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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 깡패에서 일본 국회의원이 된 극렬 친일파 박춘금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정치깡패의 원조

임종금 기자 lim1498@idomin.com 입력 : 2015-06-21 15:45:09 일     노출 : 2015-06-22 00:00:00 월
[광복 70년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을 토대로 책을 출간했습니다. 책 제목은 <대한민국 악인열전(임종금 저)>입니다.
교보문고, 예스24, 알라딘, 인터파크, 반디앤루니스 등 전국 온라인 서점 어디서나 구입할 수 있습니다.
<대한민국 악인열전>을 출간할 수 있었던 것은 후원자 여러분의 지원 덕분이었습니다. 머리 숙여 감사 인사 올립니다.

올해는 광복 70년이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역사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한국 근현대사를 생각하면 가슴이 막막하고 불편하다고 합니다. 어느 한 곳 밝은 구석을 찾아보기 힘든 근현대사를 쭉 돌이켜보면 그 불편함은 이해가 되고도 남습니다. 그래서인지 ‘태정태세문단세’를 외워대던 교과서에서도 근현대사는 얼렁뚱땅 넘어가고 맙니다.

덕분에 우리가 아는 건 단순합니다. 일제 침략으로 우리 민족은 고생했고, 더러는 일제에 맞서 독립운동도 했고, 더러는 이완용처럼 친일파가 됐다는 선에서 근대사는 정리됩니다. 현대사는 미소 냉전으로 분단이 됐고, 김일성이 한국전쟁을 일으켜 많은 사람이 죽었고, 전쟁 후 이승만·박정희·전두환은 독재를 했고, 더러는 민주화운동을 했다고 합니다. 박정희 정권 이후 국민들이 열심히 노력해서 풍요로운 나라를 일굼으로써 현대사는 끝이 납니다. 흡사 KTX를 타고 부산역에서 서울역까지 창가로 비치는 풍경을 보고 한국을 다 봤다는 느낌입니다.

해서 많은 것들이 잊혀졌습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는 이완용이라는 이름을 방패막이로 내세우고 다 숨어 버렸습니다. 해방 후 부당한 권력에 의해 억울하게 학살된 수많은 민중에 대해서도 ‘시대가 그랬다’는 막연한 논리로 덮어 버렸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시대적 상황이 그랬다 치더라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근현대사의 악인들이 있습니다. 그런 악랄한 자들에 대해 이야기해 볼까 합니다. 왜 그자들을 ‘결코 잊지 말아야 하는 지’에 대해 말하고자 합니다. 군인, 우익단체, 친일경찰, 친일헌병, 친일깡패, 토호, 해외인사 등 각 분야에서 대표적인 악인들이 취재대상입니다. 이들을 기록으로 남겨 영원히 후세의 교훈으로 삼고자 합니다.

세 번째 살펴볼 ‘잊지 말아야 할 이름’은 경남 양산 출신으로 일본에서 반민족행위를 한 박.춘.금이라고 합니다. 깡패 출신이 어떻게 일제시대 일본 중의원 국회의원을 2번 지내게 됐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이름들'은 여러분의 후원으로 제작되는 기사입니다. 후원금은 취재비와 자료구입비 등에 사용됩니다.


1. 조선인 학살의 수혜자


박춘금은 1891년 4월 17일 경남 양산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밀양에서 자랐다. 어린 시절 그가 한학을 배웠다는 기록도 있지만 정확히 어떤 교육을 받았는지는 분명치 않다. 1905년 불과 14살인 그는 러일전쟁 당시 대구 주둔 일본군 급사(심부름꾼)로 일했다고 한다. 당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사실상 한반도를 장악하고 ‘군정’을 하고 있었다. 곳곳에 일본군이 주둔했으며, 일본군이 지역의 치안권을 장악했다. 어린 박춘금은 일본군 밑에서 심부름을 하면서 일본의 저력을 봤는지도 모른다. 이후 일본인 술집 등에서 일하면서 폭력배로 자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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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일전쟁 당시 일본군에 총살당하는 의병들.

박춘금은 1907년 8월 경 일본으로 건너가 도쿄와 고베 등지에서 막노동꾼, 자전거 직공, 탄광 갱부 등을 전전하면서 생활했다. 그러다 나고야에서 조선인삼 판매를 하면서 폭력배 기질을 십분 활용해 조선인 사회를 장악하고 1917년 5월 나고야조선인회 회장으로 취임했다.

박춘금이 회장으로 취임할 당시 일본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호황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많은 조선인 빈농들이 돈을 벌기 위해 일본으로 몰려들던 시대였다. 특히 토지조사사업으로 농지를 잃은 농민들이 대거 대열에 합류했다. 기록에 따르면 1911년 이후 매년 12~15만 명의 조선 농민들이 농지를 잃고 해외로 떠돌았고, 그중 상당수가 일본으로 넘어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노동자 정신 교화가 중대한 사명”


1920년 박춘금은 평생의 ‘동지’인 이기동을 만나게 되고, 이기동과 함께 ‘상구회’를 조직하게 된다. 상구회는 깡패들의 합숙소를 차리고, 한편으로는 사실상 병원 이용이 거의 불가능한 조선인을 대상으로 의료시설을 갖춤으로써 일본으로 건너온 직후 방황하는 조선인들을 장악해 나갔다. 박춘금과 이기동은 곧 일제가 주목하는 인물이 됐다. 그들의 친일 기질을 파악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과 조선총독부 경무국장(경찰청장 격)을 지낸 마루야마 츠루키치가 후견인이 됐다. 1921년 상구회를 상애회로 재편하고 오사카, 나고야, 시즈오카, 교토, 도쿄 등 일본 각지에 지부를 설립했다. 박춘금은 상애회의 명목상 회장으로 이기동을 올리고, 자신은 부회장으로 상애회의 실권을 장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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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금의 최대 후견인인 마루야마 츠루키치. 훗날 상애회가 재단법인으로 재편됐을 때 이사장을 지냈다./일본어 위키 백과

상애회는 출범부터 “민족적 차별 관념 철폐와 일선융화(조선의 일본화)의 철저함을 도모하는 것은 물론, 특히 조선노동자를 위한 정신적 교화와 경제적 구제를 도모함을 중대한 사명으로 한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이후 활동은 그들이 선언한 것과는 정 반대로 흘러갔다.

1923년 9월 1일 오전, 일본 간토 지방에서 관동대지진이 일어났다. 12만 가구가 파손되고, 사망·실종자가 40만 명에 이를 정도로 일본의 피해는 극심했다. 일본 정부는 분노한 민심을 돌리기 위해 ‘조선인과 사회주의자들이 폭동을 일으키려 한다’, ‘조선인이 우물에 독을 타서 피해가 커졌다’는 등의 유언비어를 흘렸다.

평소 조선인에 대해 민족적 감정이 좋지 않았던 일본인들은 이 유언비어를 믿었고, 경찰과 함께 자경단을 꾸려 조선인 학살에 나섰다. 그 결과 최근 밝혀진 자료에 따르면 불과 4~5일 사이 무려 2만 3058명의 조선인이 학살당했다. 학살의 규모가 예상보다 커지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일본 정부는 9월 5일부터 학살 수습을 위한 작업에 들어갔다. 조선인들을 급조한 ‘수용소’에 격리시켜 일본 주민과 분리했으며, 시신 처리에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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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당한 조선인들.

이때 눈치 빠른 박춘금이 상애회원을 이끌고 나타났다. 박춘금은 상애회원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 당국의 수습작업에 적극 동참했다. 일본으로서는 이처럼 반가운 일이 없었다. 상애회원들은 조선인이었기 때문에 대지진 이후 불거진 민족 간 갈등을 불식시킬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이 일로 일본 정부와 조선 총독부 모두 상애회의 활동에 적극 후원자로 나서게 됐다. 

상애회는 승승장구를 거듭해 회원 수 10만 명에 이르는 거대 조직이 됐다. 매년 일본측으로부터 수만 원에 이르는 거액의 후원금과 보조금·저리 융자금을 지원 받았다. 1924년 1월 상애회 본부를 옮길 때 조선총독부로부터 4만 원의 후원금을 받았는데, 당시 1원이 금 0.5돈의 가치를 지니기 때문에 지금으로 치면 30~40억 원에 달하는 정부 후원금을 받은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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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동대지진 직후 학살된 조선인들. 여성은 일부러 하의를 벗겨 놓았다./연합뉴스


2. 상애회의 폭력활동


박춘금이 이끄는 상애회는 일본 정부의 지원을 받으면서 ‘조선인 직업 소개’ 활동을 펼쳤다. 그러나 사실 이는 상애회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들은 일본 사업가에게 적은 임금으로 조선인 노동자를 소개시켜 주는 대가로 알선료를 받았고, 노동자에게도 임금의 일부를 받아 챙겼다. 특히 힘없는 여공들의 경우 여공들에게 돌아갈 급료를 전부 횡령하는 사건이 일본 전역에서 빈번하게 일어났다. 그러나 일본 당국의 든든한 지지를 받고 있었던 상애회에 힘없는 여공들이 대항할 수는 없었다. 일부 여공들이 상애회에 대항하면, 상애회는 여공을 폭행하고 사창가에 넘겼다.


“조선인 문제는 상애회에 맡겨라”


상애회는 각 사업장에 조선인 노동자들을 ‘관리’하는 역할도 맡았다. 조선인 노동자들이 노조를 결성하거나 조직이 만들어지면 상애회는 여지없이 개입해 조직을 파괴하고 사업자에게 소위 ‘중재료’ 명목으로 돈을 챙겼다. 한 통계에 따르면 1922년~1923년 5월 까지 상애회의 중재 건수가 200건에 달했다. 일본인 사업가들 사이에서는 “조선인 문제는 상애회에 의뢰하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그럼에도 일본 곳곳에서 조선인 노동자들의 노동단체와 항일민족단체가 생겨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상애회도 조직적인 폭력행위를 일삼았다. 1925년 1월 상애회원 20여 명이 오사카 방적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김병원의 집으로 쳐들어갔다. 김병원이 좌익 단체에 가입했다는 이유에서다. 상애회원들은 가족을 폭행하여 가족 중 1명이 눈알이 빠지는 중상을 입었다. 4월 25일에는 오사카 조선인 노동자들이 만든 ‘노동연주회’를 습격해 간부들을 상애회 사무실에 감금한 뒤 폭행을 가해 중상을 입혔다. 1926년 5월에 일본악기회사 노동자들이 쟁의를 일으키자 쟁의본부를 습격하고 수십 명의 중상자를 냈다. 1926년 6월 13일에는 일본 내 조선인 노동자들의 결사단체인 재일본조선노동총동맹을 습격해 9명에게 중경상을 입혔고, 간부들을 고문했다. 1926년 6월 14일에는 상애회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인 토공(도자기 기술자)들을 습격해 3명이 사망하고 50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927년에도 역시 상애회에 가입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조선인 노동자에게 집단 폭행을 가해 2명이 사망하고 10여 명에게 중상을 입혔다. 1928년 2월 조선인 무정부주의단체인 흑우회 등을 습격해 회원을 살해했다. 이때 상애회원들은 권총과 일본도, 단도를 휴대하고 있었다. 일본 경찰의 묵인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다.

이 외에도 1926년 5월 조선인 소년을 납치해 묶어 놓고 폭행해 혼수상태에 빠뜨리거나 1926년 9월부터 상애회 간부들이 부녀자들을 유인해 매매하는 등 상애회는 갈수록 잔혹성을 높여갔다.

상애회의 폭력활동은 국내에서도 이어졌다. 1924년 하의도 소작쟁의가 일어나자 일본인 농장주 도쿠다의 요청으로 박춘금은 상태도와 하의도 주민들을 모아 놓고 권총을 들이대고 무차별적인 폭행을 하면서 강제로 소작계약서에 날인하게 했다. 1928년 하의도에서 소작쟁의가 재발하자 박춘금은 상애회를 이끌고 주민을 습격해 농민회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 외에도 1920년대 소작쟁의 곳곳에 개입해 일본인 농장주 편에서 농민을 폭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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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춘금.

상애회가 숱한 폭력을 일삼고 반민족행위를 자행하자 <조선일보>와 <동아일보>에도 일부 보도됐다. 1924년 3월, 일제는 일본 내 친일단체를 결집해 ‘반일사상 박멸’을 내건 각파유지연맹을 발족시켰고 상애회도 이에 가입했다. <동아일보>에서 이를 비판하는 사설을 썼다. 격분한 박춘금은 <동아일보> 사장 송진우와 사주 김성수를 요정으로 불러 ‘우리 사업을 방해하는 놈은 죽여 버린다’며 폭행·감금했다. 감금된 두 사람은 ‘인신공격을 한 것은 온당하지 못했다’는 증서를 쓰고서 이틀 만에 풀려났다. 또한 같은 해 1~2월 박춘금은 상애회원을 이끌고 수 차례 <동아일보>를 찾아가 상애회 후원금을 내라며 행패를 부렸다. 당시 <동아일보>는 해외동포 위문금을 모금하고 있었는데, 그 금액이 10만 원에 이르렀다. 박춘금은 그 돈을 노린 것이다.

1928년 하의도 농민회를 박춘금과 상애회원이 습격한 사실이 <조선일보>에 크게 실리자, 박춘금은 일본 경찰 출신 일본인 비서를 대동하고 <조선일보> 한기악 편집장을 감금한 채 권총으로 협박하기도 했다. 

일본과 조선을 오가며 날뛰던 박춘금과 상애회를 막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애회 활동에 유일하게 제동을 건 사람은 의령 출신 독립운동가 안희제였다. 박춘금은 조선과 일본을 오가는 조선인에게 도항증명서를 구입하도록 강요했다. 상애회가 발급한 도항증명서를 소지하지 않으면 배를 타고 내릴 수 없도록 하는 것이었다. 이에 안희제는 ‘박춘금 성토대회’를 열고 도항증명서의 부당함을 여론화 시키자, 일제 당국은 도항증명서를 폐지하게 했다.


3. 일본 국회의원 박춘금


박춘금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친일활동을 폭넓게 하면서 자신의 정치력을 키워나갔다. 1926년 8월 일제의 팽창주의를 지지하기 위해 열린 ‘아시아민족대회’에 박춘금은 홍준표, 이기동과 함께 조선인 대표로 참가했다. 그리고 1930년 자신의 생각을 정리한 <우리의 국가 신일본>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은 머리말부터 노골적으로 친일적인 색깔을 드러낸다.


“일본인들 호의에 감사”


“우리 조선인이 대일본제국을 사랑함에 어떤 어색함이 있을 것인가. 이 대일본제국의 국부 지존에 대해 받들고 충성을 바치려고 하는 것은 원래 우리의 의무가 아니면 안 된다. 이는 실로 우리의 신조이고 또 감정의 외침이기도 하다. (...중략...) 황국의 은택을 받은 3천 년 충군애국의 지극한 정은 그 생존상 타 민족이 갖는 종교 이상의 약속인 것처럼 보이며, 천황의 은혜와 국가의 은혜에 깊이 감격하는 일본 민족으로서는 병합 이후 얼마 되지 않은 일선(일본-조선) 관계상 조선인은 진정으로 충군애국의 마음을 품을 수가 없고, 그렇게 부르짖는다 해도 입에 발린 말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리는 아닐 것이다. -<우리의 국가 신일본> 머리말 중에서”

일본 내 조선인 차별에 대해서는 전혀 없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다. 

“나는 조선인 모두가 나와 같지 않을까 한다. 나는 일본으로 온 지 20여 년이 지났고 일본 여자와 결혼하여 일본인과 같은 생활을 하고 일본제국의 신민으로 굳건한 마음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나는 제국 수도의 한가운데서 일하고 있는데 결코 불합리하게 학대(민족적 차별)를 받아본 적이 없다. 그뿐 아니다. 내가 조선인이기 때문에 무심코 한 행동이 만일에 나쁜 오해를 받을까 또 그 때문에 조선인 전체에 누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세심히 주의하여 겸허한 태도를 취하면 취할수록 일본인들이 나에게 주는 호의와 동정이 한층 깊어짐에 감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의 국가 신일본> 제2장 ‘동화정책이란 무엇인가’ 중에서”

이어 이 책은 조선의 독립운동이나 자치운동, 반일의식에 대해 비판하고, 일제 당국이 조선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해야 할 일들을 나열했다. 이렇게 공개적인 친일활동을 펴면서 자신의 입지를 다진 그는 1932년 3월 제18대 중의원 선거에서 도쿄 제4구에 입후보해 당선된다. 조선인 최초로 일본 국회에 입성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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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회의원 당선 당시 박춘금 모습. 오른쪽은 박춘금의 부인.

박춘금은 임기 동안 조선에 일본군 사단을 증설할 것과 조선에 중의원 선거를 할 것, 조선에 지원병제도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1933년에는 광산개발에 뛰어들어 평안도, 충청도, 전라남도, 함경남도, 경상북도 등 전국 곳곳에 광산을 경영했다.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난 뒤 일제가 본격적으로 침략전쟁을 시작했다. 일제는 일관되게 침략전쟁을 ‘아시아민족의 단합’을 명분으로 내세웠다. 일제는 이를 홍보하기 위해 온갖 친일단체를 일본, 조선, 만주에 설립했는데 박춘금도 곳곳에 이름을 올렸고, 단상에 올라 일제 논리를 강변했다. 

예를 들면 1938년 5월 경성(서울)교화단체연합회 주최로 열린 강연회에서 “동양의 평화는 내선일체(內鮮一體), 일만친선(日滿親善), 일우친선(日友親善)에 의하여서만 유지될 수 있다”고 역설했으며, 친일 기고문을 국내 잡지인 <삼천리>에 실었다. 

1938년 11월 일본군이 중국 우한을 점령하자, 상애회 주최로 승전축하 연등회를 열었다. 1941년 12월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 박춘금은 도쿄에 있는 조선인 유지들을 모아 야스쿠니 신사와 메이지신궁에 참배하고, 전쟁의 필승을 기원하는 행사를 주관했다. 

이렇듯 노골적인 친일반민족 활동을 이어나갔음에도 일본어 위키 백과사전에는 박춘금에 대해 “중의원 의원으로서 일본 정부의 조선인 차별을 추궁하는 등 민족적 이익을 위해서도 활동했으나, 현대의 한국은 매국노(친일파)으로 여겨지고 있다”고 적혀 있다. 박춘금은 조선민족을 위해 열심히 했는데, 부당하게 매국노로 몰린 듯한 뉘앙스가 느껴진다.

실제 그는 중의원 시절(1932~1936년, 1937~1941년) 수 차례 일본 국회에서 조선에도 국회의원 선거와 지원병제도를 시행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발언을 할 때마다 일본 언론에 주목을 받았다. 그러나 그의 논리는 조선인들의 이익보다는 조선의 완전한 ‘일본화’를 위해 이 같은 제도가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행동력이 매우 강한 그였지만, 집회나 행사를 통해 조선인 차별 해소나 조선 내 국회의원 선거 시행 요구는 없었다. 그야말로 여론의 주목을 받고, 자신의 정치적 명분을 내세우기 위한 말 뿐인 논리였다.


4. “학도병 4천이나 5천 죽어도…”


1942년 조선에 지원병제도가 시행되자 5월 10일 <매일신보>에 ‘반도(한반도)의 경사’라는 제목으로 환영하는 글을 기고했다. 1943년 8월에 국방헌금 1만 원을 납부했으며, 외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보냈다. 이 무렵, 그의 친일경향은 더욱 강도가 높아졌다. 매일신보가 주관한 학도병격려강연회에서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학도병 4000이나 5000이 죽어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이제야말로 1억 국민이 마음과 마음을 합하여 내지나 반도를 구분할 것 없이 이 성전을 완수해야 할 것이다. 이번 특별지원병도 이 정신을 이해하고 5000만 인이 합심하여 하나 빠지지 않고 나가야 한다.”

1944년 9월 조선에 강제징병이 이뤄지자 그는 “우리 2600만 동포들은 당국의 이 뜻에 감격하여 더욱 황국신민이 되어 전쟁 완수에 총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라고 강연했다. 또한 같은 해 일본군에 전투기를 지원할 목적으로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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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민관 모습. 박춘금과 친일파들은 이곳에서 친일선동연설을 자주 했다.


“30만 명 학살 계획”


1945년 2월 ‘미영격멸(米英擊滅), 내선단결(內鮮團結), 성전필승(聖戰必勝)’을 구호로 내건 야마토동맹(大和同盟) 이사로 선임됐으며, 대의당을 만들고 당수가 됐다.

1945년 6월 25일 박춘금이 창당한 대의당에는 극렬 친일파들이 대거 가담했으며, 극단적인 내용을 당 강령으로 삼고 있다. 대의당 강령에 따르면 “오등(吾等)은 모든 비결전적 사상(事象)에 대하여는 단연 이를 분쇄하여 필승태세의 완벽을 기함”이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비결전적 사상’이란 일본, 한반도, 만주 지역에 반일세력이나 항일세력을 통칭하는 것으로 이들을 말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박춘금은 일제 당국 협조하에 각 지역 반일·항일 인사 30만 명을 체포해 사살하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45년 8월 8일부터 전국에서 반일·항일인사에 대한 대대적인 검거가 시작됐다. 약 3000명이 전국 형무소에 구금됐고, 이들에 대한 총살처분이 논의됐다. 만약 총살처분이 결정나면 박춘금과 대의당원들이 이 일을 맡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행히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예상 보다 일찍 항복함으로써 대학살 사태는 면하게 됐다. 박춘금은 해방 직후 건국준비위원회가 결성되자 순식간에 태도를 바꿨다. 그의 부하를 통해 건국준비위원회 측에 ‘치안대 경비로 써 달라’며 20만 원의 거금을 건넸다. 그러나 건국준비위원회 치안대장 장권은 ‘이 돈은 받을 수 없다’며 돌려보냈다. 며칠 후 박춘금은 건국준비위원회 재정부장 이규갑에게 40만 원의 돈과 자기 소유의 금광, 자동차 등을 모두 건준에 바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그러나 이규갑은 그 제안을 거절했다.

조선에서 입지에 불안을 느낀 박춘금은 몰래 일본으로 들어갔다. 1949년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박춘금을 지명수배하고 당시 일본을 통치하고 있던 미 군정 맥아더 사령관에게 박춘금 체포를 요구했다. 그러나 반민특위가 얼마 후 해체됨에 따라 박춘금 체포는 이뤄지지 않았다. 박춘금은 이후 재일교포 사이에서 유지로 활동했다. 재일교포 조직인 재일본대한민국민단(민단) 고문을 맡았으며 1957년에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 1962년 아세아상사 사장을 엮임하고 1973년 3월 31일 도쿄에서 숨을 거뒀다. 그의 나이 82살이었다.

죽은 후 그의 시신은 경남 밀양시 교동 900번지 선산에 묻혔으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러다 1992년 일한문화협회가 박춘금 무덤 옆에 그의 송덕비를 세우면서 사람들에게 이 무덤이 알려졌다. 2002년 경남 밀양지역 시민단체들이 박춘금 송덕비를 깨뜨리자, 무덤에 대한 철거 논의가 일었다. 이때 밀양 동부순환도로에 박춘금 무덤 일대가 부지로 편입됐고, 밀양시는 박춘금의 딸에게 보상비를 지급하고 무덤 이전에 합의했다. 박춘금의 무덤은 2006년 밀양 동부순환도로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에 이전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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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춘금 무덤 터. 대부분 밀양 동부순환도로(왼쪽)에 편입됐고, 일부 부지만(오른쪽) 남아 있다./임종금 기자

박춘금은 어릴 때부터 일관되게 친일반민족 행위를 한 사람이다. 그는 행동력이 있었고, 눈치가 빨라 일본 2선 국회의원을 지냈고, 적지 않은 재산을 쌓았다. 그의 출세는 정치깡패들에게 좋은 ‘모범’이 됐다. 그는 입으로는 일본-조선 평등과 조선인 권리를 내세웠지만 동족을 갈취하고, 폭행하고, 죽이면서 자신의 이익을 채워나갔다. 일제 패망이 조금만 늦었더라면 그는 동족 수십만 명을 죽인 최악의 인물이 되었을 위험천만한 사람이었다.


<박춘금 연표>

-1891년 4월 17일 양산 출생, 밀양에서 생활.

-1905년 대구 일본군 병영에서 급사로 일함.

-1907년 8월 일본으로 건너감.

-1917년 나고야조선인회장.

-1920년 상구회 조직.

-1921년 상애회 조직. 부회장.

-1923년 9월, 관동대지진 당시 일본 당국을 도와 조선인 학살 사후 처리를 맡음.

-1924년 전남 신안군 하의도 소작쟁의 폭력 개입, 동아일보 사주와 사장 감금 폭행.

-1928년 하의도 농민회 강제 해산. 조선일보 편집장 감금 협박. 

-1930년 <우리의 국가 신일본> 발간.

-1932년~1936년 일본 제18대 중의원(도쿄 4선거구)

-1934년 4월 만주사변 공로로 훈 4등 서훈. 

-1937년~1941년 일본 제20대 중의원.

-1937년 11월 중추원 참의.

-1938년 일본-한반도-만주지역 친일단체 총괄단체인 ‘협화회’ 발족. 상애회 흡수. 협화회 이사.

-1941년 도쿄지역 조선인 유지 모임인 대화구락부를 결성하고 회장. 사실상 박춘금 사조직.

-1945년 야마토동맹 이사, 대의당 당수. 30만 명 학살 계획 세움. 해방 후 일본으로 도피.

-1949년 7월 반민특위에 ‘반민족행위 1급 피의자’로 지명수배.

-1957년 일한문화협회 상임고문. 

-1962년 아세아상사 사장.

-1973년 3월 31일 나고야에서 사망. 


<참고자료>

[도서]정운현, <친일파는 살아 있다>, 책보세, 2011

[도서]민족문제연구소, <친일인명사전>, 민족문제연구소 편집부, 2009

[자료집]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관계사료집>, 2009

[논문]정혜경, 「1920년대 재일조선인과 민족운동」, 2003

[논문]김명섭, 「1930년대 재일조선인 아나키스트들의 활동과 이념」, 2003

[논문]노주은, 「관동대지진과 일본의 재일조선인 정책」, 2007

[논문]김인덕, 「상애회 연구-1920년대의 조직과 활동을 중심으로」, 2002

[논문]지승준, 「일제시기 참정권운동 연구」, 2011

[논문]전기호, 「일제하 재일조선인 차가난(주택난)에 대한 연구」,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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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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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개의 의견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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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창 2016-03-17 10:31:06    
외아들을 지원병으로 내보냈다.
학도병 4000이나 5000이 죽어 2500만 민중이 잘 된다면 이 보다 더 좋은 일이 어디 또 있겠는가.

2500만 민중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외아들까지 희생시키는 사람이었군요.. 독특한 인물이네..
22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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