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마 못다 한 말]김태형 씨가 떠올리는 어머니 고 이연숙 씨

고 이연숙 선생은 1970년대 학생 운동사에 이름을 남긴 서울여대 녹수회 중심 구성원이었다. 1980년대에는 마산서 여성운동에 힘을 보탰다. 1996년에는 뒤늦게 상담심리 대학원 공부를 했다. 이후 쉰에 공립교사 시험에 합격해 상담 특수교사로 활동했다.

그리고 지난 2014년 1월 13일, 남편 김재현 경남대 교수와 중국 여행을 갔다가 뇌출혈로 57세에 생을 마감했다.

창원에서 변호사로 지내는 외아들 김태형(32) 씨는 그날 기억을 이렇게 전했다.

"어머니 번호로 전화가 왔습니다. 그런데 중국 사람들 다급한 목소리만 들리다 끊겼습니다. 한참 만에 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는데요, '놀라지 마라'면서 어머니 소식을 전하셨습니다."

그로부터 1년 반가량 지났다. 태형 씨는 "상처를 치유하려면 아직 시간이 더 필요한 것 같습니다"라고 했다.

태형 씨는 휴대전화에 어머니 전화번호를 여전히 저장해 두고 있다. 이름에는 '위대하신 어머니'라고 되어 있다.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전했다.

태형 씨 대학 졸업식 때 함께한 가족.

"외유내강형, 이 표현이 더할 나위 없이 맞을 것 같습니다. 겉으로는 누가 봐도 따듯하지만 무슨 일에서든 엄청난 의지력을 지닌 분이셨죠."

외동아들인 태형 씨는 어릴 때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고 한다. 그런 외로움을 모르지 않는 어머니였다.

"집에 혼자 있는 게 마음에 걸리셔서 강아지를 키우게 하셨어요. 그리고 친구들을 집에 자주 부르게 하셨죠. 어머니는 제 저녁밥을 못 챙겨 주시니, 학교 도시락만이라도 정성스럽게 싸주시려 하셨어요."

태형 씨는 연세대학교 입학 이후에야 진로를 법조계로 정했다. 어머니는 늘 자신의 결정을 존중했다고 한다.

"학창시절에도 공부하라는 말은 한 번도 하신 적 없습니다. 진학할 때도 정보만 제공해 주시고 판단은 제가 하게끔 하셨습니다. 대신 제가 혼란스러워할 때 방향을 제시해 주시고, 중심을 잡아주셨죠. 그리고 사람을 대하는 마음, 대화할 때 어떻게 해야 상대방이 다치지 않는지, 그런 부분에 대해 많은 얘길 해 주셨고요."

어머니가 쉰에 임용시험에 합격했을 때, 태형 씨는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남들처럼 공부에만 매달릴 수 있는 여건이 아니었다. 바깥 일을 병행하면서 틈틈이 책보는 정도였다. 당시 태형 씨도 고시공부를 하고 있을 때였다. 어머니 합격 소식에 "집안에 운이라는 게 있는데, 어머니가 먼저 써버리셨네요"라는 농담을 하기도 했다.

늘 친구 같은 어머니에게 상처 준 기억도 있다. 여자친구 문제로 대화하다가 '이런 부분에서는 간섭하지 마라'는 식으로 냉정하게 말했다고 한다. 이제는 이런 아쉬움이 남는다.

"어머니가 예전에는 바깥나들이를 그리 즐기지 않으셨어요. 이제야 여행 기쁨을 조금씩 알아가던 차였습니다. 저 혼자 그리스 여행을 갔다가 '어머니와 꼭 다시 오겠노라'고 생각했었는데…. 어머니께 더 잘해 드릴 시간이 다가왔는데, 옆에 안 계시네요…."

지난 1월, 고 이연숙 선생 1주기에 가족은 <사랑하는 당신 미안해요>라는 추모집을 발간했다. 태형 씨는 책에 이런 마음을 담았다.

'장례를 통해 알게 된 것은 이런 어머니의 모습이 나와 우리 가족 내에서만 그친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 수많은 분이 자기 일인 양 같이 슬퍼해 주시고 위로해주셨으며 함께해 주셨다 …… 위대하신 어머니는 비단 나의 위대하신 어머니뿐만이 아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기도 했다. 살아오면서 부딪혔던 많은 난관에 대해 조언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으며 그 누구보다 나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여주셨고, 당신의 얘기들도 나누시며 부족한 나의 생각에도 관심을 가져주셨다. 지금도 나의 답답함과 미칠 것 같은 기분들을 어머니에게 하소연할 수 없다는 것이 엄청난 무게로 나를 짓누르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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