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해방 후 3.15의거 땐 시민 학살 시신 유기도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네 번째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은 ‘신상묵’, ‘박종표’라고 하는 일제시대 헌병들입니다. 도대체 이들은 무슨 일을 했을까요?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침략의 시발점 ‘헌병 보조원’


헌병은 군대 내에서 경찰역할을 하는 군인들을 말한다. 얼핏 생각하면 헌병은 일제식민지배와 별 상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헌병과 헌병 보조원이 없었다면 일제는 한반도를 식민지로 만드는 것조차 쉽지 않았을 것이다.

1905년부터 전국에서 일어난 항일의병을 일제는 제압할 수 없었다. 지리에 익숙하고 게릴라전법에 능한 항일의병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조선인들의 협조가 필요했다. 일본은 1907년 투항한 의병, 친일단체, 빈농 등으로 구성된 헌병 보조원 4000명을 뽑았고, 1908년에는 2500명을 추가로 뽑았다. 이들 헌병 보조원들은 한반도에 익숙하지 않은 일본군에게 눈과 귀가 돼 주었다. 유명한 의병장인 신돌석을 체포한 것도 사실상 헌병 보조원이 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이들은 신돌석이 자주 사용하는 산길을 일본군에게 안내해 주었고, 주민들을 탐문해 신돌석 군의 위치나 병력, 상황 등을 상세하게 일본군에게 알려주었다.

따라서 일제는 한반도를 통치하기 위해 헌병과 헌병 보조원들을 버릴 수 없었다. 이 때 조선인 가운데 일부가 헌병과 헌병보조원으로 일하면서 항일인사들을 체포·고문하는 일에 앞장서게 되는데, 특히 유명한 사람은 신상묵과 박종표이다.


“자식이 부모에 효도하는 것 같이 폐하의 군인 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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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상묵과 박종표./출처: 연합뉴스·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

신상묵은 1916년 8월 13일 전북 익산에서 태어났다. 1938년 박정희가 졸업한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6월부터 전라남도 화순군 청풍심상소학교에서 근무했다. 1940년 8월 일본군에 자원하여 육군특별지원병 제1기생으로 훈련을 받던 중 1940년 11월 친일신문인 <매일신보>가 주최한 지원병좌담회에 참석했고, 잡지 <삼천리>에 ‘지원병 일기’를 기고했다. 그 내용 일부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나는 선생 노릇을 하다가 지원병이 된 것을 무슨 출세를 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물은 얕은데로 흐르며 자식은 부모에게 효도하는 것과 같이 일본 남자인 우리들이 폐하(일본 왕)의 군인이 되는 것은 당연히 해야 할 일입니다..(중략)..참으로 황국신민이 될 생각이 있거든 그리고 내선일체를 실행하려고 생각하거든 이 훈련소로 오시오.”

이후 신상묵은 헌병 오장(하사급)을 거쳐 1944년에는 조선인 최초로 헌병 군조(중사급)에 이르렀다. 창씨개명 이름은 ‘시게미쓰 구니오(重光國雄)’다.

박종표는 1921년 부산 초량동 출신으로 동래중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넘어가 동경고등학원과 동경 삼기영어학교에서 고등과에서 공부를 했다. 1942년 11월에 일본어 신문인 釜山日報(부산일보)에 기자로 일했다.

1944년 2월 헌병 보조원에 지원, 3개월 간 훈련을 받은 뒤 1944년 5월 1일 대구헌병대에서 헌병 보조원으로 일했다. 10월 1일 부산헌병대로 오면서 신상묵을 만나 항일 인사를 모질게 고문했다. 그의 창씨개명 이름은 ‘아라이 겐기치(新井源吉)’로 당시 ‘아라이 헌병보’로 악명이 높았다. 해방 당시 그는 이등 헌병보(병장급)였다.


2. 그들은 어떻게 고문했나?


반민특위가 없었다면 이들이 저지른 악행은 영원히 묻혀졌을 가능성이 크다.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박종표가 체포되면서 악행이 구체적으로 드러났다. 반민특위 조사기록 등으로 알려진 이 두 사람이 저지른 고문사건은 다음과 같다.

-학인동우회 사건으로 김주석 등 고문.

-정장호 고문 후 병사 사건.

-황학명 사건. 황학명 외 9명 고문.

-부산세무과직원사건. 4명 고문, 2명 사망.

-부산부두 미곡사건. 2명 체포 고문.

-양태의 사건. 2명 체포 고문.

-김상수 사건. 4명 체포 고문.

-김영민 사건. 3명 체포 고문.

-손유호 외 1명 체포 고문 사건.

-부산학생 사건. 8명 체포, 그 가운데 3명 고문.

-무궁당 사건. 20명 체포 고문, 주도자 김한경 고문 후 병사.


주로 신상묵이 고문을 총괄하면서 박종표가 주동이 돼 고문을 실행하는 식으로 두 사람은 손발을 맞춰나갔다. 두 사람이 고문한 사건 가운데 비중이 높은 사건들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학인동우회 사건: 김주석 씨 등 16~17세 학생들이 학교 내 조선인 학생에 대한 차별에 분개해 파견 나온 일본군 헌병을 집단 구타하고, 학생 8명과 함께 ‘항일자금 조달, 조선어 보급, 문맹퇴치, (친일)요인암살’ 등을 목표로 학인동우회를 만들었다. 회원 이춘삼이 1944년 1월 체포되면서 조직이 드러났고, 1944년 2월 조직원들이 체포 돼 진해헌병대로 끌려와 신상묵과 박종표에게 숱한 고문을 당했다.

-황학명 사건: 당시 중경임시정부를 돕기 위해 황학명, 이창석, 신동균, 추교덕, 조영관, 박용달 등이 벌인 다양한 활동을 말한다. 이들은 만주 북평탄광 폭파사건을 기도했으나 실패했고, 제주도 일본군 무전대에 근무 중인 황학명은 독립운동가들의 방송과 연합군의 전황을 국내에 흘려 동지들을 규합해 중경임시정부와 합류하려 했으나 일본 헌병대에 발각됐다.

-부산세무과직원사건: 1945년 일본에서 유학한 김대근을 중심으로 독립운동조직을 결성하고, 유언비어를 흘렸다는 혐의로 4명을 체포해 2명을 고문치사케 한 사건이다.

-부산학생사건: 1945년 3월 초순 부산공업학교 학생 130명이 일본군 병장기 관리회사인 조선제강회사에서 강제로 노동하던 중 공장 측의 차별대우에 못 이겨 학생들이 파업을 단행, 주도 학생들이 체포되고 악독한 고문을 당했다.

-무궁당 사건: 평소 반일감정이 높던 김한경은 조선은행에서 근무하면서 신문사 기자, 교사, 회사원, 대학생 등을 끌어들여 무궁당이라는 항일단체를 결성했다. 그러나 1945년 6월 신상묵 등에게 발각되고 20여 명이 체포 돼 고문을 받고 다수가 기소됐다. 김한경은 고문을 받고 난 뒤 사망했다.

▲ 반민특위 박종표 관련 진술서./출처: 정운현, 보림재 http://blog.ohmynews.com/jeongwh59

피해자들이 진술한 고문 방법은 잔혹하면서도 다양했다. 체포되면 ‘기본’으로 손가락 고문, 곤봉, 목검, 군홧발로 난타당하고 유도기술로 피해자들을 수십 차례 집어 던져 혼을 빼 놓는다. 이후 식도에 호스를 꼽고 물을 강제로 먹인 뒤 배를 눌러 토하게 하는 고문, 욕조를 물에 채워 완전히 얼린 다음 그곳에 사람 하나 앉을 공간을 파서 피해자를 앉혀 놓은 뒤 얼음물을 계속 끼얹고 난 후 피해자가 실신하면 부채질을 해 깨운 다음 다시 얼음물을 퍼붓는 방식을 자주 썼다.

고문이 심해지면 불에 달군 화로를 얹어 놓거나, 불로 살을 찢는 방법, 손발을 모아 결박한 후 허공에 매달아 놓고 폭행하는 방법(비행기식 고문), 전기고문, 피해자를 결박한 후 깊은 물에 완전히 담궜다가 꺼내는 방법, 관 속에 피해자를 넣어 놓고 관에 물을 주입해 피해자를 죽음 직전까지 가도록 하는 방법, 맹견이 있는 방에 밀어 넣어 맹견이 사람을 물어뜯도록 하는 방법 등을 썼다.


“어린 학생도 무자비하게 고문”


신상묵과 박종표는 어린 학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김주석(당시 17세)를 고문할 때는 숱한 폭행과 손가락 고문에 이어, 관 속에 넣어 물을 주입하는 고문을 썼다. 이어 고문으로 죽은 여러 사람들의 사진을 보여 주며 ‘너도 이렇게 한다’고 협박했다. 부산학생사건으로 체포된 황석고(당시 19세)는 폭행을 당한 이후, 수도호스로 물을 먹이는 고문, 코에 물을 부어 숨을 쉬지 못하도록 하는 고문 등을 당했다. 이런 고문을 4~5일 동안 매일 당했다.

고문으로 죽은 사람의 모습은 어땠을까? 반민특위 조사기록에서는 부산세무과직원사건에 연루 돼 죽은 김대근이 당한 고문과 죽음과정이 자세하게 드러나있다.

당시 부산세무과 동료인 신남철이 참고인으로 불려가 고문을 받고 헌병대 유치장에 김대근과 하루 머물렀다. 신남철은 “김대근은 고문의 흔적이 역력했고, 내가 ‘어떻냐’고 물으니 김대근은 ‘나는 곧 죽겠다’고 답했습니다. 양팔을 보이는데 불로 지져 찢져 있었고, 수건으로 입을 가렸는데 입이 온통 피투성이가 돼 있었습니다”고 진술했다. 이후 그는 며칠 동안 고문당하면서 김대근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간간이 보았다. 김대근은 죽음 직전에서 수 차례 의사를 불러달라고 간청했으나 헌병은 이를 무시하였고, 김대근은 애통한 목소리로 헌병에게 우유를 달라고 한 것이 신남철이 본 김대근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김대근 사망 전후로 숙모 뻘인 손경연이 김대근을 보살폈다. 손경연은 “반쯤 죽은 상태에서 사람 모양 같지 않았고 전신이 피투성이에 붕대덩어리가 돼 있었습니다. 김대근은 자신을 감시하는 헌병에게 ‘살려주시오’라는 말이 마지막이었습니다. 사망 후 전신을 감싼 붕대를 풀어보니 몸이 흑색에 가깝게 돼 있었고, 불로 찢은 상처가 허다하고 혈관이 파열이 된 곳은 (박종표 등이)탈지면으로 막아두었습니다”고 진술했다.

김대근이 부산병원에서 죽자, 박종표 등은 허위진단서를 꾸며 사건을 조작했다. 이후 반민특위에서 박종표는 ‘(김대근의 사망 원인에 대해) 급성폐렴이 온 듯 하다’고 둘러댔다.

고문에는 교묘한 심리전도 활용됐다. 부산학생사건 피해자인 황석고를 고문하면서 헌병 보조원인 김유근이 ‘나는 너의 선배(부산상고)로서 더욱 조선사람의 설움을 잘 안다. 우리가 조국광복을 다 같이 원하는 바이다. 그 포부를 기탄없이 토로하라’고 설득하자 황석고는 이것이 함정인 줄 모르고 속내를 진술했다가 더욱 큰 고문을 당했다. 다른 사람이 고문당하는 모습을 보여주거나 위에서 언급했듯이 고문 당해 죽은 시신을 보여주면서 협박하기도 했다.

한편, 부산헌병대 헌병 보조원 가운데에는 박정도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중국어 통역을 담당했고, 중국인을 고문했다. 중국인을 고문할 때 칼로 근육을 도려내는 참혹한 수법을 쓰기도 했다.

고문은 진술을 받아내기 위함이 대부분이지만, 정보원을 확보하기 위해 고문을 활용하기도 했다. 1945년 6월 15일 오후 2시경 손유호는 극장에서 영화를 보고 있었다. 그때 박종표와 일본 헌병이 그를 체포해 헌병대로 연행했다. 체포이유는 ‘전쟁 시기에 영화나 보면서 전쟁에 협력하지 않는다’는 황당한 이유였다.

이후 박종표는 손유호를 수없이 구타하고, 맹견이 있는 방에 밀어 넣고 맹견에 물어 뜯기게 했다. 그런 다음 박종표는 “우리는 다 같이 반도인으로서 황국신민이다. 국가의 안위를 결정하는 이 성전(전쟁)에 협력을 해야 한다. 너는 희생적으로 우리에게 협력하여 밀정노릇을 해달라”고 강요했다.

1945년 6월 박종표는 정장호의 집에 다짜고짜 쳐들어가 5일 동안 모질게 고문했다. 박종표는 그가 곧 죽을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정장호를 헌병대 뒷담으로 밀어 던져 놓고 ‘정장호가 탈옥했다’고 보고했다. 정장호는 자기 집에 들어서자마자 피를 토하고 죽었다.


3. 처벌이 아니라 출세…3.15의거 때 김주열 시신유기


신상묵과 박종표의 고문과 악행은 해방 직전까지도 이어졌다. 해방이 되자 처벌은커녕 신상묵은 되레 출세길을 내달렸다. 신상묵은 1946년 7월 경찰에 입문했고, 9월 전라남도 진도경찰서장을 시작으로 1950년 5월 전라남도 경찰학교 교장이 됐다.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낙동강 월배지구 경찰전투대 사령관을 맡았고, 1950년 총경으로 승진해 경상북도 영일경찰서장, 9월 경상북도 보안과장을 지냈다. 1951년 7월 경무관으로 승진한 신상묵은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과 1952년 10월 서남지구 치안국 전방사령부 사령관을 지냈다. 1953년 4월 전라북도 경찰국장(전북 경찰청장 격), 1953년 12월에는 서남지구 전투사령관 등 요직을 거치다 1959년 4월 경찰에서 퇴직했다. 퇴직 후에는 전라북도 산업국장으로 일했고, 후에 서남흥업이라는 기업의 고문으로 있었다.

신상묵은 친일, 고문 행위에 대해 아무런 처벌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이와 관련해 재판을 받거나 진술을 하는 일도 전혀 없었다. 그는 전혀 다른 일로 재판정에 올랐다. 1960년 초, 지리산에 무분별한 벌목과 벌목허가가 남발되고 있었다. 이로 인해 지리산은 빠르게 황폐화되고 있었다. 1964년 11월 박정희는 불법 벌목자들을 처벌하라고 직접 지시했다. 이에 경남과 남원에 수사본부가 설치되고, 서남흥업 주요 인사 14명이 구속됐다. 이 중에 신상묵도 있었다. 그러나 1965년 대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고 자유의 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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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리산 도벌 사건' 배후로 지목된 신상묵 관련 기사./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동아일보 1964년 12월 22일 자.

박종표는 해방 이후 철도청 부산공작소에서 일하고 있었다. 1948년 반민특위가 결성되고,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됐다. 반민특위 조사에서 광범위한 고문사실이 드러났지만 박종표만 재판을 받았을 뿐 신상묵은 소환조차 되지 않았다. 박종표는 일관되게 신상묵의 지시에 따라 보조 역할을 했을 뿐이라 진술했다. 또한 일본 헌병 보조원이 된 것은 전쟁 당시 징용에 끌려가지 않기 위한 방책이라고 진술했다.


“3·15땐 시민 발포하고 김주열 시신 유기”


재판과정에서 고문의 주범인 신상묵이 없는 상태에서 박종표에게 중형을 기대하긴 어려웠다. 게다가 1949년 6월, 경찰과 우익깡패의 반민특위 습격으로 특위가 유명무실해지면서 재판 또한 흐지부지 되고 말았다. 검찰은 박종표에게 ‘공민권 3년 정지’라는 가벼운 형을 구형했고, 1949년 8월 19일 재판부는 아예 무죄로 박종표를 풀어줬다. 재판부는 왜 박종표가 무죄인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일제때의 헌병보 박종표를 죄가 없어 무죄 석방한 것이 아니다. 그는 2대 독자로서 일정때 징병징용을 피하기 위하여 22세때 헌병보로 되었으며 약 1년 동안 일제 헌병의 고문을 보조하였다. 그러나 그는 과거의 자기 잘못을 깨닫고 형무소에 있어서도 모범수였을 뿐더러 자기가 범한 과거 죄악을 솔직히 고백하였다. 이러한 점을 미루어 보아 개선의 정이 많음에 비추어 그의 죄를 면제한 것이다."

박종표는 재판부에게 “오늘날 조국이 독립하고 민주건국을 위한 민족정기를 바로잡고 파사현정(그릇된 것을 깨뜨리고 올바르게 바로잡는 것)의 성업에 제하여 진정한 대한민국의 일국민이 되기 위하여 모든 과거의 오류는 3천만 동포 앞에서 깨끗이 씻고 법에 의한 정당한 처분을 받고 하더라도 속히 또다시 청정한 몸으로써 사회에 나와서 미력이라도 나머지 평생을 조국을 위하여 과거를 회개함으로서 나오는 참되고 강렬한 신념으로서 일신을 바치겠습니다. 그리고 감히 진언할 것은 죄를 받는 동안(감옥에 있는 동안) 청년의 활동력이 무위소모(무의미하게 소모)되는 것을 대단히 유감으로 생각하며 가석(애석)하게 여기는 바입니다”라며 변화된 삶을 살겠다고 다짐했다.

'과거를 회개하겠다'던 박종표는 신상묵과 마찬가지로 경찰에 들어가 1960년 마산경찰서 경비주임(경위)를 하고 있었다.

1960년 3월 15일, 3·15부정선거를 규탄하는 1만 명의 마산시민들이 마산시청으로 ‘내 표 내놔라’며 모여들었다. 이때 경찰은 시위대에 무차별 발포를 하고 시위대를 향해 최루탄을 직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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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산 앞바다에 떠오른 김주열 시신./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 4.19혁명재판에서 사형을 구형받은 박종표(사진 중 X표)와 당시 이를 보도한 <동아일보> 기사

시위대가 흩어진 밤 10시쯤, 박종표는 교통주임으로부터 ‘최루탄이 눈에 박힌 괴이한 시체가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박종표는 이 사실을 손석래 마산경찰서장에게 알리자, 손석래 서장은 ‘알아서 처리하라’고 지시했다. 박종표는 지프차에 시신을 싣고 마산시 월남동 마산세관 앞 해변가에서 큰 돌을 여러 개 매달아 바다에 빠뜨렸다. 이때 순경 한대진과 지프차 운전수가 도와줬다. 과거 정장호를 유기했을 때를 떠올리게 하는 신속한 처리였다.

그러나 시신에 급하게 묶은 돌이 빠지면서 김주열 시신은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 떠오르게 된다. 이것이 도화선이 돼 4·19혁명이 일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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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장검증 중인 박종표./출처: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오픈아카이브즈

박종표는 4·19이후 설치된 혁명재판소에서 시신유기와 최루탄 발사혐의를 모두 인정하고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무기징역으로 감형된다. 그리고 박정희 정권의 사면으로 최종적으로 7년으로 감형 받게 된다.

박종표는 감옥에서 나온 뒤 행방이 묘연하다. <3·15의거사>편찬위원장이었던 홍중조 선생의 증언에 따르면 “1994년까지 부산 서면에서 식당을 했고, 마산경찰 출신 인사들이 찾아가 축하해주기도 했다”고 밝혔다.

신상묵은 1984년 68살의 나이로 죽었다. 2004년 그의 아들 신기남은 아버지의 친일 이력이 드러나자 열린우리당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신상묵이 항일인사를 고문하고, 죽인 것이 죄가 되기는커녕 오히려 ‘실적’이 돼 해방 이후 출세가도를 달렸다. 박종표는 고문이 끝난 후 '보기보다 힘이 좋다'며 웃으며 농담을 해 피해자들을 전율케 했다. 그들이 출세가도를 달릴 때, 고문당한 항일인사들은 죽거나 젊은 나이에 반신불수가 되거나 실명을 하는 등 평생 고통 속에 살아야 했다.


<신상묵 연표>

-1916년 8월 13일 전북 익산 출생.

-1938년 대구사범학교 졸업, 청풍심상소학교 근무.

-1940년 일본군 지원병 자원입대.

-1940년~1945년 일본군 헌병. 1944년 헌병 군조(중사).

-1946년 9월 전라남도 진도경찰서장.

-1950년 전라남도 경찰학교 교장.

-1951년 지리산지구 전투사령관.

-1953년 전라북도 경찰국장.

-1959년 전라북도 산업국장.

-1984년 사망.


<박종표 연표>

-1921년 부산 초량동 출생.

-1942년 일본어 신문 釜山日報(부산일보) 기자

-1944년 2월 헌병 보조원 지원.

-1944년 10월 부산헌병대 파견. 신상묵 만남.

-1945년 해방 이후 철도청 부산공작소에서 근무.

-1949년 3월 반민특위에 체포.

-1949년 8월 반민특위에서 무죄 선고.

-이후 경찰 입문, 1960년 마산경찰서 경비 주임(경위).

-1961년 혁명재판소에서 무기징역 선고. 이후 감형.


<참고문헌>

[도서]박원순, <야만시대의 기록>, 역사비평사, 2006

[도서]정운현, <친일파는 살아있다>, 책보세, 2011

[도서]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편집부, 2009

[논문]김정은, 「일제하 경찰조직과 조선인통제정책」, 1998

[논문]권구훈, 일제 한국주차헌병대의 헌병보조원 연구(1908~1910)」,1998

[자료]한국사데이터베이스 반민특위 조사기록

[블로그]김주완, 김주열 살해 유기 원흉은 친일헌병 박종표였다

다음주 월요일(7월 6일)에는 고문 백서 만든 ‘고문귀신 노덕술’과 친일 경찰들에 대해 다뤄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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