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낯선 것을 경계한다. 반면에 익숙한 것에는 편안함을 느끼며 힘을 얻는다. 힘과 용기를 일으키게 하는 진원지! 마치 자석이 물체를 끌어당기듯 흡사 중력처럼 끌리는 곳, 이것을 생텍쥐페리는 '생명의 법칙'이라고 했고, 떠다니는 사람들은 그곳을 고향이라고 부른다. 멀리 떠나 살다가 돌아와 마을 어귀에 들어서는 순간 몰려드는 그리움과 안도감을 느껴본 이들에게 고향이 존재하는 것이다.

같은 고향을 가졌다는 이유로 공동체가 되고 향수를 공유하며 친밀감을 느끼는 우리는 그렇게 고향을 가지고 있다. 또 우리는 그렇게 그리워하는 고향을 가진다.

'그대 다시는 고향에 가지 못하리!'라는 소설은 제목만으로 얼마나 마음쓰였던지, 산업화 시대에 고향을 등지고 도회로 나간 이들을 지탱해주었던 힘을 잃어버리는 실향(失鄕)은 나그네를 만들고 그 시름은 향수(鄕愁)를 만들었다.

조각가 김종영이 고향으로 돌아왔다.

금의환향이다! '고향의 봄' 노랫말을 따라 비단옷을 입고 돌아온 것이다. 경남도와 창원시가 후원하고 창원예총과 김종영 기념사업추진위원회가 주관하여 김종영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 선포식을 했고, 창원예총과 김종영미술관에서 선생의 조각 작품인 27㎝ 높이의 '78-28'을 2m 높이로 확대 제작해 고향집 입구에 세우면서 귀향을 도왔다.

을씨년스러운 꽃대궐 창원 소답동 111번지는 김종영의 예술을 지배했던 선비적 기품과 관조적인 성향이 만들어진 곳이다. 그가 태어나고 자란 곳. 주변의 연립주택과 아파트 사이, 좁은 도로와 도로 사이에 한국 근대 조각의 선구자 우성 김종영(1915~1982)의 생가가 있다.

김종영은 이곳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일본으로 유학을 다녔고, 1948년 서울대 교수가 돼 서울로 갔지만 한국전쟁으로 다시 낙향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서울대 교수로 복직하면서 고향을 떠났다.

푸른 들판과 작은 시내가 흐르고 수양버들과 갖가지 꽃나무에 둘러싸인 대궐 같은 집. 창원의 모든 것이 개발이라는 이름으로 사라졌지만 다행히 김종영 생가는 도시 구조에서 비껴 나 부분부분 살아남아서, 집의 일부가 2005년 9월 16일 자로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생가 입구에는 1995년 '미술의 해'를 맞아 문화관광부가 창원미술협회와 함께 세워 놓은 표지석이 놓여 있고 올해 드디어 탄생 100주년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지난 26일 선생의 탄생일에 맞춰서 조형물을 세웠다.

그의 '의미 있는 형상' 속에 침잠한다. 메타(meta)적 언표(言表)에는 고향을 떠난 선생의 실향이 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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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에 돌아온 것이 어쩔 수 없으면 낙향(落鄕)이라 하였고, 본 마음이면 귀향(歸鄕)이라고 했다. '빛과 맥'이라는 슬로건에 걸맞은 탄생 100년에 이뤄진 조각가의 귀거래사 김종영 선생의 귀향(歸鄕)을 마주한다.

/황무현(조각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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