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아너소사이어티 아름다운 나눔] (5)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

그는 변기를 부여잡으며 마음을 다잡았다. '무너지면 안 된다. 포기하면 가족들은….' 그는 손등으로 입을 닦아 내고는 갑판으로 나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다시 일을 거들었다. 배를 탄 지 몇 개월이 지났지만 이놈의 뱃멀미는 나아질 기미가 없어 하루에도 몇 번이고 '더는 못하겠다'는 생각과 '그러면 가족은…' 하는 갈등 속으로 그를 몰아넣었다.

지난해 12월 2일, 41번째 경남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가입한 박택열(70) 통영 다림횟집 대표. 그가 과거를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혔던 대목이다. 어려웠던 30대 시절, 몰락한 집안의 장남으로 가족 생계를 혼자 떠안아야 했던 그가 활어 수출선 선원으로 일했을 때의 기억이다. 그로부터 40년이 흘러 그는 통영시 태평동 통영활어시장 안에서 작은 횟집을 하고 있다.

◇항일 독립유공자의 자손 = 박택열 대표는 1944년 통영 태평동 동피랑 아래, 강구안을 앞에 둔 443번지에서 3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할아버지 박종환 선생은 소주 공장, 막걸리 공장, 어장 등을 하던 지역에서 알아주는 사업가이면서 항일독립운동을 했던 독립유공자였다. 부유한 환경 속에서 유년시절을 보낸 그는 아버지가 사업을 하던 서울에서 중·고교 시절을 지내다 고등학교 3학년 때 조부모와 어머니가 계시던 고향으로 다시 돌아와 통영고등학교를 졸업했다. 공부에는 취미가 없었다는 그는 그나마 운동 쪽에 적성이 맞아 경희대 체육학과로 진학했다. 그리고 우연히 교수님 권유로 ROTC(학사장교)가 된 그는 졸업 후 장교로 군 복무를 마쳤다. 그 사이 아버지 사업이 연거푸 실패하면서 집안은 쇠락하게 된다. 그는 '쫄딱 망했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경남 41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박택열 통영 다림횟집 대표. 박 대표는 '나눔은 돈보다 마음이 우선'이라 말한다. /박일호 기자 iris15@idomin.com

"아버지께서 사업에 실패하면서 할아버지 재산을 탕진했고, 끼니를 걱정해야 했어요. 전역하고 교사 자격증이 있어서 체육선생이 되려고 했는데 할머니, 어머니, 동생 넷을 모두 제가 책임져야 하는 상황이었어요."

박 대표는 하는 수 없이 일본에 활어를 수출하는 대보무역이라는 회사에 취직을 한다. 그의 나이 서른두 살이었다. 사무실 일이 주 업무였지만, 그는 배가 출항할 때 승선해 선원 일까지 1인 2역을 자청했다. "74년도쯤 될 거예요. 당시 교사월급이 1만 원 정도 된 것으로 기억하는데 저는 선원 일까지 하면서 5만 원 정도 받았어요. 한 200t 되는 크지 않은 목선인데 그때는 항해사고가 잦아 죽는 사람이 많았어요. 그러니 위험수당까지 포함된 것으로 보면 되죠. 경험도 없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죠."

그는 그 시간을 생지옥 같았다고 회상했다. "한 6개월 하니 좀 견딜 만하더라고요. 생지옥 같은 생활을 한 8년을 일했어요. 그랬더니 돈이 모이더라고요. 그러면서 서서히 일어섰죠."

그는 모은 돈으로 팔렸던 본가를 되사고 양식장 사업과 멸치잡이 기선권현망 사업에 투자해 돈을 불려나갔다.

◇계속되는 시련의 파도 = 박 대표가 마흔 살쯤 됐을 때 그는 회사를 퇴사하고 자녀 교육을 위해 서울로 이사를 한다.

"82년 정도 될 거예요. 서울로 가서 아파트를 사고 거기서 생활했어요. 저는 양식장, 멸치잡이 등 챙겨야 할 일은 통영에 있어서 왔다 갔다 했죠. 딸, 아들, 딸 이렇게 셋인데 둘째와 셋째는 호주를 거쳐 스위스, 영국으로 유학을 보내 대학 공부를 시켰죠. 그런데 호사다마라고…."

95년께. 통영에도 부동산 붐이 일면서 그는 본가 터에 주상복합아파트를 짓는 사업을 벌인다. 지하 1층 지상 6층의 큰 건물이었다. 하지만 건축을 담당한 회사에 돈을 융통해 줬다가 그는 사기를 당하게 된다. "완전 거지가 됐습니다. 서울 아파트 팔고 다른 사업들 다 정리해서 빚잔치를 했어요. 한 19평 되는 지금의 횟집 건물과 터, 횟집 앞 공터만 조금 남았죠."

사업에 실패하고 아내와의 사이에도 금이 가면서 그는 결국 이혼을 하게 된다. 그의 나이 쉰네 살. 그 후로 그는 은둔생활을 하며 집 밖에도 나가지 않았다. "무슨 낙이 있었겠어요. 자살하려고 생각도 했는데 차마 아이들이 밟혀서 못하겠더라고요. 밥을 굶다시피 하면서 살았어요. 그런데 내가 얼마나 불쌍했으면 지금 집사람이 죽도 끓여주고, 반찬도 해서 챙겨주고…. 지금 집사람은 예전에 우리 집에 세를 살아서 아는 사이였는데…. 그러면서 기운을 조금씩 차렸죠. 참 고마운 사람이지요."

재혼을 한 그는 다시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할 일이 많았다. 아이들 유학비와 생활비는 물론 챙길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참 하늘이 무너져도 살아날 구멍은 있다고…. 우리 집 앞이 원래 공터였는데 어느 날부터 경기가 살아나면서 하나 둘 사람들이 들어와 노점을 하더라고요. 그때 우리도 횟집을 시작했죠. 7∼8년 전쯤부터 이곳 활어시장이 활성화되면서 활어 노점 자리도 경쟁이 되다 보니 자릿세를 받게 되고, 우리 횟집도 잘되고 서로 윈윈하게 됐죠. 그러면서 거의 빚을 다 갚아가고 있어요."

박택열(오른쪽) 통영 다림횟집 대표. /박일호 기자

◇나누면 모든 일이 더 잘됩니다 = 2014년 12월 2일, 박 대표는 경남 41번째 아너소사이어티 회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김동진 시장을 잘 아는데 지난해 만난 자리에서 '통영에 아너소사이어티가 한 명이 없다'고 하소연을 하더라고요. 그 이야기를 집사람에게 했더니 선뜻 승낙을 했고요. 과정은 그렇지만 사실 집사람 만나고 제2의 인생을 멋지게 살게 된 데 대한 보답이죠."

그는 기부의 또 다른 이유로 나눔문화 확산을 꼽았다. "횟집 하는 내가 기부를 하면 다른 사람들도 그 문턱을 높게 보지 않을 것이고, 그렇게 나눔 문화가 확산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어요. 그러니까 돈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음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그리고 나눔을 실천하다 보니 하는 일이 다 잘되더라고요. 우연인지는 모르지만 저는 그렇게 믿고 있고, 또 제게는 그랬어요."

이 밖에도 그는 지난해 10월 사재 8000만 원을 들여 태국 최북부 치앙라이 거주 소수민족을 위해 빠뚱 충무교회를 세웠다. 또 교회 옆 학교에 빠뚱 충무 기숙사를 건립했다. 그는 앞으로 5000여만 원을 더 들여 학교로 오는 길을 포장하고, 교실이 없는 5∼6학년 아이들을 위해 내년 1월부터 교실을 지어 줄 계획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그는 아내 손옥선(67) 씨의 아너소사이어티 가입을 통해 부부회원이 되는 것과 장학재단 설립을 꿈꾸고 있다. "집안 형편이 다시 좋아지면서 제가 친구들에게 돈을 많이 빌려줬어요. 그런데 집사람이 좀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저 모르게 모은 돈으로 땅을 좀 샀는데 그게 엄청나게 올랐어요. 베푸니까 돈이 모이더라고요. 그래서 그 땅하고 나머지를 정리해서 장학재단을 만들 생각입니다. 대략 30억 원 정도 계산하고 있어요. 재산이란 모래 같아서 움켜쥘수록 빠져나가 버리더라고요. 그러니 베풀어야죠."

장학재단 설립은 장손으로서 조상에 대한 역할이자 후세를 위한 투자라고 설명했다. "할아버지가 애국자고 재산이 많았지만 아버지와 제 세대에서 다 까먹어 집안이 망가졌으니, 가문의 명예를 회복하는 의미가 있습니다. 동생들도 공부할 여건이었다면 더 잘됐을 거예요. 그래서 공부의 중요성을 잘 알지요. 돈이 없어 꿈을 펼치지 못하는 통영지역 학생을 위해 설립하려는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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