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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에 안긴 법주사·선병국 가옥 싱그러운 활기를

[2015 경남도민 생태역사기행] (3) 충북 보은

김훤주 기자 pole@idomin.com 2015년 06월 16일 화요일

6월 3일 충북 보은으로 떠난 생태·역사기행은 법주사와 선병국 가옥을 찾았다. 선병국 가옥은 일제강점기인 1920년대 134칸이나 되게 엄청난 규모로 지어진 대단한 옛 집이고 법주사는 신라시대 들어선 이래 고려·조선시대를 거쳐 지금도 명찰로 이름높은 대단한 절간이다. 법주사와 선병국 가옥은 이런 대단함 말고 다른 공통점도 있다. 아름답고 멋진 숲을 끼고 있다는 것이다.

아침 8시 창원 만남의 광장을 출발한 버스는 10시 40분 즈음 선병국 가옥에 닿았다. 잡초가 곳곳에 우묵하게 자라 있고 농기계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는 등 잘 가꿔져 있지는 않았다. 한 번씩 들르는 관광객에게는 어수선한 모습이겠으나 여기 사는 사람에게는 그런 것이 다 사람 사는 자취가 되겠다. 그 너른 터에 돋아나는 풀들을 어떻게 날마다 가지런히 할 것이며 경운기랑 트랙터들은 논밭에 쓰고 나서 가져와서는 또 어떻게 보이지 않게 갈무리할 것인가. 그냥 쓰기 알맞고 관리가 되는 그만큼 두는 자연스러운 모습인 것이다.

당주가 만석지기였던 만큼 집채도 담장도 대단했다. 솟을대문은, 요즘으로 치자면 자가용 자동차에 해당하는 말을 타고서도 드나들 수 있으리만치 높지막했고 사랑채·안채·행랑채·사당채 모두 단단하게 잘 짜여 있었고 담쟁이덩굴이 무성한 두툼한 바깥담은 과연 지킬 것 많은 부잣집다웠다. 사랑채·안채와 사당채를 두르는 안담은 단단하지만 나지막했다. 안채와 사랑채는 한자 工(영문 H) 모양으로 독특했는데 한가운데는 널찍한 대청마루 차지였다. 전통을 벗어나 효율성을 더 추구한 결과라는데, 마루만 통하면 사방 모든 방으로 한달음에 건너갈 수 있다.

선병국 가옥 솟을 대문.

조선시대였으면 선병국 가옥은 규모가 달라졌을 것이다. 조선 왕조는 여염집은 아흔아홉 간을 못 넘게 했고 둥근기둥도 못 쓰게 했다. 선병국 가옥은 조선이 망하고 일제강점기 지은 때문에 이런 규제를 벗어나 크기도 134칸에 이르고 사랑채는 물론 안채까지 동근기둥을 썼다. 군데군데 콘크리트와 벽돌도 썼고 양철로 이은 지붕도 있다.

그러나 압권은 커다란 규모 유별난 구조가 아니었다. 곳곳에 심겨 있는 나무들이었다. 보기 좋을 정도로 굽은 소나무도 괜찮았고 여러 가지 보리수나 풋열매를 매단 커다란 산수유, 해당화를 닮은 인가목, 얼핏 주목과 비슷해 보이는 비자나무도 멋졌다. 이렇게 정원·마당은 물론 담장 모퉁이나 장독대 둘레까지 나무가 많은 덕분에 집안이 통째 싱그러웠으며 흙바닥에서 오르는 열기까지 슬몃 누질렀다.

일행들은 여기저기에서 보리수나 앵두 열매를 입으로 가져갔다. 대문 바깥에는 선씨 집안에서 경영하다 일제 말기(1944년) 탄압으로 문을 닫은 서당 '관선정(觀善亭)' 자리가 나온다. 바로 옆 이 집안 효자와 열부를 기리는 효열각 뒤로 돌아가면 오솔길로 접어드는데 거기에도 즐거움이 있었다. 솔숲이 하늘을 가리는 아래로는 멍석딸기·산딸기 등이 붉은 열매를 매달았다. 사람들은 그 열매 새콤한 듯 달콤한 맛을 200m 정도 걸으면서 즐겼다. 오랜 가뭄에 지친 이파리들이 살짝 안쓰럽기도 했지만 대부분 사람들은 "우와!" 소리를 내지르기 바빴다.

이윽고 법주사 들머리 덕림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다음 법주사에 들렀다. 팔상전을 비롯해 여러 국보와 보물과 문화재로 이름이 높다. 미륵신앙의 본산 가운데 하나이기도 하다. 신라가 기울기 시작하는 770년대 고쳐 지었는데 이때 여기에 미륵신앙이 자리 잡았다. 미래불인 미륵을 으뜸으로 치는 것은 수도권 왕족이 아닌 비수도권 호족이었고 평민·노비도 이를 따랐다. 현실은 왕족 너희 것이지만 미래는 우리 것이라는 그런 심정으로.

미륵은 법주사와 창원을 잇는 징검다리다. 창원 백월산에서 노힐부득·달달박박 두 사람이 성불(成佛)해 제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현신(顯身)했다는 얘기가 <삼국유사>에 나온다. 인도산 수입 부처가 아닌 우리나라 국산 부처의 탄생이다. 어떤 이는 허망하다 하지만 경덕왕은 이를 기려 백월산 기슭에 '남사(南寺)'를 짓게 했고 출토된 기와조각에는 이 절간 이름이 새겨져 있다. 경덕왕은 경주 불국사와 석굴암도 창건한 인물이다. 그러니 억지로 지어낸 허튼 수작은 아니며 오히려 엄청난 역사적 사건이 백월산에서 있었음은 사실로 여겨야 하겠다.

법주사 팔상전과 청동미륵대불.

법주사는 옛적 용화보전 자리에 33m짜리 청동미륵대불을 조성하면서 이런 우리나라 최초 성불 사건을 돌팍에 돋을새김했다. 법주사가 미륵신앙의 본산이기에 이렇듯 미래불 미륵과 내세불 아미타로 현신한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을 형상화할 수 있었지 싶다. 그래서인지 법주사 대웅보전에는 석가모니불을 빼면 미륵불과 아미타불만 모셔져 있을 따름이다.

법주사 나무그늘 너럭바위에 앉아 이런 인연에 대해 짧게 얘기하고는 경내로 들어서 군데군데 드문드문 설명을 곁들였다. 하지만 설명은 설명일 뿐이고 법주사를 법주사답게 만드는 보배는 따로 있다. 팔상전과 잣나무와 보리수다. 우리나라 하나뿐인 목탑(5층)인 팔상전은 법주사의 드높은 위상을 두말없이 상징한다. 천왕문 앞 잣나무는 자칫 늘어지기 쉬운 절간 분위기를 푸름과 우뚝함으로 일신한다. 대웅보전 앞 보리수 두 그루 그 우람한 자태를 마주하면 옛적 석가모니 해탈 당시 어떠했을지 조금이나마 느낌이 온다. 잣나무와 더불어 시원하게 공중을 가르는 보리수의 이런 모습, 다른 절간서는 찾아보기 어렵다.

법주사 대웅보전 앞 보리수.

그러나 이보다 더한 보배가 있으니 바로 법주사 오가는 오리숲길이다. 2㎞ 안팎이라 '오리(五里)'인데 여느 절간 다른 숲은 대부분 소나무가 주종이지만 이 숲은 솔뿐 아니라 잎 넓은 나무도 퍽 많다. 솔만으로 이뤄진 숲은 아래가 메마른 편이지만 활엽수가 많이 섞인 숲은 은근히 촉촉하다. 물기가 많으면 그 은덕으로 살아가는 생명도 많은 법, 이날 숲길에서 난생처음 살진 오소리를 볼 수 있었던 까닭도 여기 있었지 싶다. 게다가 이런 물기는 증발하면서 더위까지 한풀 누그러지게 한다.

절간을 둘러본 일행들은 둘씩 셋씩 무리지어 얘기를 나누며 느긋하게 산책을 한다. 냇가나 길섶 바위에 걸터앉아 오리숲 푸근한 분위기도 즐긴다. 나무나 풀을 하나씩 찬찬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카메라를 들고 숲 속 풍경을 추억거리로 담기도 했다. 그러다 처음 출발한 데로 돌아와 끼리끼리 모여 앉아 남은 먹을거리까지 풀어헤쳤다.

법주사 들머리 오리숲.

이번 나들이에서 앞서 들른 선병국 가옥은 시내를 따라 굽이지며 둘러싸고 있는 솔숲 덕분에 더욱 그럴듯했고 뒤이어 찾은 법주사는 여러모로 풍성한 오리숲길이 어우러져 더욱 보람찼다. 돌아오는 길에 정이품송을 둘러본 발길은 덤이라 하면 알맞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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