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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림 꺾이지 않는 저항정신 곳곳에 서려

[경남 항일독립운동, 현장을 기억하다] (15) 고성지역 항일독립운동

김두천 기자 kdc87@idomin.com 2015년 06월 16일 화요일

고성 항일독립운동 발자취를 따라가는 여정은 하일면 학림리 학동마을에서 시작한다.

학동마을은 1670년경 전주 최씨 일가가 모여 형성한 집성촌이다. 이 마을은 뒤로는 수태산 줄기가, 앞에는 좌이산이 솟아 이른바 '좌청룡우백호' 지세를 갖췄다. 마을 옆으로는 학림천이 흘러 전통마을의 배산임수 입지를 잘 보여준다. 이곳은 특히 수태산 줄기에서 채취한 납작돌에 황토를 덧입혀 층층이 쌓은 옛 담장이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아련한 고향 정취가 물씬 풍기는 이 마을에는 그 고즈넉함 속에 을사늑약으로 국권을 침탈한 일본에 맞선 한 유림의 애끓는 저항 정신이 서려 있다.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일본 기만책에 맞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조선 유림으로서 절의를 지킨 최우순 선생의 한이 곳곳에 서린 것이다. 고성지역 항일독립저항 정신은 한 유림의 한말구국운동에서부터 3·1만세운동, 민족주의 독립운동, 의열투쟁, 사회운동 등 다양한 형태로 터져 나왔다.

◇"원수의 나라에 발길도 두지 않겠다" = 1910년 을사늑약으로 일본에 나라를 빼앗기자 뜻있는 선비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선비의 길을 가고자 함이었다. 창강 김택영이 쓴 <한사경>을 보면 나라가 망하자 절개를 지키려 목숨을 끊은 선비가 27명이라고 했다. 이 중 한 사람이 서비(西扉) 최우순 선생이다.

청운의 뜻을 품고 떠난 과거 길에서 당시 공공연히 이뤄지던 매관 풍토를 몸소 겪은 서비 선생은 고향으로 돌아와 오로지 독서를 통한 수신(修身)에 힘썼다. 35세 때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선비도 병법을 알아야 한다 생각해 고대 병서를 연구했고, 46세 때 큰 재해를 당한 백성의 어려운 생활을 보고 의서를 연구하는 등 이를 구제하는 데도 매진했다. 1895년 선생은 고성에서 의병을 일으켜 그 우두머리로 추대돼 이진묵과 함께 계획을 세워 일을 추진했으나 진압군에 의해 실패하고 만다. 당시 선생은 병중이었는데 사람들은 피신을 권했으나 "구차하게 사는 것은 내 뜻이 아니니 편안히 앉아 기다리겠다"며 움직이지 않았다.

을사늑약으로 조선 국권이 일본에 침탈당하자 식음을 전폐하고 두문불출하며 우국의 정을 달랬는데 자택 동쪽에 원수의 나라가 있다 하여 동쪽으로 난 사립문을 서쪽으로 돌렸다. 이것이 아호 서비의 유래다. 일본은 이때 당시 우리나라 사람을 회유하려 돈을 뿌렸다. 덕망있는 사람들에게 일본 천황 이름으로 이른바 은사금을 내린 것이다. 선생은 이는 불의(不義)한 돈이라며 받기를 거절했다. 면사무소는 기어이 헌병을 보내 그를 잡아와서 돈을 전하려 했는데 선생은 "선비는 죽일 수는 있어도 모욕할 수는 없는 법, 80 먹은 노인을 밤에 잡아갈 수 있느냐. 설사 우리 임금이 불러도 노인에게는 아침을 기다려 가기를 허용한다"는 이유로 날이 밝으면 길을 나서고 했다. 그렇게 헌병을 사랑채에 묵게 한 선생은 그날 밤 홀로 음독 자결을 하고 만다. 날이 밝으면 헌병에 잡혀가 은사금 받기를 강요당할 것이고 이를 거절하면 온갖 수모가 뒤따를 것임에 의리를 지키고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것이다.

학동마을에는 선생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랑채가 남아 있다. 학동마을 안산 기슭에는 선생의 애국하는 마음을 흠모한 주민들이 1924년 건립한 서비정도 자리를 지키고 있다. 마을로 들어서는 삼거리에는 우국충정 순의 정신을 기리는 순의비도 세워져 있다.

고성 하일면 학동마을에는 서비 최우순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랑채가 남아 있다. /김구연 기자 sajin@

학동마을에 사는 최상석(60) 씨는 "서비 선생 사후 유림장으로 45일 장례를 치르는 동안 80 노 선비의 우국충정을 기리는 당시 수많은 유림과 문중 대표, 명문 사대부 조문이 이어져 마을이 인산인해를 이뤘다"며 "순의 후 일본 압박 속에 선생의 후손들은 평생을 가꿔 온 생가마저 처분하고 마을을 떠나 살았다. 이 가운데에도 일제 감시 속에 선생의 향사를 모시는 서비정을 지어 절의를 숭상한 주민들의 기개도 남다르다"고 말했다.

◇치열한 독립 열망 걸맞은 기록 보존 필요 = 고성지역 3·1항일독립만세운동은 고성읍 무량리에서 사는 박거수 선생이 1908년 사재를 털어 덕선리 선동마을에 설립한 철성의숙에서 시작됐다.

애국애족정신으로 나라를 되찾고 조국의 완전 독립을 목표로 삼은 철성의숙은 학생들에게 애국가를 부르게 하고 학교 주변에는 무궁화를 심는가 하면 개천절에는 대운동회를 열어 민족의식 고취에 열중했다. 1919년 3월 15일 진주 출신 의열단원인 이주현이 이곳을 찾아 박거수와 박진완에게 고성에서 독립만세를 거행할 것을 설득하고 독립선언서를 전하고 돌아갔다.

박거수 선생과 박진완 선생은 배만두·이상은·김상욱 선생 등과 실행 계획을 세웠다. 17일을 거사일로 정한 이들은 박거수 선생 집과 철성의숙에서 태극기를 만들었다. 거사는 마산가도, 통영가도, 진주가도, 대가가도 네 가도에서 한꺼번에 일으키기로 했는데 대가가도(철성의숙에서 읍내로 가는 길) 거사가 사전에 누설되면서 헌병이 들이닥쳐 무산되고 말았다.

철성면 독립만세 열망은 이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3월 22일에는 철성면 성내동 출신 안태원과 부산상업학교 학생으로 고향에 돌아와 있던 서동조 선생 등이 고성보통학교 200여 명과 함께 쌀장터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일본 헌병과 경찰이 총검으로 위협하며 주도 인사들을 검거하자 이들은 이내 해산하고 말았다.

쌀장터가 있던 자리(고성읍). 독립만세를 열망하는 사람들이 모였던 곳이다. /김구연 기자 sajin@

4월 1일 같은 장소에서는 김진만, 문상범 선생 등이 장날을 이용해 만세시위를 전개했다. 이들은 쌀장터에 사람이 모이자 태극기를 흔들고 독립만세를 외치며 어시장으로 향했다. 시위가 커지자 일본 헌병과 재향군인, 소방대원 심지어 일본 상인까지 엽총으로 위협하기 시작했다. 이를 보고 격분한 문상범 선생은 헌병에 덤벼들었다 총검에 맞아 어시장 안 샘물터를 피로 물들이며 쓰러졌다. 문상범 선생이 헌병에 무참히 끌려가자 사람들은 울분을 억누르고 해산했는데 이 당시 샘물터 우물이 그 현장에 지금도 남아 있다.

문상범 선생이 일본 헌병의 총검에 맞아 쓰러졌던 고성 전통시장 안 샘물터. /김구연 기자 sajin@

현재 고성읍이 된 철성면 항일독립만세 외에도 3월 28일에는 상리면 오산리에서 만세 시위가 펼쳐졌다. 3월 30일에는 구만면 국천 모래사장에서 대규모 만세시위가 일어났다. 구만·개천·마암면 주민들이 모여 당시 인파는 500여 명에 달했다. 이를 주도한 최정원 선생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허재기 선생이 공약 3장을 설명하자 인파는 독립만세를 외치기 시작했다. 이어 시위대는 10리쯤 떨어진 회화면 배둔장터로 향했다. 일제는 헌병과 경찰을 동원해 총기를 들고 길을 막아 대기했으나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진했다. 이날 배둔장터에서도 장날을 맞아 만세시위가 크게 일었는데 국천 모래사장 인파들과 배둔 인파가 합세하면서 시위 인원은 800여 명까지 늘었다.

4월 2일에는 대가면 송계리 사립 송계의숙 앞에서도 송계리 주민 300여 명이 참여한 만세 시위가 있었다.

박거수 선생이 설립한 철성의숙이 있던 자리(고성읍 선동마을). /김구연 기자 sajin@

현재 철성의숙은 흔적을 찾을 수 없으나 그 자리는 빈터로 남아 있다. 1971년 고성군 만세운동을 기념하는 창의탑이 배둔에 세워졌는데 이는 1988년 도로 확장으로 구만면 입구로 옮겨졌다가 다시 지난 2007년 5월 회화면 배둔시외버스터미널 앞 소공원으로 이전됐다. 기념탑 아래에는 이날 만세시위에 관한 설명이 기록돼 있는데 이를 두고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는 "시위 일자를 3월 20일로 기록하는가 하면, 3월 15일 철성의숙에서 이뤄진 만세시위에 대한 논의가 배둔장터 만세시위 이후에 있었던 것으로 기록하는 등 잘못 기록된 내용이 있어 수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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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천 기자

    • 김두천 기자
  • 창원시청과 시의회를 담당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