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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침탈에 다시 눈뜬 300년 항왜 정신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6) 통영지역 항일독립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6월 23일 화요일

예향으로 잘 알려진 통영은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를 위한 거점 도시로 인식되면서 갖가지 수탈이 이뤄졌다.

이는 1604년 삼도수군통제영이 이곳에 설치되면서 단순한 군영을 넘어 상업 중심도시이자 수공업 도시, 어업과 관련한 중요한 항구 도시로서 기능이 강했기 때문이다. 을사늑약 이후 일본인들이 이곳으로 대거 들어와 해안을 매립하고 어업권과 각종 상권을 독차지한다.

병선마당(현 강구안 문화마당)이 당시 일본에 의해 매축된 대표적인 해안이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일본의 수탈 야욕 앞에 조선인들도 가만히 있지 않았다.

병선마당 일대 매축이 한창이던 1907년 7월 한 일본인 노무자가 조선 진위대 하사를 폭행하는 일이 벌어졌다. 일대 통영 주민은 일본을 규탄하며 분연히 일어섰다.

일본인에게는 쌀도 팔지 말라는 '미곡불매운동'이 일어났고, 위협을 느낀 일부 일본인은 피난을 가기도 했다. 삼도수군통제영의 도시, 임진왜란 3대첩 중 하나인 한산도 대첩 무대, 이순신의 얼이 서린 300년 항왜의 중심이 다시 눈을 뜬 것이다. 이때 시작한 통영 항일 불길은 해방 전까지 3·1항일독립만세운동, 사회운동, 학생운동 등으로 번져나갔다.

◇신정장터 3·1항일독립만세운동지 = 통영시 서호동 116번지 일대. 1919년 3월 18일 배재학당 학생 박상건은 학교가 휴교하자 이전에 수학한 통영 관란재(觀瀾齋)를 찾아 12~14세 학생 20여 명을 모아놓고 미리 준비해 간 '조선독립만세'라고 쓴 수기(手旗)를 들게 한다. 밤 9시경 관란재 부근에서 수기를 흔들며 독립만세를 외친 이들은 신정장터와 그 인근 지역을 돌며 행진한다. 일제강점기 새벽시장이 서던 이 일대는 1970년대까지 공터로 남았는데 이곳에서는 상여놀이를 진행하기도 해 상여마당으로 불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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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정장터 3·1항일독립만세운동지 = 통영시 중앙동 70번지 일대. 지금은 통영중앙시장이 들어선 이곳은 상거래가 성한 큰 장으로 음력 2일과 7일 장이 열렸다. 이곳에서는 모두 4차례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3월 18일 통영면 신정의 천주교 신자 이봉철 선생 외 2명이, 28일에는 통영면 조일정 반물상 박성백 선생 외 7명이 장터에 모인 이들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절정은 4월 2일 만세 시위였다. 신정장터 만세운동을 주도한 박상건 선생과 미국에서 돌아온 고채주·강윤조 선생 등 12명이 상인 등 수천 명을 규합해 통영경찰서 앞으로 몰려갔다. 고채주 선생의 독립만세 외침에 따라 만세 함성이 산하를 울렸고, 일제는 총검도 모자라 소방차 살수로 인파 해산에 나섰다. 시위대는 그러나 장터 중앙 넓은 터에서 만세소리를 더욱 높였다. 특히 이날 시위에는 예기조합 기생 33명이 금비녀와 팔찌를 팔아 소복차림으로 참가했다. 이날 참가한 3000여 명 중 9명이 체포됐다.

◇통영청년회관 = 통영시 문화동 236번지. 통영청년단 활동 근거지로 1923년 지어졌다. 1919년 7월 21일 조직된 통영청년단은 지육부(知育部)를 두고 각종 강연회와 토론회를 열어 민족의식을 드높이고 강습소와 야학을 운영해 문맹퇴치에도 앞장섰다. 1921년경 각종 활동을 펼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청년단은 회관을 건립하기로 하고 강연 활동, 악단 활동, 활동사진대 순회공연 등을 통해 모금운동에 나섰다. 이 같은 문화활동은 건립기금 마련뿐만 아니라 새로운 문화운동의 계기가 됐다. 건립 이후 회관은 각종 단체의 집회 장소와 행사장으로 쓰였다. 현재 등록문화재 제36호 근대문화유산으로서 보존 중이다.

◇통영공립보통학교 터 동맹휴학지 = 통영시 문화동 57번지. 1920년 4월 17일 이 학교 일본인 교장은 새잡는 고무활을 가지고 놀던 3, 4학년 학생 몇몇이 자신의 훈계가 두려워 도망가자 이들 뒤를 쫓아가 뺨을 때리는 등 마구잡이 구타를 퍼붓는다. 이 광경을 보고 격분한 3, 4학년 학생들은 도지사에게 교장 전임 청원을 넣는다. 이를 알게 된 교장은 청원 중심에 선 학생 4~5명을 퇴학시키는데 이에 격분한 학생들이 20일 동맹휴학을 단행한다. 일주일 동안 동맹휴학한 학생들은 통영협성회와 청년단 임원, 학무위원 등 중재로 28일 등교를 하게 된다. 현재 이곳은 통제영 복원 공사로 그 흔적을 찾기 어렵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정확한 위치를 파악해 자료로 활용할 것을 권고하고 있다.

◇신간회 통영지회가 창립한 봉래좌 터 = 통영시 문화동 159번지. 봉래좌는 통영 거주 일본인 40여 명이 5000원을 모아 일본인을 위한 종합 오락장으로 문을 열었다. 380명을 수용할 수 있는 2층 건물이었는데 전통 가부키 공연장 양식을 취했다. 1920~30년대 이곳은 브나로드운동(농촌계몽운동)을 위한 강연회나 악극단 순회공연장으로 쓰였다. 중요한 건 1928년 3월 25일 이곳에서 신간회 통영지회가 창립했다는 것이다. 1927년 신간회 출범과 함께 통영지역 사회운동 단체도 통영지회를 설립하려 했으나 일본 경찰 간섭으로 번번이 무산되다 어렵게 창립대회를 열 수 있었다. 신간회는 1931년까지 활동을 지속하다 해체됐다. 이곳은 1939년 재래식 영화관으로 신축 후 1946년 봉래극장으로 개명했다가 2005년 9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통영공립수산학교 터 동맹휴학지 = 통영시 동호동 215번지 일대. 1928년 9월 24일 이 학교 1, 2학년 생도 60명이 조일공학제 폐지, 노예적 교육 철폐, 조선어 시간 연장, 조선 역사 및 조선어 교수, 교내 언론집회 자유 보장을 학교와 경상남도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했다. 학교는 이에 조선인 주모자 9명에게 퇴학 처분을 내렸다. 이 중 지삼만과 김기표는 통영경찰서 취조도 받았다. 학교는 일부 등교한 동맹휴학생들을 정학 처분했다. 1929년 광주학생운동 여파가 전국으로 확대하면서 이듬해 1월 22일 통영수산학교에서도 학생들의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이때도 경찰이 나서 학생 10여 명을 검거했으나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그해 10월 31일에는 일본인 교사 히라마쓰가 학생을 구타한 것을 계기로 1, 2학년 학생 60명이 10여 가지 요구를 제시한 진정서를 학교와 경상남도 당국에 제출하고 동맹휴학을 단행했다. 학교는 2학년 학생 2명을 퇴학처분 했는데 이에 분개한 2학년 학생 전부가 퇴학원서를 제출했다. 1학년 6명도 동참했다. 이 일에도 경찰이 나서 3학년 학생을 조종 인물로 지목하고 체포했다. 학교의 퇴학, 경찰의 체포, 학생들의 강경 대응 속에 두 달 시일을 끈 동맹휴학은 11월 27일 학부형들이 조정에 나서 해결됐다.

조선시대 남해안 지역 생활 문명의 총화였던 통제영 문화와 항왜 역사가 관통하는 통영. 이 지역적 자부심은 되레 일제강점기 항일독립운동에 대한 지극한 관심을 옅어지게 하는지도 모른다. 실제 통영에서는 통영청년회관 건물 외에는 항일독립운동 관련 흔적 찾기가 요원하다. 역사 현장이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 모두 겹치는 탓이기도 하다.

전문가들은 이에 이 지역 역사를 입체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몇몇 작업을 조언한다. 대표적인 것이 부도정장터(현 통영중앙시장)이다. 독립기념관 산하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이곳은 3·1운동 당시 통영지역 최대 항쟁지로 기념할 만한 장소다. 현재 원문공원에 3·1운동 기념비를 세워 이를 기리고 있으나 시위 현장에도 안내판이나 표지석을 세울 필요가 있다"며 "관련 사적지인 신정장터나 통영경찰서 터 등과 연계해 활용하면 좋을 것"이라고 조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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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