(斗巖) 조방(1557~1638)이 지은 것이다.

알려지지 않은 임진왜란의 생생한 참상을 기록했다는 정경운(鄭慶雲)의 <고대일록>(孤臺日錄)에는 손인갑·손약허 부자의 죽음을 아래와 같이 기록해 놓았다.

'…1592년 임진년 10월 30일. 성주를 점령한 적들이 법수촌을 침략하니 합천의 가장 김준민이 힘을 다해 싸우며 방어하다 철환이 넓적다리에 명중되었고, 전투를 벌이던 전사 다수가 피해를 입었다. 전 봉사 손약허는 전사했다. 손약허는 인갑의 아들이다. 부자가 함께 나라의 일에 어진 죽음을 맞게 됨으로써 충효의 광채는 천고에 빛날 것이지만 한 가문에 자손이 남지 못하게 되었다. 피눈물을 흘리는 청상과부가 산속의 무덤에서 따라 죽고자하며 의지할 곳이 없게 되었으니 참담한 일이다.…'

비각을 뒤돌아 나와 잠시 강변도로를 타고 산책하듯이 걸으면 이내 남강 끝자락 기강나루에 닿는다. 남강과 낙동강 양측에 모래 채취선인 듯한 배가 정박해 있다. 남강 물길 끝에는 필터 장치인 듯 강폭만큼 긴 띠가 둘러쳐져 있다.

기강나루는 의령군에 있던 14곳의 나루 중 남강과 낙동강의 합류 지점으로 '거름강'이라 불렸다. 예전에는 의령에서 창녕 남지로 가는 주요 나루터였다. 의령군에서는 이곳 기강나루에 쉼터를 만들고 성산리 강변 둔치를 따라 '호국의병의 숲'을 조성했다. 맞은편 창녕군 남지읍 용산리 둔치에도 유채꽃과 산책로 등이 조성되어 있다.

◇반구정·합강정에서 남강을 톺아보다

함안군 대산면 3.4km 장포 둑방길 끝에는 합강정과 반구정이 있다. 용화산 자락 강가 두 개의 정자이다. 남강과 낙동강 두물머리를 톺아보기에 가장 좋은 곳이다.

반구정(伴鷗亭)은 조선중기 학자인 두암(斗巖) 조방(1557~1638)이 지은 것이다. 두암은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으로 활약했으며 기강나루를 지키고 곽재우와 함께 정암전투를 같이 치렀다 한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두암과 같이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사람들이 모여서 뱃놀이를 하거나 시문을 짓던 곳이다. 함안군에 따르면 반구정은 원래 낙동강 웃개나루(上浦)에 있었다. 세월이 가면서 강기슭이 자꾸 침식해 보존을 위해 1866년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고 한다.

강 건너 가까이에는 망우정 곽재우가 있어 이들은 더러 뱃길로 왕래를 하곤 했단다. 곽재우가 근심을 잊고 살겠다며 망우정을 지었듯이 조방은 날아가는 기러기와 더불어 여생을 보내겠다고 한 것이다. 숨어 지내는 즐거움이었으리라. 반구정은 낙동강 일출을 제대로 보고 느낄 수 있는 곳이다. 강 언덕에는 수령 600년이 넘었다는 느티나무가 있다.

남강과 낙동강 두물머리 언덕에 있는 합강정으로 가는 산길에서는 아스라이 남강 끝자락과 기강나루가 보인다.

합강정(合江亭)은 반구정에서 서북쪽으로 산길 500m를 오르락내리락하며 가닿는다. 산길에서 힘들어 고개를 들라치면 아스라이 남강과 낙동강 두 물길이 합류하는 것이 보인다. 합강정은 조선 인조(1633년)때 간송(澗松) 조임도(1585∼1664)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차례 중수를 거치고 현재 건물은 1980년에 보수를 했다. 이곳에서 경남도 유형문화재 제180호인 간송문집책판 및 금라전신록책판이 나왔다.

합강정 앞에서 동남으로는 낙동강 물길과 창녕 남지철교가 들어온다. 언덕에는 수령 350년 은행나무가 두 물길을 따라온 강바람에 이파리들이 푸른 물고기떼처럼 파닥거린다. 서북 방향으로 살짝 틀면 남강 물길 끝자락이다. 남덕유산, 지리산 골짝골짝에서 흘러온 물줄기들이 임진년 그때처럼 기강나루(岐江津)에 닿았다. 그리고 낙동강이다. 물빛이 다르다.

두 강이 합해지는 곳에 있어 합강정. 합강정은 조선 인조(1633년) 때 간송(澗松) 조임도(1585∼1664)가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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