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곡되고 오염된 노동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싸움이라면 내가 하겠다

하영란 씨는 2011년 (사)경남여성회 주관 여성주의 글쓰기 프로그램에서 처음 만났다. 언제부터인지 알 수 없이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사)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가 주관하는 수출지역 8~90년대 여성노동자의 노동운동 기록 작업  '언니들에게 듣는다! 살아있는 역사들'에서 친구 아닌 여성 노동자로서 그가 살아온 이야기를 들었다. 그 이야기는 지금의 내 친구 하영란을 있게 한 모든 것이라 할 만했다. 자신을 사랑하고 노동을 사랑하고 낭만을 잃지 않으려 애썼던 청년. 당당한 노동자로 자신의 신념대로 살기 위해 끝없이 분개하고 저항한 그의 이야기는 한 생명의 온전한 살아냄이었고, 건강한 생명의 자유로운 움직임이었다. 멈추지 않고 흐르는 강물 같은 이야기였다. 굽이굽이 흐르며 제 몸에 새긴 강의 깊이를 엿볼 수 있는 이야기였다. 

▲ /사진 이옥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아버지의 유난한 막내사랑, 가난하지만 풍족했던 어린 시절

하영란 씨는 1969년 사천군 산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3남 5녀 중에 막내로 태어났을 때 이미 부모님은 연세가 높았다. 아버지의 막내 사랑이 유난하셨다. 외출에서 돌아오시는 아버지의 두루마기에는 항상 막내딸을 위한 무엇이 들어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가난 속에서도 꿈이 있었던 사람으로 기억된다. 적은 논을 팔아 더 벽지로 들어가 황무지 산을 사신 아버지. 산 아래 집으로 들려오던 규칙적인 괭이 소리, 똥지게를 져 나르는 아버지의 뒷모습. 오로지 자신의 노동으로 산을 개간하여 어린 과실수를 심고 가꾸신 아버지. 그런 아버지와 아버지의 삶의 방식을 그는 무척 사랑했다.

"점심때는 보리밥도 못 먹어서 수제비 아니면 감자, 고구마, 벌레 먹은 밤, 토란 이런 종류들을 삶아서 먹었어요. 그런데 그게 저에게는 풍요로움으로 남아있어요. 그리고 시골 자연이 준 기억이 되게 많아요. 그게 공장 생활하고 힘들 때 견디게 해준 자양분으로 남아있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동양통신 입사, 현장 공순이인 게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열두 살 영란에게는 가난한 현실만 오롯이 닥쳐왔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과 죽음을 사색하던 그가 내린 결론은 독립과 자립이었다. 사천 집을 떠나 진주 선명여자상고에 진학하면서 산동네 달세 방에서 자취를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상과 공부가 적성에 맞지 않았다. 책과 사색에 빠져 있는 얼치기 상고 졸업생의 진로는 순탄치 않았다. 대학시험 준비도 해보았다. 그러던 중 넷째 언니가 다니던 동양통신에 입사하게 된다. 1990년 5월, 스물두 살 때다.

"넷째 언니가 동양통신에 간접부서인 자재과에 다니고 있었어요. 일단 동양통신에 들어온나. 그럼 간접부서로 빼주겠다 그래서 현장으로 입사하는데, 나는 좀 있으면 간접부서로 빠질 거라고 생각했어요."
 
남느냐 떠나느냐의 고민은 무의미해졌다
 
"제가 입사한 데가 제조 1과 마운트 1라인이었어요. 마운트란 컨베이어가 하루 종일 돌아가는 곳이었어요. 앉아서 작은 부품을 삽입하는 거였는데, 머리카락같이 가는 거를 오른손 왼손으로 초를 다투며 컨베이어가 흘러가기 전에 다 꼽아야 해요. 저처럼 머릿속 고민만 하던 애가 그걸 펼쳐 놓고 로봇처럼 정확하게,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양만큼을 해야 하는 거예요. 그때 제 별명이 가제트 팔이었어요. 컨베이어는 계속 돌고 기판은 다 꼽기도 전에 흘러가버리니 팔이 자꾸 따라가며 길어질 수밖에요. 그때 앉아있던 제 의자가 비틀어져 있고 한쪽 엉덩이도 비틀어져 새까맣게 돼 있었어요."
▲ /사진 이옥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현장은 '정말 무슨 이런 곳이 다 있나' 싶었다. 화장실을 못 가 얼굴이 노래서 쓰러지지는 걸 옆에서 보기도 했다. 작업시간의 벨트는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머물 곳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간접부서로 갈 수도 없었다. 딱 1년만 참고 돈을 벌어 그만두겠다고 생각했다.

"간접부서로 가겠다는 마음을 그 현장을 보면서 접었어요. 현장이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나만 간접부서로 옮긴다는 건 동료들에게 죄를 짓는 거 같았어요. 이렇게 힘든데 어떻게 나만 빠져나가? 안 되지…. 그런 마음이었어요."
 
얼마 뒤 노동조합(이하, 노조) 편집부에 들어가게 된다. 노조활동에 대한 인식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어용노조에는 노동조합민주화추진위원회(이하, 노민추)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상집과 대의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노조 민주화를 위해 활동하던 사람들이 비밀스럽게 어용노조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 노민추와의 첫 만남이었다. 그 언니들과 가까워졌다. 왜 하영란 씨였을까?
 "제가 계속 분개하잖아요. 무슨 생각은 없지만 화장실 못 가서 쓰러지는 사람을 보고 분개하고, 생산량이 이렇게 많을 수 있느냐고 분개하고, 어떻게 인간이 이렇게 노동을 할 수 있느냐 분개하고, 끝없이 분개하고 있잖아요. 그런데 어찌 저를 내버려 둘 수가 있었겠어요." 
 
그러던 그는 회사를 떠나겠다는 마음조차 접고 현장에 남겠다고 결심한다. 동료들 때문이었다.

"입사 1년째 되는 날, 과감하게 회사를 하루 재꼈어요. 뭔가 결단을 내려야 할 것 같았어요. 빛도 안 들어오는 현장 말고 햇살이 있는 기숙사 옥상에 앉아 하루 종일 생각했어요. 오월이니까 봄 햇살이잖아요. 난 동료들의 가쁜 숨소리를 외면할 수 있는가? 난 무엇을 할 것인가? 그런 생각을 끝없이 했어요. 그때 제가 내린 결론이 이제는 남느냐 떠나느냐의 고민은 무의미해졌다. 이제는 내가 이 현장에서 어떻게 견디느냐, 분쇄되느냐 치유되느냐 그거였어요."
 
그즈음 동료 언니가 쓰던 자취방을 살림까지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어 처음으로 제대로 된 방을 갖게 된다. 마음 맞는 동료들과 언제든 만날 수 있는 그 방이 또 하나의 위안이었다.
▲ /사진 이옥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수면 위로 드러난 노민추 활동과 노조위원장 선거
 
1992년 동양통신과 소와가 합병되어 소니전자로 이름이 바뀐다. 그러면서 노조위원장 선거를 맞는다. 어용노조에서 수석부위원장으로, 노민추 활동을 해왔던 김명화 씨를 위원장 후보로 내기로 한다. 그전에 이미 현장에서 노민추의 존재는 드러나 있었다. 91년도에 어용노조에서 노동조합 간부 해외연수를 발표하면서 조합비를 사용해서 사실상의 관광을 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반대 목소리를 내고 유인물, 화장실 낙서 등의 활동을 펼친 바가 있었기 때문이다. 위원장 출마는 민주 노동조합을 만들겠다는 선언이었다. 화장실 낙서부터 탈의장에 유인물 넣기 등을 수시로 하면서 현장에서 새로운 노동조합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무르익었다. 

"선거 날 우리가 역으로 당했어요. 화장실과 탈의장에 대량으로 유인물이 살포됐는데요, 소니 현장에 마창노련 붉은 깃발을 휘날리자 이런 구호들이 있는 유인물이었어요. 우리는 그동안 한 번도 그런 원색적인 단어를 써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유인물 밑에 우리 이름들도 나왔어요. 그동안 우리가 유인물을 내고 낙서작업을 해왔기 때문에 사람들은 다 우리가 낸 것처럼 된 거예요. 회사 쪽에서는 바로 그 유인물을 들고 조례, 종례를 통해서 문을 잠가 놓다시피 하고 이 유인물을 봐라, 노동조합이 바뀌면 수미다나 TC전자처럼 다 빠져나간다, 여기는 외자 기업이다. 너희들 직장을 잃고 싶으냐, 저 사람들 뽑아주면 빨갱이다, 그런 식으로."
 
선거 결과는 낙선이었다. 이어 치러진 대의원선거에서 하영란 씨가 압도적으로 당선되자 선거구를 무시하고 간접부서로 부서 이동을 시켜버린다. 일도 주지 않고 책상에 가만히 앉혀놓기만 했다. 1993년의 일이다. 대책이 필요했다. 조합원과 만날 수 있는 통로를 만들어야했다. 소니전자에 대중모임 답사반과 노래반이 탄생하게 된 배경이다.
▲ /사진 이옥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제가 답사반 자료준비를 하면서 새롭게 뭔가를 많이 보게 되었어요. 또 한쪽에서 노동자로서 저를 받아들이기 시작했어요. 옛날에 알던 사람에게 내가 공장에 다닌다는 말을 안 했어요. 소니에 다니기는 하는데 간접부서인 것처럼 얘기를 하고…. 저는 공순이인 게 정말 부끄러웠어요. 그랬는데 제가 노동의 역사라는 책을 읽고, 아 원래 노동은 인간을 발전시켰고 노동은 신성한 것이었구나, 자본주의에서 노동이 오염되고 왜곡 된 거지 원래 노동은 그런 게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제가 노동자란 사실을 당당하게 여기기 시작했어요. 그러면서 활동가가 뭔지 노동운동이 뭔지는 모르지만, 원래 신성한 노동이 왜곡되고 오염되었다면 그것을 신성하게 만드는 것이 싸움이라면 그것을 내가 해야 한다, 이렇게 받아들였어요."
 
1995년 회사는 노민추 활동에 참여하던 동료들을 1공장에서 조합원 수가 훨씬 적은 2공장으로 모두 강제 발령을 낸다. 발령은 내놓고 소속을 주지 않았다. 나이 든 남자 관리자들은 욕지거리를 해대며 기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다가 대의원 선거나 조합 선거 때가 되면 또 부서이동을 시켰다. 쉬는 시간만 되면 조합원들을 만나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가기 바빴다. 2공장으로 가고 그해 다시 노민추에서 노조위원장 후보를 낸다. 그동안 답사반, 노래반 대중모임 운영뿐만 아니라 일상적인 활동과 싸움을 꾸준히 해왔기에 이번 선거만은 자신이 있었다. 유세문으로 현장의 문제를 실감이 나게 알리고 공감을 얻어냈다. 

"생산량을 좀 더 빼놔야하기 때문에 화장실에 갈 때도 골무를 끼고 갔어요. 음식을 먹을 때도 골무를 끼고 먹었어요. 납을 만지던 손이더라도 골무를 끼고 먹었어요. 그래서 유세시간에 '지금 골무 끼고 계신 분' 하면 모두 골무 낀 손을 치켜들고 이랬어요. 그러면 '우리가 왜 골무도 못 벗고 일을 하고 있느냐' 이 고통을 누구보다 겪었던 우리가 현장을 바꿔가야 된다 이런 얘기부터, 유해물질 등 갖가지 이야기를 유세에서 실감나게 했어요."
 
유세반응이 점점 뜨거워지자 어용노조와 회사 측은 유세시간을 없애고 유세를 방해했다. 투표하는 날 분위기가 살벌했다. 촉탁직, 기사, 남자 직원들이 모두 운동화를 신고 개표장을 버티고 떠나지 않았다. 개표할 때 분위기는 더욱 살벌해져서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았다. 선거에 이기면 구사대가 뜰 것만 같아 바깥에 있는 사람들에게 비상연락망을 만들어놓기도 했다. 결과는 낙선이었다. 관리자들이 표를 바꿔치기했다는 등의 이야기가 돌았지만 돌이킬 수 없었다. 어떻게 해도 이길 수 없다는 패배감에 사로잡혔다. 무기력했다.
▲ /사진 이옥선 마산창원여성노동자회

"그때부터 우리의 싸움은 우리를 견디는 자신과의 싸움이었어요. 노민추는 술 먹는 모임으로 바뀌었어요. 그때 우리 모임의 공식 이름이 '말리지마'였어요.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술만 먹었어요. 뭔가를 하지 않더래도 우리가 견디는 게 중요했던 시기였던 거 같아요."
 
96, 97년에는 수출자유지역 민주노조사업장 활동가나 각 노민추사업장 활동가들이 모여 수자지역 노동자학교가 열렸는데 거기에 참여하면서 서로 힘을 북돋우기도 했다. 노동 강도가 세기로 이름났던 소니전자는 2001년 서서 일하기 도입 이후 임산부의 잦은 유산과 퇴사자를 만들어냈다. 2002년도에는 몸이 아파서 회사를 더 이상 다닐 수가 없다는 동료에게 산재 신청을 해보자고 제안하고 노민추가 주축이 되어 어렵다는 근골격계 산재 판정을 10여 명 이상 받아내기도 했다. 
 
"일이 정말 힘들었어요. 너무 힘들어서 맥주를 사서 검은 비닐봉지 안에 넣고 빨대를 꽂아서 빨고 그러면서 일을 하러 가기도 하고 별짓을 다 했어요. 어떤 때는 일을 마치고 어린이집까지 아이를 데리러 갈 힘이 없어요, 그러면 중간에 매점에 들러 맥주 한 캔을 사서 빈 속에 그걸 마셔요. 술빨로 힘을 내서 애를 데리러 가는 거예요."
 
그렇게 소니전자 노동자로 싸우고 버텨왔던 2006년 3월. 계획 없던 셋째를 임신하고 첫째 아이의 초등학교 입학을 앞두고 사직서를 낸다. 방과 후 보살펴 줄 사람이 없어 아이를 어딘가로 맡겨야 하는 일은 안 하겠다는 마음에서였다. 마침 명예 퇴직자 모집공고가 나붙었다. 입사 5급, 16년 근무, 퇴사 5급. 관리자의 인사고과에 따라 승급이 이뤄졌던 소니전자에서 16년이란 긴 세월동안 하영란 씨가 회사와 맞서 어떤 노동자였는지 입증하는 기막힌 숫자들이다. 
 
답사반, 일상의 마비작용에서 벗어나 치유와 회복의 시간
 
93년에 만들어진 답사반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다. 10년째 되는 해에는 그동안의 답사지를 추리고 묶어 자료집을 내기도 했다. 작년에는 답사반 20주년 행사도 가졌다. 답사반 벗들이 준비한 글과 그림과 사진 전시를 겸한 행사로 창동에서 시민들에게 공개된 자리였다. 
 
"94년 봄부터는 저희들이 안내답사를 시작해요. 차 한 대에 조합원을 다 모아서 갔는데 사람들은 약간의 참가비만 내고 빈손으로 오면 돼요. 우리가 모든 것을 준비했어요. 주먹밥도 싸고 과일도 싸고 헌신적으로 했어요. 모든 걸 줄려고 했어요. 하루지만 공장에서 나와서 동료들에게 뭔가 대접을 해주고 싶었어요. 그 하루를 대접해주면서 그들에게 나도 마찬가지로 자연과 즐겁게 놀면서 자기를 회복시킬 수 있는 시간이기를 바랬어요. 현장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서도 답사의 의미와 시각을 잘 잡으려고 되게 애를 썼어요."
 
답사반 자료준비는 꽤 오랫동안 하영란 씨 몫이었다. 동료들과 나누고 싶은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밤을 새워 자료를 준비하고 공부했다.

"인간은 존엄한데 나는 나를 너무 사랑하는데 공장이 나를 자꾸 모욕해, 노동도 모욕하고 그래서 나는 사랑하는 나를 지켜야 한다, 사랑하는 나를 지키는 길은 나만 지킨다고 되는 게 아니고 동료도 지켜야 한다. 그러면서 답사반을 준비하고 이어가요."
 
첫 답사는 현장이 있는 마산이었다. 무학산 야간산행을 시작으로 민중의 삶과 역사를 발로 걷고 손으로 만지며 전국 각지를 여행 했다. 

"갑오농민전쟁지, 거창신원 양민학살지에 갈 때는 그쪽에 있는 농민회에 연락해서 농민회 사무실에서 하룻밤을 자면서 동네 사람들을 만나고 농민회 사람들과 교류를 했어요. 노동자와 농민의 교류, 이래서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어요. 그 농민 중에 한 사람은 요즘도 저한테 연락을 해요. 달이 밝다고 전화하고 꽃이 피었다고 전화가 와요."
 
답사지에는 답사 관련 자료 뿐 아니라 서서 일할 때 생기는 증상, 납이 인체에 침투되는 경로 등 노동 상식이나 조합원이 쓴 현장일기도 함께 실어 조합원들의 일상 소통과 교육 자료가 되게 만들었다. 하영란 씨는 답사의 의미를 이렇게 정리한다. 

"답사를 계속하면서 관심이 넓어졌어요. 철새도래지에 다녀온 뒤 철새들이 놀 곳이 없다는 뉴스를 접하게 되면 가슴이 내려앉고, 농민들하고 교류를 하면 뉴스에 농촌 빚 때문에 누가 자살했다는 얘기가 내 일처럼 다가들고 이런 것들. 좋은 문화를 먹고 큰 영혼은 체질이 바뀌더라, 그런 느낌을 정말 가졌어요. 우리가 현장에 있더라도 답사를 하면서 풍요롭고 다채로운 많은 것들을 봤기 때문에 아닌 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생겼다고 생각해요."
 
하영란 씨와 글쓰기 
 
입사한 1990년 5월부터 하영란 씨의 일기장에는 공장 이야기가 담긴다. 그 글쓰기는 참글 노동자문학회 활동에서 시로 이어졌다. 노동자가 되는 과정, 현장에서 겪은 일, 슬픔과 분노가 글로 다듬어지고 깊어지고 제 의미를 찾아갔다. 

하영란 씨가 91년 노보에 내려고 했지만 실리지 못한 시 '작업시간의 일' 전문이다.
 
'고매하신 사장님 / 작업시간이라고 똥오줌 마려운 것도 참고 계십니까? 
이하 잘 나신 관리자님들/ 설사 나도 작업시간이라고 참고 계시나이까?
작업시간의 일이니 / 생리적으로 화장실 가는 것도 존경하는 상사님 앞으로 결재를 올려야 하오리까 
작업시간 참아라 눈총 쏠 때는 / 니들이 인간이냐 벨트에 매달린 로봇이지 하는 말로 들리더이다 
용서하십시오 / 냄새나는 얘기를 꺼내서'
  
"엄마 꿈은 재미나게 살면서 재미난 마을을 만드는 거야"
 
하영란 씨는 지금 노동자의 아내이자 세 딸의 엄마로 (사)경남여성회 마산지부 공간인 '마실&상상'에서 공간지기를 하고 있다. '따신이웃 요가반' 요가 지도와 생리를 시작한 딸에게 주는 '첫물상자 만들기', '누워서 보는 영화관', '흰꽃이랑 자주꽃이랑' 공동텃밭 등 이름처럼 친숙한 프로그램들을 이웃과 나누고 있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딸을 위해 무상급식 희망 도시락을 매일 싸고 월영광장에서 열리는 무상급식 되돌리기 학부모 시위에도 참가한다. 세월호 진상규명 창동집회, 노후 원전 폐기 촉구 행사에도 같이하고 있다. 16년간 공장생활을 하며 단 한 번의 승급 없이도 당당했듯이 누군가 붙여주는 이름에 연연하지 않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몸으로 옮기며 살고 있다. 
 
"우리 딸이 나보고 엄마 꿈이 뭐예요?" 그러더라고요. "엄마 꿈은 재미나게 살면서 재미난 마을을 만드는 거야." 그랬어요. '마실&상상'에서 하고 싶은 것도 그런 거예요."
 
90년대 노동운동의 큰 획이었던 노민추 활동은 과거가 되었지만 소니전자 여성노동자들의 이야기는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지루하고 갑갑한 공장을 벗어나 새로운 힘을 얻고 노동의 일상을 능동적으로 바꾸고 견디게 해준 답사여행은 당시 소니전자 여성노동자들의 또 다른 운동방식이었지만 그 의미는 너와 나, 시공을 초월하는 것 같다. 하영란 씨의 과거와 오늘이 마치 자연의 흐름처럼 거짓이 없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그래서 소니전자 노민추와 답사반은 하영란 씨 개인의 역사를 넘어 우리 지역 여성노동자운동의 역사로도 의미 있게 보인다.

컨베이어벨트에 실려 보낸 청춘의 이야기는 언제 누구에게 들어도 가슴 먹먹합니다.

오늘따라 봄비보다 더 촉촉이 가슴을 적십니다.

아름다운 20대 30대 초반의 세월을 공장에서 노동하며 동료들과 울고 웃으며 보낸 언니들, 남산만 하게 불러온 배를 하고서 관리자들과 악다구니 쓰면서 욕하고 싸우면서도 자신보다도 더 아기의 태교를 걱정하던 언니들, 그 언니들은 불혹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참교육을 실천하고 환경보호에 앞장서노라 동분서주합니다.

언니들의 열정이 봉화처럼 살아있기에 우리는 함께 미래를 꿈꿀 수 있는지 모릅니다.

사람들은 영웅들의 이야기를 좋아합니다.

그래서 노동운동하면 항상, 주먹 불끈 쥐고 팔을 높이 흔들면서 목청이 터져라 마이크가 쩌렁쩌렁 울리게 사자후같은 열변을 토하는 영웅적인 노동운동가만을 떠올립니다.

온종일 일 년 365일 똑같은 컨베이어 벨트에 매달려 똑같은 얼굴들을 바라보며 똑같은 농담을 주고받는 일상의 노동은 영웅적인 노동운동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영란 언니의 이야기를 들으며 진정한 노동운동은 지루하고 생색 안 나는 일상투쟁을 매일매일 견디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위대한 일상투쟁의 산 교과서를 접할 수 있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고맙습니다

어제가 오늘 같고 내일이 오늘 같은, 매일 매일을, 하루하루를, 어떻게 하면 좀 더 색다르게 변화시켜 발전적으로 살아낼까 고민하던 아름다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여기 있습니다. '문화유산답사'는 일상을 탈출하는 여행에서 출발해, 다시 돌아온 일상의 무료함을 창의적인 시간으로 바꾸어 살아낼 수 있게 만든 원천이자 원동력이었습니다. 이 답사여행을 통해 언니들은 현장에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치유 받았을 뿐 아니라 거기서 새로운 힘과 용기를 얻어 또다시 새로운 일상투쟁의 빛나는 역사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답사의 맨 앞에 서서 깃발을 흔들던 깃돌이가 다름 아닌 하영란 언니였던 것이지요.

/인터뷰 후 마창여성노동자회 '언니들에게 듣는다' 기획단 카페에 올린 소설가 김하경 선생님의 글 인용-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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